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카인 거래 규모 웃도는 피해…월 67만원이면 범죄 도구 확보, 동남아 조직 아프리카로 확산
이미지 확대보기인공지능(AI) 기술이 온라인 사기의 진입장벽을 크게 낮추면서 국제 범죄 산업이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과거 동남아시아의 대규모 사기단지를 중심으로 운영되던 범죄 조직들이 AI 소프트웨어와 온라인 범죄 서비스 시장을 활용해 아프리카와 유럽 등 세계 각지로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다.
특히 지난해 세계 42개국에서 집계된 사기 피해액이 4420억달러(약 594조원)에 달해 일부 추정치에 따른 세계 코카인 거래 규모를 웃도는 것으로 나타났다.
블룸버그통신은 중국계 온라인 사기 조직들이 AI와 암호화폐, 불법 개인정보 거래망을 활용해 범죄 비용을 낮추고 단속을 피해 사업장을 분산시키면서 세계적인 사기 산업을 형성하고 있다고 11일(현지시각) 보도했다.
블룸버그는 케냐와 나이지리아, 캄보디아 등지의 범죄 현장과 수사 자료, 사이버보안 기업들의 분석을 토대로 온라인 사기 산업의 구조적 변화를 추적한 결과 이같이 나타났다고 전했다.
◇ 동남아 벗어나 아프리카로 확산…케냐 아파트서 중국인 20명 체포
블룸버그에 따르면 지난 7월 초 케냐 수도 나이로비의 한 현대식 아파트 18층에 경찰이 들이닥쳤다.
현장에서는 삼성 컴퓨터와 화웨이·레드미 스마트폰, 중국과 말레이시아 여권 수십 개가 발견됐다.
일부 용의자는 도주했지만 중국 국적자 약 20명이 체포됐다.
용의자들은 중국과 캄보디아, 마다가스카르 등에서 케냐로 들어온 것으로 조사됐다.
블룸버그는 이 사건이 “중국계 사기 조직의 활동 거점이 동남아의 대규모 시설에서 다른 대륙의 일반 아파트로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분석했다.
기존 사기 조직들은 캄보디아와 미얀마 등지에서 대규모 인력을 동원하고 외부와 차단된 시설을 운영했다.
그러나 각국 정부의 단속이 강화되자 아파트와 호텔, 차량 등 소규모 공간을 활용하는 형태로 조직을 분산시키고 있다.
나이지리아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확인됐다.
지난 2024년 말 라고스에서는 중국계 기업에서 일하던 한 여성이 해고된 뒤 나이지리아 반부패 수사기관에 근무 실태를 알리면서 대규모 사기 조직에 대한 수사가 시작됐다.
수사당국은 빅토리아아일랜드의 5층 건물에서 피싱 조직을 적발하고 700명 넘는 용의자를 체포했다.
일부 용의자들은 온라인 사기와 신원 도용, 사이버 기반 다단계 투자사기 등의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블룸버그는 이러한 조직들이 중국인 관리자를 중심으로 현지 인력을 고용하고 AI로 만든 가짜 인물 정보와 불법 전화번호 등을 활용해 사기를 벌였다고 전했다.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에 따르면 온라인 사기단지에 유입된 인신매매 피해자들의 국적은 현재 89개로 파악됐다.
이는 2023년 초보다 5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
피해자의 출신 국가도 아시아를 넘어 캐나다와 이탈리아, 스페인, 폴란드, 아르헨티나, 에콰도르 등으로 확대됐다.
◇ 월 500달러면 범죄 도구 확보…AI가 사기 비용 낮춰
온라인 사기 산업의 급속한 확산을 뒷받침하는 핵심 요인은 범죄에 필요한 기술과 서비스를 손쉽게 구매할 수 있다는 점이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범죄자들은 불법 온라인 거래시장에서 개인정보와 가짜 계정, 사기 웹사이트 제작 도구, AI 딥페이크 소프트웨어, 자금세탁 서비스를 각각 구매할 수 있다.
사이버보안 연구진은 일부 범죄 도구가 월 500달러(약 67만원)의 구독료로 제공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메일 주소 1만개에 사기 메시지를 보내는 서비스는 1달러(약 1344원)에 이용할 수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기본적인 피싱 서비스도 100달러(약 13만원) 미만에 구매할 수 있다.
범죄자들은 정상적인 개발자 플랫폼의 무료 계정을 악용해 가짜 금융기관 웹사이트를 빠르게 제작하기도 한다.
미국 보험중개·위험관리업체 마시리스크의 아시아 사이버 담당 책임자 숀 레츠는 “사기 범죄를 저지르는 데 필요한 비용이 크게 낮아지고 절차도 쉬워졌다”고 지적했다.
