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럽 안보 위기…독일·스위스, 냉전시대 벙커 재가동
이미지 확대보기워싱턴포스트는 지난 25일(현지시간) "스위스 정부가 '변화하는 세계 안보 상황'을 이유로 개인 대피소와 민간 방위시설을 대대적으로 현대화한다"고 보도했다.
스위스 국방·민간방위·체육부의 다니엘 요르디 민간방위훈련국장은 워싱턴포스트 전화 인터뷰에서 "경제는 전쟁 중에도 돌아가야 한다. 이는 모든 분쟁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며 "대도시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키이우처럼 공습 상황에 놓일 경우 일정 수준 보호 시설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15년간 16억 달러…2026년 새 민간방위 조례 시행
스위스 정부 대변인에 따르면 오는 2026년부터 새로운 민간방위 조례가 시행되면서 15년간 200개 대형 벙커가 현대화된다. 여기에 드는 비용은 총 2억7600만 달러(약 3970억 원)다. 부동산 개발업자들이 공공 대피소 건립 비용으로 지방 당국에 내는 의무 부담금도 1인당 약 1000달러(약 143만 원)에서 1700달러(약 244만 원) 이상으로 오른다.
이와 별도로 설계 수명 40년이 지난 기존 벙커들의 낡은 환기 시스템과 필터 시스템 교체 작업이 스위스 각 주(칸톤)에서 진행 중이다. 스위스 정부는 이를 위해 앞으로 15년간 12억 달러(약 1조7200억 원) 기금을 만들었으며, 필요하면 일정을 앞당길 수 있다고 밝혔다.
요르디 국장은 "1인당 60년간 약 1800달러(약 259만 원) 비용으로 보면 좋은 보험"이라며 "이는 막대한 인프라지만 결국 인구를 보호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다른 어떤 조치보다 저렴하다"고 말했다.
스위스군은 기존 군사 요새를 "공격하기 어려운 방어 거점"으로 현대화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군 당국은 지난달 기업과 스타트업을 대상으로 현대화 아이디어 공모를 진행했다.
취리히 한복판 1만1000명 수용 벙커도
취리히 구시가지 중심부에 있는 우라니아는 7층 규모 지하 주차장이다. 하지만 이곳은 동시에 스위스 최대 공공 대피소 중 하나로, 비상시 1만1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식수, 비상 발전기, 가스 필터, 지휘 시스템을 모두 갖췄다.
취리히 인사이더 관광회사를 운영하는 사만다 에슈바흐는 워싱턴포스트에 "우연히 마주치려면 정말 주의 깊게 봐야 한다"며 "모두가 매우 놀라하고, 더 알고 싶어하며, 우리는 계획에서 벗어난다"고 말했다. 그는 주로 미국과 유럽 다른 나라에서 온 관광객들이 스위스 군사 역사와 비상시 누가 벙커를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 공세를 퍼붓는다고 전했다.
스위스는 약 900만 인구 전체가 대피할 수 있는 비밀 배정 공간을 갖춘 세계 유일 국가다. 베른대학교 실비아 베르거 지아우딘 교수(스위스 현대사)는 워싱턴포스트에 "벙커 정신은 스위스 '국가 DNA' 일부"라며 "1800년대 후반 '국가 요새' 방어 전략에서 진화해 냉전 시대 핵 위협에 대응하면서 발전했다"고 설명했다.
현재 스위스에는 약 37만 개의 개인 벙커가 있으며, 이 중 상당수는 아파트 단지 내부에 있다. 이와 별도로 지휘소와 야전병원용으로 지정된 시설이 1700개에 이른다. 스위스 규정에 따르면 벙커 외피는 철근 콘크리트로 만들어야 하며, 방폭문, 환기 시스템, 비상구, 핵·생물·화학무기를 견딜 수 있는 에어록을 갖춰야 한다. 수용 인원 1인당 바닥 면적 1제곱미터와 부피 2.5세제곱미터가 필요하며, 30명당 건식 화장실 1개가 의무 설치 대상이다.
