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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 디코드] 손정의, 인텔 심장부 겨눴다…9조원에 美 앰피어 삼키고 'AI 제국'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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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 디코드] 손정의, 인텔 심장부 겨눴다…9조원에 美 앰피어 삼키고 'AI 제국' 완성

美 FTC 규제 빗장 풀려…Arm·그래프코어 잇는 '반도체 풀스택' 구축
'인텔의 딸' 르네 제임스, 적장으로 귀환…x86 독점 체제 붕괴 노린다
사진=오픈AI의 챗GPT-5가 생성한 이미지이미지 확대보기
사진=오픈AI의 챗GPT-5가 생성한 이미지
소프트뱅크그룹(SoftBank Group)이 그리는 'AI 반도체 제국'의 마지막 퍼즐이 맞춰졌다. 손정의 회장의 65억 달러(약 9조 5000억 원) 규모 앰피어 컴퓨팅(Ampere Computing) 인수가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의 반독점 심사를 통과하며 9부 능선을 넘었다.

25일(현지시각) 블룸버그 등 외신에 따르면 FTC는 이번 인수에 대한 조사를 종결했다. 이로써 설계 자산(IP)의 '암(Arm)', AI 가속기의 '그래프코어(Graphcore)', 그리고 고성능 서버 CPU의 '앰피어'를 아우르는 소프트뱅크의 'AI 인프라 풀스택(Full Stack)' 전략이 완성 단계에 진입했다.

이는 단순한 기업 인수가 아니다. 전 세계 서버 시장의 80%를 장악하고 있는 인텔·AMD의 'x86 동맹'을 향해, 손정의 회장이 던진 가장 강력하고 직접적인 도전장이다.

'도면'만 팔던 Arm, 직접 칩 만든다


이번 딜의 핵심 함의는 Arm의 비즈니스 모델 대전환에 있다. 그동안 Arm은 반도체 설계도(IP)만 그려서 퀄컴, 애플, 삼성전자 등에 팔아왔다. 하지만 앰피어 인수로 소프트뱅크는 '직접 칩을 설계하고 파는' 역량을 확보하게 됐다.

외신과 업계 전문가들은 이번 인수가 르네 하스(Rene Haas) Arm 최고경영자(CEO)가 시사해 온 'Arm 브랜드 칩' 출시를 앞당기는 기폭제가 될 것으로 분석한다. 앰피어의 숙련된 엔지니어링 조직이 Arm에 흡수되면, Arm은 데이터센터 시장에서 단순 IP 라이선서(Licensor)가 아닌 강력한 '칩 설계 플레이어'로 체급을 올리게 된다. 이는 데이터센터와 AI 시장에서 소프트뱅크의 지배력을 수직 상승시킬 수 있는 결정적 카드다.

특히 소프트뱅크는 Arm의 아키텍처와 앰피어의 CPU 설계를 결합한 통합 솔루션으로 시장 공략에 나설 전망이다. 여기에 지난 7월 인수를 완료한 영국 그래프코어의 지능형처리장치(IPU) 기술까지 더해진다. 딥러닝 훈련과 추론에서 기존 GPU보다 높은 효율을 보이는 그래프코어의 기술이 앰피어의 CPU와 결합할 경우, 엔비디아와 인텔이 장악한 서버 시장 틈새를 파고들 강력한 무기가 된다. 손 회장이 강조해 온 "AI 인프라 스택 전반의 필수 기술 장악"이 현실화하는 것이다.

친정 인텔에 칼 겨눈 '르네 제임스'

이번 전쟁의 최전선에는 르네 제임스(Renee James) 앰피어 창업자가 서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28년간 인텔에 몸담으며 '인텔 인사이드' 전성기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실리콘밸리 엔지니어의 딸로 태어나 1988년 인텔에 입사한 제임스는 앤디 그로브 전 CEO의 기술 보좌관을 거쳐 386 프로세서 시리즈를 관리하며 성장했다. 2010년에는 인텔 역사상 최대 규모였던 77억 달러(약 11조 원)짜리 맥아피(McAfee) 인수를 진두지휘하며 차기 CEO 0순위로 꼽혔다. 그러나 2016년 이사회가 브라이언 크르자니크를 선택하면서 그녀는 인텔을 떠났고, 절치부심 끝에 2017년 앰피어를 설립했다.

제임스는 인텔의 강점과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인물이다. 그녀가 창업 당시 데이터센터 시장의 표준이나 다름없던 인텔의 x86 방식이 아닌, Arm 기반 설계를 택한 것은 인텔의 아킬레스건을 정확히 찌른 '승부수'였다. 초기에는 무모한 도전이라는 평가도 있었지만, AI 시대가 도래하면서 전력 효율이 높은 Arm 기반 칩은 시장의 대세가 됐다. 마이크로소프트(MS), 구글, 바이트댄스 등 빅테크들이 앰피어의 칩을 선택한 것은 제임스의 판단이 옳았음을 증명한다.

현재 앰피어는 1000명 이상의 엔지니어 조직으로 성장했으며, 칼라일 그룹과 오라클 등 초기 투자자들은 이번 딜로 엑시트(자금 회수)하게 된다. 리사 수 AMD CEO와 함께 반도체 업계의 대표적 여성 리더로 꼽히는 제임스는 이제 소프트뱅크라는 거대 자본을 등에 업고 친정 인텔을 향한 공세를 강화할 전망이다.

192코어 '괴물 칩'…서버 시장 판 흔든다


앰피어의 기술력은 이미 시장의 검증을 마쳤다. 2020년 업계 최초의 클라우드 네이티브 프로세서 '앰피어 알트라'를 내놓은 데 이어, 128코어 '알트라 맥스', 최근에는 192코어 '앰피어원(AmpereOne)'까지 선보였다. 앰피어원은 업계에서 가장 강력한 서버 CPU 중 하나로, 오라클과 구글 클라우드 등에서 AI 추론용으로 채택되고 있다.

앰피어는 2021년부터 사내에 AI 전담팀을 신설하고 AI를 데이터센터의 핵심 성장 동력으로 정의했다. 생성형 AI 열풍으로 폭증하는 데이터센터의 연산 수요는 앰피어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클라우드부터 엣지(Edge) 컴퓨팅까지 지원하는 앰피어의 프로세서는 전력 소모가 심한 x86 칩의 대안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손정의 회장은 미래의 'AI 초지능(Superintelligence)' 시대를 대비하기 위해 압도적인 컴퓨팅 파워가 필요하다고 역설해왔다. 수년간의 적자로 R&D 투자 여력이 필요했던 앰피어에게도 소프트뱅크의 막대한 자금력은 천군만마다.

인텔의 유산(Legacy)을 가장 잘 아는 르네 제임스, 모바일 생태계를 평정한 Arm의 설계 능력, 그리고 손정의 회장의 AI 야망이 결합했다. 이 삼각편대는 x86이 쌓아 올린 40년 철옹성에 심각한 균열을 낼 준비를 마쳤다. 바야흐로 서버 반도체 시장의 패권이 이동하고 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