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아침저녁으로 소슬바람이 불긴 해도 아직은 여름의 잔해가 남아있는 때라서 산에 올라도 단풍을 만나기 쉽지 않다. 도봉구에 사는 덕분에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산이 수락산이다. 중랑천 건너 동쪽에 자리한, 아파트 숲을 지나 원경으로 보이는 수락산은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락산을 오른 것은 정기적으로 산행하는 숲 모임 덕분이었다. 이번 수락산행은 늘 바라보던 장암역 쪽에서 시작하지 않고 반대편 마당바위에서 출발해 금류동 계곡을 따라 오르는 코스라 일말의 호기심도 산행을 부추겼다.
해 지는 초가을 창가에 서서 노을에 젖은 수락산을 바라보며 소슬해지던 마음을 떠올리며 산을 올랐다. 지구촌 곳곳에서 폭우와 산사태로 재난을 겪고 있는데 수락산의 금류동 계곡은 물이 말랐다. 가을이 되도록 태풍 한 번 지나지 않은 가뭄 탓이기도 하지만 수락산은 이름과 달리 인근 다른 산에 비해 수량이 적은 편이라고 한다. 금류동 계곡을 따라 금류폭포·은류폭포·옥류폭포라는 빛나는 이름들이 무색하게 물은 보이지 않고 커다란 바위들만 뽀송뽀송한 채로 가을볕을 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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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확대보기소슬바람이 숲을 지날 때마다 도토리가 후둑후둑 땅바닥에 떨어져 뒹군다. 길가에 핀 쑥부쟁이나 노란 고들빼기꽃, 분홍의 이질풀꽃도 소슬하다. 더는 물을 긷지 않고 겨울 채비를 시작한 꺼칠한 나뭇잎들이 바람에 하나둘 떨어지기도 한다. 산길을 오르다가 사슴벌레 한 마리를 발견했다. 아무리 열심히 외워도 다 알 수 없는 게 자연이라 적당히 눈감고 지나쳐야겠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막상 마주치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어느 소설가는 말했다. 생각도 시야도 필요한 정보만 습득하고 불필요한 정보들을 가지치기하는 건 생존전략이지만 길가에 핀 들꽃의 이름을 알고 한 나무의 변화를 목격하고, 저 새의 습관을 아는 것이 삶을 누리는 것이라고. 그 말이 진실이라면 나는 얼마만큼은 삶을 누리고 사는 듯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쉬엄쉬엄 오르다 보니 어느덧 정상이다. 지난번에 왔을 때와 달리 정상의 표지석도 새롭게 세워지고 날씨가 좋아서인지 정상엔 제법 사람이 많다. 수락산 능선의 바위들은 서울을 향해 고개 숙이고 있는 형국이라 조선 태조 이성계는 수락산을 서울의 수호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하산길은 철모바위·코끼리바위·종바위·하강바위·치마바위 같은 명품 바위들이 멋스러운 능선 길로 잡았다. 같은 산이라도 오르는 계곡에 따라 전혀 다른 풍광을 펼쳐 보인다. 그래서 산행은 할 때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동막골 자연휴양림을 지날 때 간판에 쓰인 글이 눈길을 끌었다. “모든 것은 숲으로부터 온다”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눈앞에 보이는 꽃들과 열매들을 찬찬히 살핀다. 보라색 좀작살나무 열매와 선홍의 덜꿩나무 열매, 가을 모란이란 별칭을 지닌 추명국과 백일홍, 비비추까지 초가을의 숲에서 만난 고운 것들의 이름을 하나씩 입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숲은 늘 그 자리에 있지만 볼 때마다 새로운 모습이다.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달라진 까닭도 있겠지만 숲은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이제 머지않아 산은 오색단풍으로 타오를 것이다. 그렇게 한바탕 잔치를 하고 깊은 동면에 빠져들 것이다. 숲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꼼꼼히 읽을 수 있을 만큼 깊고 세심한 눈을 갖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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