그는 기업들이 계속 달라지는 사기 수법을 하나씩 차단하는 방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AI를 활용한 자동화 기술이 확산되면서 과거에는 전문적인 기술과 많은 인력이 필요했던 범죄를 소규모 조직도 실행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 불법 거래 플랫폼서 32조원 거래…개인정보·딥페이크 사고팔아
블룸버그가 주목한 사례 가운데 하나는 중국어 기반 불법 거래 플랫폼인 신비 개런티(Xinbi Guarantee)다.
이 플랫폼은 미국 콜로라도주에 등록된 회사와 연관돼 있었으며 지난 9월 미국 당국이 텔레그램 채널과 암호화폐 지갑을 압수하기 전까지 약 240억달러(약 32조2500억원)의 거래를 처리한 것으로 파악됐다.
블록체인 분석업체 체이널리시스가 이 플랫폼의 거래 흐름을 조사한 결과 개인정보 판매자와 딥페이크 프로그램 공급업체, 가짜 계정 생성업체, 웹사이트 개발자, 자금세탁 조직 등이 복잡하게 연결돼 있었다.
한 구매자는 개인정보 판매업체에 834달러(약 112만원)를 송금했다.
다른 구매자는 AI와 딥페이크 소프트웨어 판매자에게 9150달러(약 1230만원)를 지불했다.
별도의 AI 관련 업체에 200달러(약 27만원)가 지급된 거래도 확인됐다.
이처럼 범죄에 필요한 기능을 각각 구매해 결합하는 방식은 범죄 조직의 운영 비용을 낮추고 새로운 사기 수법을 빠르게 만들어내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범죄 조직의 복원력도 높아졌다.
신비 개런티가 폐쇄된 당일 한 불법 금융서비스 판매자는 다른 거래 경로를 안내하며 영업을 계속했다.
이 조직은 과거에도 세 차례 유사 플랫폼의 폐쇄를 겪었으며 여러 채널에 사업을 분산해 단속 이후에도 활동을 이어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블룸버그는 이러한 범죄 서비스 시장이 기존 대규모 사기단지와도 연결돼 있다고 전했다.
체이널리시스에 따르면 미얀마와 태국 국경의 악명 높은 사기 거점인 KK파크와 연관된 암호화폐 지갑에서는 중개인을 거쳐 1840만달러(약 247억원)가 이동한 거래도 확인됐다.
◇ AI로 가짜 투자·연애 사기 정교화…피해자 3명 중 2명 하루 안에 송금
AI는 범죄 비용을 낮추는 데 그치지 않고 피해자를 속이는 방식도 바꾸고 있다.
범죄 조직들은 탈취한 개인정보를 활용해 소셜미디어 이용자에게 접근한 뒤 AI로 작성한 대화 내용과 가짜 웹사이트를 이용해 신뢰를 얻고 있다.
텔레그램에서는 실시간 번역 서비스가 월 20달러(약 2만7000원) 미만에 제공되고 있었다.
이 서비스와 연결된 자료에는 투자 권유 문구와 연애를 빙자한 사기 대본, 피해자의 성적 선호도에 따른 대화 전략 등이 포함돼 있었다.
미국 연금제도와 신용점수, 식습관에 관한 정보까지 사기 대화에 활용되고 있었다.
블룸버그는 캄보디아 깐달주의 폐쇄된 사기단지에서도 범죄 조직의 세부 운영 방식을 확인했다.
지난 1월 당국이 압수한 이 시설에서는 수백명의 직원이 온라인 투자사기와 신분 사칭 범죄를 벌였던 것으로 조사됐다.
현장에서 발견된 약 90쪽 분량의 교육자료에는 고객과 신뢰를 구축하고 상대를 칭찬하는 방법, 가짜 인물 설정과 감정적인 대화 방식 등이 담겨 있었다.
또 다른 수기 자료에는 고급 상품과 자동차, 고급 호텔, 관광지 관련 게시물에 댓글을 남긴 40~50대 여성을 범죄 대상으로 찾으라는 지침이 포함돼 있었다.
중국의 지도 서비스를 활용해 기업이나 식당 등의 경영자를 찾아내고 사업 정보를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접근하는 방법도 제시됐다.
사기 조직들은 과거 수주 또는 수개월 동안 피해자와 친밀감을 쌓는 이른바 '돼지도살 사기' 수법을 활용해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사기 피해자의 약 3분의 2가 범죄자와 처음 접촉한 뒤 24시간 이내에 돈을 송금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AI와 개인정보 분석, 정교한 사기 대화 기술이 결합하면서 피해자를 속이는 과정이 더욱 빨라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 세계 사기 피해 594조원…메타, 사기 계정 1600만개 삭제
국제사기방지연합(GASA)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42개국에서 발생한 사기 피해액은 4420억달러(약 594조원)로 추산됐다.
