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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 디코드] 인텔, 75세 'TSMC 핵심' 빼갔다…대만 "기밀 유출" 격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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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 디코드] 인텔, 75세 'TSMC 핵심' 빼갔다…대만 "기밀 유출" 격분

TSMC "은퇴 직후 적장행, 명백한 배신" 즉각 제소…기술 유출 우려
인텔 "적법한 영입" 맞불…美·대만 '반도체 동맹' 균열 조짐
사진=오픈AI의 챗GPT-5.1이 생성한 이미지이미지 확대보기
사진=오픈AI의 챗GPT-5.1이 생성한 이미지
미국 인텔이 경쟁사 TSMC의 전 수석부사장 로웨이런(Wei-Jen Lo)을 전격 영입하며 던진 승부수가 반도체 업계를 뒤흔들고 있다. 단순한 임원 스카우트가 아니다. 이는 미국과 대만, 인텔과 TSMC 사이에 얽힌 기술 협력과 견제라는 위태로운 균형을 깨트릴 수 있는 '지정학적 뇌관'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IT전문 매체 디지타임스가 27일(현지 시각) 지적했다.

TSMC는 지난 25일, 대만 지적재산권 및 상업법원에 로웨이런을 상대로 기밀 유지 및 경업 금지 약정 위반 소송을 제기했다. 75세의 나이로 은퇴를 선언했던 업계의 거물이 퇴직 직후 경쟁사인 인텔로 적을 옮긴 것에 대해, TSMC는 "명백한 배신이자 기술 유출 시도"라며 격앙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인텔·TSMC 다 아는 '75세 노장'


이번 사태의 핵심 인물인 로웨이런은 반도체 공정 분야에서 보기 드문 '하이브리드' 경력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2004년 TSMC에 합류하기 전, 이미 인텔에서 18년간 웨이퍼 공정 기술을 다뤘다. 이후 TSMC에서 15년 넘게 핵심 R&D 조직을 이끌며 현재의 TSMC를 만든 주역 중 한 명이다. 인텔의 제조 DNA와 TSMC의 파운드리 성공 방정식을 모두 꿰뚫고 있는 전 세계 몇 안 되는 인물인 셈이다.

TSMC가 제출한 소장에 따르면, 로웨이런은 2024년 3월 R&D 리더십 일선에서 물러나 전략 부서로 이동했다. 첨단 공정 접근 권한이 없는 자리였지만, 그는 지속적으로 R&D 팀에 접촉해 개발 중인 기술 데이터와 회의 참석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TSMC 측은 "그가 회사에는 '학계로 가겠다'며 안심시킨 뒤, 인텔로의 이직 사실을 철저히 숨겼다"며 "개발 단계의 민감한 데이터가 인텔로 넘어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주장했다.

반면 인텔은 '적법한 영입'이라며 맞서고 있다. 립부 탄(Lip-Bu Tan) 인텔 CEO는 사내 메시지를 통해 "로웨이런에 대한 혐의는 가당치 않으며, 인텔은 그를 끝까지 보호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그는 "철저한 사전 실사를 거쳤으며 타사의 지적 재산권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켰다"고 강조했다. 이는 인텔이 법적 리스크를 감수해서라도 로웨이런의 노하우가 절실히 필요했음을 방증한다.

파운드리 재건, 그가 '마지막 퍼즐'


인텔이 75세의 노장을 다시 불러들인 배경에는 절박함이 깔려 있다. 인텔은 현재 무너진 엔지니어링 문화를 재건하고, 파운드리 공정 경쟁력을 회복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과제를 안고 있다. 로웨이런은 인텔의 야망을 실현할 최적의 퍼즐 조각이다.

특히 그의 역할은 단순 기술 자문에 그치지 않을 전망이다. 업계에서는 인텔이 로웨이런의 이력을 활용해 마이크로소프트, 테슬라, 엔비디아 등 미국 빅테크 기업들의 주문을 관리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맡길 것으로 보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기업은 TSMC 애리조나 팹의 주요 고객이다. 인텔은 TSMC의 시스템을 가장 잘 아는 로웨이런을 통해, 경쟁사의 앞마당인 애리조나에서 미국 고객사들과의 접점을 넓히고 자사 패키징 기술 로드맵을 가속화하려는 전략이다.

처벌 힘든 '법적 회색지대'


TSMC의 제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처벌이나 제재가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로웨이런은 미국 시민권자로 알려져 있으며, 미국과 대만 사이에는 범죄인 인도 조약이 없다. 대만 법원이 그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리더라도 집행력은 대만 내에 국한될 공산이 크다.

더 큰 문제는 이번 사건이 단순한 기업 분쟁을 넘어 미·중 기술 패권 경쟁과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미국 정부는 자국 반도체 챔피언인 인텔을 부활시키기 위해 막대한 보조금을 쏟아붓고 있다. 동시에 대만의 TSMC는 미국의 안보 파트너이자 핵심 공급망이다. 양국 정부로서는 두 거인 사이의 진흙탕 싸움이 확전되는 것을 원치 않는 눈치다.

하지만 TSMC의 불안감은 실재한다. 미국의 산업 정책이 인텔 밀어주기로 기우는 상황에서, 핵심 인재와 기술마저 유출된다면 '초격차' 리더십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법률 전문가들은 "직접적인 기술 탈취 증거가 없다면 경업 금지 약정 위반 여부가 쟁점이 되겠지만, 최근 미국 법원은 직업 선택의 자유를 넓게 해석하는 추세라 결과를 예단하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이번 사건은 '인재의 자유로운 이동'이 '국가 안보' 및 '기술 블록화'와 충돌하는 상징적인 장면이 됐다. 인텔은 TSMC에 최첨단 칩 생산을 의존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의 인재를 빼와야 하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반대로 TSMC는 미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피하면서도 지적 재산권을 사수해야 하는 난제에 빠졌다. 75세 노장의 이직이 쏘아 올린 공은 이제 반도체 업계의 '기술 냉전'이 얼마나 치열하고 비정한지를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고 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