보(Vaud) 주 민간방위대 프랭크 아머 소령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되면서 많은 사람이 벙커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며 "어디에 벙커가 있는지, 공간은 어떻게 배정되는지, 충분한 공간이 있는지 등을 물었다"고 전했다. 그는 "이후 상황이 진정됐지만, 이 네트워크는 '안심감'을 준다"고 덧붙였다.
유럽 전역 냉전시대 벙커 재가동
스위스 움직임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 전역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군비 확충 흐름의 일부다.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프랑스, 영국도 징병제 개편, 국방 예산 확대, 비상 경보 시스템 시험, 공공 정보 캠페인 개선, 시민들에게 필수 물품 비축 권고 등을 추진 중이다.
보도에 따르면 스위스 전역에는 약 8000개 벙커가 있으며, 이 중 일부는 1886년에 지어졌다. 냉전 종식 후 상당수 벙커가 치즈 저장고, 미술관, 데이터 센터, 호텔 등 민간 시설로 팔렸으나, 2023년부터 스위스군은 벙커 민간 매각을 전면 중단하고 군사 재활용 방안을 찾고 있다.
독일도 비슷한 움직임을 보인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불과 20년 전 독일은 자국 영토에 군사 공격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보고 남아 있는 벙커들을 폐쇄했지만, 지금은 이 결정을 되돌리려고 분주하게 움직인다"고 보도했다. 냉전 시기 운영되던 약 2000개 벙커와 대피소 가운데 현재 남아 있는 것은 58곳뿐이다.
민간 벙커 시장도 성장세
상업용 벙커 시장도 커지고 있다. 스위스 벙커 제조업체 벙커 스위스의 자비에 브룬 최고경영자는 워싱턴포스트에 "우크라이나와 중동 전쟁 때문에 맞춤형 벙커의 프라이버시와 보안을 원하는 수요가 급증했다"고 말했다. 그는 "많은 사람이 질문을 하고, 두려워한다"며 벙커 재료 세트의 유럽 유통업체를 찾고 있다고 밝혔다. 벙커 재료 가격은 약 4만6000달러(약 6600만 원)에서 9만3000달러(약 1억3300만 원) 사이로, 맞춤형 벙커 비용의 절반 수준이다.
미국 텍사스주에 본사를 둔 아틀라스 서바이벌 쉘터스의 론 허바드 최고경영자는 "미국에서는 기본형 2만 달러(약 2870만 원)부터 고급형 100만 달러(약 14억3900만 원)까지 다양한 벙커 수요가 있다"고 전했다. 그는 "미국 벙커는 비밀 통로, 극장, 와인 시음실 같은 '엄청난' 세부 사항을 갖추고 있다"며 "미국이 스위스 방식을 더 많이 채택해 모든 집에 대피소나 안전실을 만들고 학생들을 위한 방폭 훈련도 실시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새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에 민간방위를 다시 들여오기를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시장조사업체 마켓리서치인텔렉트에 따르면 세계 개인 벙커 시장은 2024년부터 2032년 예측 기간 동안 상당한 연평균 성장률을 기록하며 매출과 시장 규모가 크게 늘어날 전망이다. 주요 업체로는 아틀라스 서바이벌 쉘터스, 미사일 베이스, 라이징 에스 컴퍼니, 비보스, 웨스트 USA 리얼티 등이 꼽힌다.
스위스에서 가장 큰 민간 벙커 중 하나인 푸르겔스 요새를 2019년 "7자리 금액"을 내고 산 에리히 브라이텐모저는 워싱턴포스트에 "노아는 홍수가 일어나는 동안 방주를 만들지 않았다. 홍수 전에 방주를 만들었다"며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필요하다면 가지고 있어서 다행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1939년 히틀러 군대를 막기 위해 지어진 이 벙커가 스위스 역사 한 조각을 소유하는 만족감과 마음의 평화를 동시에 준다고 전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