이 금액은 일부 추정치에 따른 세계 코카인 거래 규모보다 많다.
다만 이는 조사 대상 국가에서 집계된 전체 사기 피해 추정액으로 AI를 활용한 범죄만의 피해액을 뜻하지는 않는다.
미국의 신고된 사이버범죄 피해액도 크게 증가했다.
2001년 1780만달러(약 239억원)였던 피해액은 지난해 약 210억달러(약 28조2200억원)까지 늘었다.
GASA 조사에서는 전 세계 성인 인구의 약 57%가 사기범의 접근을 받은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기업들도 막대한 비용을 부담하고 있다.
영국계 글로벌 금융그룹 HSBC는 사기 대응과 관련해 연간 약 10억달러(약 1조3400억원)의 부담을 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소셜미디어 업체들은 사기 조직이 이용하는 계정과 광고를 차단하기 위해 대규모 대응에 나서고 있다.
메타에 따르면 지난해 이후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서 범죄 사기단지와 관련된 계정 1600만개 이상을 삭제했다.
사기 광고도 6500만개를 제거했으며 이 가운데 94%는 이용자 신고가 접수되기 전에 삭제했다.
메타의 사기방지·보안정책 책임자인 너새니얼 글라이허는 회사가 범죄 계정을 차단하면 사기범들이 새로운 계정을 만들고 기기까지 차단하면 다시 새로운 기기를 확보한다고 설명했다.
메타는 올해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사기 광고를 통해 이익을 얻었다는 의혹으로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글라이허는 해당 수익 의혹에 직접 답하지 않았지만 사기범들이 정상적인 광고주를 정교하게 모방하기 때문에 구별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말했다.
◇ 가짜 금융사이트 2년 새 4배…국제공조에도 조직 재생 빨라
AI를 활용한 피싱 웹사이트도 급속도로 늘고 있다.
미국 사이버보안업체 제로폭스가 분석한 결과 9개 개발 플랫폼과 AI 애플리케이션 제작 도구의 무료 서비스에서 확인된 피싱 페이지는 2년 동안 4배 이상 증가해 1만600개에 달했다.
범죄자들은 브라질 유통업체와 에콰도르 은행, 프랑스 금융회사, 미국 통신업체 등의 웹사이트를 모방했다.
일부 AI 프로그램은 전문적인 코딩 능력이 없는 사람도 몇 가지 명령어만으로 실제 은행의 로그인 화면과 비슷한 사이트를 만들 수 있도록 했다.
국제사회는 단속을 강화하고 있지만 범죄 조직의 재생 속도를 따라잡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최근 미국 법무부와 연방수사국(FBI), 태국 경찰을 비롯한 여러 국가의 수사기관은 메타, 마이크로소프트, 코인베이스, 스타링크 등과 협력해 국제 사기 조직을 단속했다.
이 과정에서 메타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의 계정·페이지·그룹 140만개를 비활성화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약 2만개 계정을 정지했고 스타링크는 수천개의 통신 장비에 대한 서비스를 차단했다.
태국 당국도 63명을 체포했다.
그러나 범죄자들은 차단된 계정과 웹사이트, 암호화폐 지갑을 단시간에 대체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캄보디아 정부는 지난해부터 대대적인 사기단지 단속을 벌였으며 이 과정에서 약 25만명의 외국인이 현지를 떠났다.
캄보디아 시아누크빌을 비롯한 일부 지역에서는 대규모 사기시설이 폐쇄되면서 호텔과 관련 시설들이 방치되고 있다.
캄보디아 당국은 불법 사업자의 95%를 근절했다고 주장하지만 사기 범죄를 추적하는 전문가들은 이 수치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블룸버그는 대형 사기단지에 대한 단속이 성과를 내더라도 범죄 조직이 소규모 거점으로 이동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사기 산업이 형성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워싱턴 소재 스팀슨센터의 앨리슨 피틀락 사이버 프로그램 책임자는 온라인 사기와 인신매매에 대응하려면 국가 간 법적 책임과 수사 공조를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범죄시설에서 발견된 노동자들을 무조건 범죄자로 취급하기보다 인신매매 피해자일 가능성도 함께 조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블룸버그는 AI 기술과 온라인 범죄 서비스 시장이 결합하면서 사기 조직을 설립하고 재구성하는 데 필요한 비용과 시간이 크게 줄었다고 분석했다.
이에 따라 기존처럼 대규모 사기단지를 폐쇄하는 방식만으로는 범죄 산업의 확산을 막기 어려우며 범죄에 이용되는 온라인 서비스와 자금세탁망을 차단하는 국제적 대응이 중요해지고 있다는 평가다.
김현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oc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