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연합(EU)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무역 합의 직후 “미국 경제에 6000억 달러(약 828조 원)를 투자하겠다”고 밝혔지만 불과 하루도 지나지 않아 이를 사실상 번복한 것으로 나타났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7일(이하 현지시각) 자신이 소유한 영국 스코틀랜드 턴베리 소재 골프 리조트에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과 회동한 뒤 미국과 EU 간 새로운 무역 합의를 이뤘다고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EU가 미국산 제품에 대해 보복 관세를 부과하지 않기로 합의했고 미국은 유럽산 자동차 등 모든 수입품에 대해 일률적으로 15%의 관세를 부과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 합의를 통해 EU가 미국 기업에 6000억 달러 규모의 투자를 약속했다”고 강조하며 이같이 말했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 역시 이번 합의를 “대서양 양측 모두에 예측 가능성과 안정성을 가져다줄 중대한 거래”라고 밝혔다.
◇ 트럼프 “EU, 미에 6000억 달러 투자”…EU “공적 보장은 없다”
그러나 29일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에 따르면 불과 하루도 지나지 않아 EU 고위 관계자들이 트럼프의 투자 발표에 선을 긋기 시작했다.
EU 관계자들은 6000억 달러 투자 계획에 대해 “회원국 정부나 EU 공공재정에서 직접 나오는 자금이 아니라 일부 민간 기업들의 의향에 기반한 것”라고 설명했다.
한 EU 관계자는 정치 전문매체 폴리티코와 인터뷰에서 “이 투자는 EU가 공공기관으로서 보장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며 “민간 기업들이 향후 몇 년간 미국 내에 투자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며 이는 어디까지나 민간의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EU 당국자는 “6000억 달러라는 수치는 여러 산업단체와 기업들의 계획을 기반으로 산정된 것일 뿐”이라며 “EU가 이를 위해 별도의 투자 인센티브나 정책을 준비한 바는 없다”고 밝혔다.
◇ “관세는 외국이 내는 것”이라는 트럼프 인식도 도마에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합의의 핵심으로 15% 수입관세를 들며 이를 “외국이 미국 시장에 접근하기 위한 대가”라고 표현했지만 전문가들은 관세 부담이 결국 미국 소비자에게 전가된다고 지적해 왔다.
실제로 소매업체들은 대개 수입 비용 상승분을 소비자 가격에 반영하기 때문에 관세는 외국 정부가 아닌 자국 기업과 소비자들이 부담하는 구조다. 그럼에도 트럼프 대통령은 줄곧 “관세는 외국이 미국에 바치는 돈”이라는 주장을 펼쳐 왔다.
이에 따라 양측의 합의는 EU 측의 입장 선회로 인해 불과 하루 만에 신뢰성 논란에 휩싸였다. 전문가들은 "정치적 선언과 실제 이행 가능성은 별개"라며 “정책의 실효성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민간 자금 흐름에 대한 구체적 검토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 일본도 對美 투자계획 발표했지만 입장 선회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일본 간 무역 합의 과정에서도 “일본이 5500억 달러(약 770조 원)를 미국에 투자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 발표는 일본이 자국 공공기관을 통해 미국의 전략 산업에 대규모 자금을 투자하겠다는 약속처럼 해석됐다.
그러나 일본 정부 관계자들은 이 금액이 대부분 대출과 대출보증 형태라면서 정책적 확약이 아닌 민간 기업과 정부계 금융기관 간의 투자 가능성 수준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일본 측은 “5500억 달러의 대부분은 정부가 강제할 수 없는 것”이라면서 “리스크와 기여도에 따라 수익 분배가 결정될 것”이라고 밝혔다.
일부 언론에서는 실제 투자 규모는 전체의 1~2% 수준일 것이라는 분석도 내놨다.
김현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oc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