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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트럼프의 베네수엘라 구상은 소국에 실존적 위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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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트럼프의 베네수엘라 구상은 소국에 실존적 위협”

리셴룽 전 싱가포르 총리.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리셴룽 전 싱가포르 총리. 사진=로이터

미국이 베네수엘라를 경제적 압박을 통해 사실상 관리·통제하겠다는 구상을 내놓자 싱가포르가 국제 질서 전반에 대한 심각한 경고 신호라는 입장을 내놨다.

베네수엘라 사태가 지리적으로는 멀리 떨어진 남미의 문제이지만 작은 국가들에게는 국제법과 규범의 붕괴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뜻이다.

10일(이하 현지시각)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싱가포르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베네수엘라 개입 구상에 대해 미국의 동맹국 가운데서도 비교적 강한 우려를 공개적으로 표명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미군의 작전으로 니콜라스 마두로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생포한 뒤 베네수엘라의 석유 자원과 경제 운영을 미국 주도로 재편하겠다는 구상을 밝힌 바 있다.

◇ “이런 세계라면 우리는 문제에 직면”


블룸버그에 따르면 리셴룽 싱가포르 선임장관은 지난 8일 싱가포르 동남아시아연구소(ISEAS·유소프 이샤크 연구소)가 주최한 포럼에 참석해 “소국의 관점에서 보면, 만약 이것이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이라면 우리는 분명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리 장관은 지난 2004년부터 2024년까지 약 20년간 싱가포르 총리를 지낸 지도자다. 그는 싱가포르는 국제법을 위반하는 개입에 대해 일관되게 반대해 왔다며 1983년 미국의 그레나다 침공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례를 함께 언급했다.

리 장관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형성된 국제 질서가 싱가포르의 번영을 떠받쳐온 토대였다고 강조했다. 이 질서는 미국이 주도적으로 만들고 유지해 왔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최근 행보는 그 틀 자체를 약화시키고 있다는 인식이 싱가포르 내부에 확산돼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

◇ “힘의 논리만 남으면 소국은 취약”


리 장관은 국제 규범이 무너지고 강대국이 이를 지킬 의지를 보이지 않을 경우 소국들은 ‘정글의 법칙’에 내몰릴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다만 그는 현실 정치의 냉혹함도 인정했다. 그는 “어느 정도는 늘 그래 왔다”며 “미국뿐 아니라 다른 강대국들도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해 왔다”고 말했다.

그는 소국이 이런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한 조건으로 강한 경제력과 신뢰할 수 있는 군사력, 그리고 이웃 국가 및 세계의 번영 거점들과의 협력을 꼽았다. 리 장관은 싱가포르가 국내총생산(GDP)의 약 3%를 국방비로 지출하고 있다는 점도 함께 언급했다.

◇ 원칙과 실익 사이의 균형


리 장관은 국제 분쟁에 대한 싱가포르의 대응 원칙도 설명했다. 다른 국가 간 충돌이 발생하면 자국의 이익과 함께 지켜야 할 원칙이 있는지를 먼저 따져본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서는 강한 비판 성명을 내고 일부 제재에 동참했지만 그렇다고 러시아와의 외교·경제 관계를 전면 단절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블룸버그는 싱가포르의 이런 인식이 트럼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간 전략 경쟁,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군사적 행보 등과 맞물리며 소국 외교의 딜레마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전했다.

◇ “베네수엘라 사태는 남의 일이 아니다”


싱가포르가 베네수엘라 사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배경에는 국가 규모와 취약성에 대한 오랜 역사적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이다. 말레이시아와 분리 독립한 이후 자원과 배후지가 없는 도시국가로 출발한 싱가포르는 국제 규칙과 다자 질서가 무너질 경우 가장 먼저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공유해 왔다.

블룸버그는 트럼프 행정부의 베네수엘라 구상이 단순한 중남미 지역 이슈를 넘어 국제 질서 전반과 소국의 생존 전략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전했다.


김현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oc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