태양광 수요·관세 회피·ETF 자금 '퍼펙트 스톰'에 재고 고갈
JP모건 공급 중단, 대차 이자율 연 200% 폭등…유동성 증발
JP모건 공급 중단, 대차 이자율 연 200% 폭등…유동성 증발

사태의 진앙은 인도였다. 힌두교 최대 축제인 디왈리 기간, 부의 여신 '락슈미'를 기리기 위해 귀금속을 사는 전통이 올해는 유독 은에 쏠렸다. 인도 최대 귀금속 정제소 MMTC-팜프 인디아의 비핀 라이나 트레이딩 책임자는 "27년 경력에서 이런 광적인 시장은 처음 본다"며 "지난주 초 회사는 사상 처음으로 은 재고가 완전히 소진되는 사태를 맞았다"고 밝혔다. 인도 전역의 소매상들이 품절 사태를 겪으면서 은화, 장신구 등 실물 은이 귀해져 거래가 일시 중단되기도 했다.
네 겹 악재 '퍼펙트 스톰'이 런던 덮쳤다
이러한 열풍은 '퍼펙트 스톰'이라 불릴 만한 네 가지 요인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다. 첫째, 2020년대 중반 이후 급성장한 태양광 패널용 은 수요가 공급을 꾸준히 웃돌았다. 2021년부터 2025년까지 쌓인 공급 부족분은 6억 7800만 온스(약 2만 1000톤)에 이른다. 둘째, 트럼프 행정부의 '상호보복관세' 도입 우려 때문에 트레이더들이 2억 온스 넘는 은을 미국 뉴욕 창고로 미리 옮기면서 런던의 재고 고갈을 부채질했다. 셋째, 달러 약세와 인플레이션 걱정에 '디베이스먼트 트레이드(화폐가치 하락에 베팅하는 거래)'가 유행하며 세계 은 ETF 투자자들이 1억 온스 이상을 사들여 유통 가능한 실물 은이 급격히 줄었다. 마지막으로, 인도 투자 인플루언서 사르탁 아후자가 "금값 대비 100:1 비율이면 은이 다음 차례"라고 주장한 게시물이 약 300만 팔로워에게 확산돼 폭발적인 소비를 불렀다.
인도 시장이 공급 부족으로 허덕이자, 딜러들은 재고를 확보하려고 런던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런던의 금고 역시 사실상 비어있었다. 런던금시장연합회(LBMA) 인증 금고 재고의 대부분이 ETF 물량에 묶여 있어 실제 유통 가능한 은은 10~15%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세계 최대 귀금속 트레이더인 JP모건 체이스는 약 2주 전 "10월 중 인도에 공급할 수 있는 은이 없으며, 가장 빠른 공급은 11월에나 가능하다"고 고객들에게 통보했다.
유동성 마비된 런던…'공황'에 빠지다
인도발 수요 충격은 런던 시장의 취약한 고리를 정확히 때렸다. 런던 시장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유동성이 마르면서 하룻밤 은을 빌리는 비용(단기 대차 이자율)은 연이율로 환산할 때 한때 200%까지 치솟았다. 주요 은행들이 가격 제시를 멈췄고, 일부 트레이더는 두 은행 간 잘못된 호가 차이를 이용해 즉시 차익을 얻을 수 있을 만큼 시장 왜곡이 심해졌다. 스위스 귀금속 정제소 아르고르-헤라우스의 로빈 콜벤바흐 공동 CEO는 "현재 런던에서 신규 대차를 위한 유동성은 거의 없다. 계약된 물량 외에는 은 입고를 전면 중단했다"고 밝혔다. 혼란 속에서 뭄바이의 부유층 사이에서는 가격을 따지지 않고 은을 확보하려는 쟁탈전이 벌어져 프리미엄이 통상 온스당 수 센트 수준에서 5달러 이상으로 폭등했다. M.D. 오버시즈 불리언의 아미트 미탈 제너럴 매니저는 "28년 경력에 이런 프리미엄은 처음 본다"고 혀를 내둘렀다.
1998년 워런 버핏의 대량 매수 사태와도 비교되는 이번 위기에 LBMA는 개입하지 않고 있다. 과거 사태가 물류 병목 현상 등 기술 문제였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실물 공급의 절대량 부족이 원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런던의 비 ETF 잔여 유동 물량은 1억 5000만 온스 미만으로 추정된다.
시장은 공급 부족 압박을 풀기 위해 뉴욕 상품거래소(Comex) 창고의 은을 런던으로 긴급히 실어 나르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상적으로는 나흘이 걸리지만 통관이 늦어지면 몇 주 이상 걸릴 수 있어 트레이더들은 납품 계약을 이행하지 못할 위험에 처했다. 실제로 지난 2주간 코멕스 창고 재고는 25년 만의 최대폭인 2000만 온스 이상 줄어 공급 압박이 풀릴 조짐을 보였다.
혼란 속에서 은 가격은 극심한 등락을 보였다. 지난 18일 국제 은 가격은 온스당 54달러를 넘어서며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으나, 당일 미국과 중국 관계 개선 조짐에 6.7% 폭락하는 등 심하게 흔들렸다. 1년 전부터 '런던 스퀴즈'를 경고해 온 TD증권의 대니얼 갈리 분석가는 "예상보다 복잡한 물류와 세계 소매 매수 광풍이 겹친 결과"라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단기로는 공급망이 일부 정상화되더라도, 중장기로는 태양광, AI 서버, 전기차 배터리 등 산업 수요가 은 가격의 '상향 평준화'를 이끌고, 귀금속 시장이 '금-은 이중구조'로 재편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