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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한의 디자인 인사이트(20)] 반세기를 앞서 간 '빛과 색의 천재' 겐조를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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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한의 디자인 인사이트(20)] 반세기를 앞서 간 '빛과 색의 천재' 겐조를 기리며

1970년 파리 컬렉션(Paris Collection)으로 처음 데뷔한 그는 자신이 만든 브랜드가 창립 50주년이 되는 달에 우연히도 유명을 달리했다. 일찍이 화려한 자수와 일본식 정통 문양이 어우러진 그의 디자인에 유럽은 열광했다. 자유, 평등, 박애와 시민혁명의 상징체인 파리였지만 동양인에 대한 차별이 여전한 그곳에서 오직 디자인 하나로 거장의 자리에 우뚝 선 다카다 겐죠(Takada Kenzo), 돌이켜보면 융합의 측면에서 이미 그는 반세기 이상 앞서간 선지자였다.

1939년 일본 효고 현에서 태어난 겐조(賢三)는 현명한 셋째 아들이라는 뜻으로 그의 아버지가 직접 지어준 이름이다. 이름처럼 명석했던 그는 학과 성적도 우수했지만 또래들과 어울리기보다 누나들의 패션 잡지 탐독을 좋아하던 내성적인 소년이었다. 이 시절 그는 눈이 큰 예쁜 여자의 그림을 그리고 옷을 만드는 독특한 취미의 소유자였다.
부모님의 뜻에 따라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명문 고베 대학교에 진학했지만 그만 두고 1958년 문화복장학원(Bunka Fashion College)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패션디자인의 세계로 접어들게 된다. 1960년 소엔(装苑) 잡지 패션 콘테스트에서 입상하면서 일본 패션계에서 주목받는 신인 디자이너로 떠올랐고 파리로 건너가기 전까지 기성복 디자이너로 일하게 된다.

그가 패션에 들어 선 계기는 꽃, 새, 나무, 풀, 산, 강 등이 아로새겨진 교 유젠(京 友禅) 으로 알려져 있다. 복잡한 패턴과 다양한 색체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미학적인 이 염색 기법은 이후 그의 작품 곳곳에 배어있기도 하다.

고유젠 패턴 ⓒ Learn japanese123.이미지 확대보기
고유젠 패턴 ⓒ Learn japanese123.


디자인 리서치 분야에서 이른바 민속지학(民俗誌學)으로 불리는 문화 연구에 겐조의 에스닉 룩(Ethnic look)이 미친 영향은 상당하다. 에스닉 룩은 각 민족 고유의 토속적인 의상이나 액세서리(Accessory) 등의 가젯(Gadget)에서 영감을 얻어 창조된 디자인을 통칭(通稱)하는 개념인데 특히 70년대 패션디자인의 중요한 트렌드 중 하나였으며 겐조가 일본식 트레디셔널 (Traditional)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시킨 수많은 디자인은 80년대에 이르러 랄프 로렌(Ralph Lauren)의 인디언 룩(Indian look) 그리고 90년대에는 발렌티노(Valentino)의 보헤미안 룩(Bohemian look)으로 이어졌다는 게 정설이다.

그가 파리 입성 직후 기모노의 직선적인 미와 교 유젠 같은 일본식 가젯으로 에스닉 룩(Ethnic look)의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었고 1970년에 이르러 오픈한 자신의 부티크(Boutique) 정글 잽(Jungle jap)을 통해 동서가 융합된 작품을 선보이기에 이르렀다. 동년 6월에는 대망의 엘르(Elle) 잡지 표지를 장식하며 새로운 스타 디자이너로 등장하게 된다. 로컬 디자이너 출신으로 불어도 능숙하지 못한 겐조의 성공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오직 감각 하나로 패션계에 한 획을 그은 그와 같은 성공 신화는 적어도 아시아를 통틀어 겐조가 거의 유일하다.

동서 융합의 콘셉트를 볼 수 있는 겐죠의 작품들 ⓒ Kenzo이미지 확대보기
동서 융합의 콘셉트를 볼 수 있는 겐죠의 작품들 ⓒ Kenzo

겐조의 디자인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빛과 색체의 미학적 상호 작용은 그의 작품에서 눈에 띄는 가장 큰 특징중 하나다. 얼핏 보면 화려하고 복잡하지만 수많은 색체와 패턴을 하나의 테마로 어우러지게 만드는 감각은 천재적이다.

패션이란 한정된 장르의 편견만 벗는다면 겐조의 조형 언어와 스토리텔링은 필자와 같은 크리에이터들에게 다양한 영감을 주는 훌륭한 콘셉트가 아닐 수 없다.

김정한 계원예술대 겸임교수
김정한 계원예술대 겸임교수

겐조만큼 색체를 자유자재로 쓰고 복잡하게 엮인 패턴을 하나의 조형 테마로 자연스럽게 정리할 수 있는 디자이너는 드물다. 그가 만든 소재는 그의 손에서 다시 태어났고 색체와 패턴에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명력을 부여했다. 빛과 색으로 대변되는 겐조에겐 누구보다 화려한 레퀴엠(Requiem)이 어울릴 것 같다.



김정한 씽크디자인연구소 대표(계원예술대 산업디자인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