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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무거운 짐 내려놓고(26)]제2장 똥에서 道를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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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무거운 짐 내려놓고(26)]제2장 똥에서 道를 찾다

(26)

“하지만 육신의 집착을 어떻게 끊어?”
“그래서 도를 깨우쳐야 한다. 참 “나”는 죽음이 없이 영원한데, 도를 모르므로 물질인 육신이 참 “나”인줄 알기 때문에 집착을 끊지 못한다. 그리고 육신에 온상한 욕망이란 마음의 허상이 온갖 쾌락을 발광시켜서 죽음을 공포스럽게 하는 것이다. 아까 초저녁에도 말했지만 더럽다 깨끗하다 하고 분별하는 마음이 바로 쾌락을 발광시키는 욕망의 화신이니 그 마음을 바로잡으면 곧 참 “나”가 확연히 나타나 삶도 죽음도 초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오빠, 죽는 것이 행복하다 할 수도 있겠네? 쇼펜하우처럼........?”

“죽음의 행복? 그것은 그렇지가 않다! 쇼펜하우는 현실도피적인 허무주의 사고에서 한 말일 것이다. 죽음의 행복은 진실로 도를 깨우쳐서 자신의 영혼이 일체 집착을 끊어버린 초월적 상태가 되었을 때 가능한 말이다. 그렇지 않은 죽음은 불행이다!

선희야, 사람은 육신을 귀하게 생각해야 한다. 육신은 전생의 업에 종속된 물질이다. 따라서 업을 멸할 수 있을 때까지 끊임없이 청정하게 닦아내야 한다. 업은 두꺼운 철판과 같아서 쉬이 벗겨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항상 몸을 건강하게 해야 마음이 건강하고, 마음이 건강해야 몸도 건강한 법이니 몸과 마음을 함께 닦아야 한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함께 청정하게 되었을 때 삶도 죽음도 초월할 수 있는 도를 얻을 수 있다. 도를 얻으면 삶과 죽음의 경계가 없어지니 죽음이 행복하다는 따위의 감성적 염세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람이 업을 안은 채 죽는 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다. 어찌 보면 태어남 자체가 업을 닦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일찍 죽으면 얼마나 불행하겠느냐. 그 때문에 어린아이의 죽음일수록 안타까움이 더 큰 것이다.”

한성민은 가급적이면 선희가 도의 진실을 깨우치기를 바라면서 조용한 열변으로 분위기를 휘어잡았다. 그래서 선희는 여전히 제 몸통에서 찰깍찰깍 내는 벽시계소리도, 가끔 밤의 적막을 깨뜨리는 개 짖는 소리도 듣지 못한 채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어 무심코 “나, 오래 살래!” 하고 웃고는 말했다.
“오빠, 물질인 육신을 벗어난 영혼은 어디로 가는 거지? 천당 지옥 둘 중에 하나라던데 정말 그럴까?”

“잘 물었다. 방금 그 이야기를 할 참이었다. 여러 번 말했지만 시작과 같이 동일하다고 했지 않느냐. 삶이 시작이라면 끝이라 생각하는 죽음은 삶의 시작인 것이다. 한 생각이 떠오르면 마음의 시작인데 그 생각이 사라지면 또 다른 생각이 마음을 일으키듯이 말이다. 즉 영혼은 또 다른 육신을 입게 되어 삶과 죽음은 끊어지지 않는 줄처럼 이어진다. 봄에 꽃이 피고 겨울에 죽고 다시 봄에 피듯이 생사(生死)는 끊임없이 순환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희야, 이것을 알아야 한다. 도에서 탄생한 만물의 본질은 반드시 탄생한 그곳으로 돌아간다. 다시 말해서 온갖 탐욕 덩어리인 마음의 결정체 혼(魂)을 정화시켜서 순수한 자아인 영(靈)을 얻으면, 그 영은 물질에 종속되지 않으므로 물질인 육신을 다시는 입지 않는다. 육신을 빌어 다시 태어남이 없는 본래의 곳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영생이니 도를 얻고자 함이 여기에 있다.”

“神이 구원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고?”

“神? 사람의 영이 곧 신이요 도다. 바로 신의 분화물이지. 바가지 물이 강물이듯 말이다. 바가지 물을 쏟으면 어디로 가느냐? 강으로 가지 않느냐 마찬가지로 순수한 영은 신이요 도인 그 품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신의 구원이란 없다. 구원을 애걸해도 '참나'를 깨우치지 않는 한 신은 결코 돌아보지 않는다. 깨우쳐서 천만 가지 덕을 베풀고 천만 가지 착한 일을 하는 자 만이 스스로 찾아가서 영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구원은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받는 것이지 다른 무엇에 의지해서 받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