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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2기 안보전략 "EU는 문명적 소멸 단계"… 80년 혈맹 대서양 동맹 ‘파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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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2기 안보전략 "EU는 문명적 소멸 단계"… 80년 혈맹 대서양 동맹 ‘파국’

美, 새 국가안보전략서 EU를 중·러급 ‘위협 세력’ 규정… "PC주의·이민 탓에 붕괴" 독설
머스크 X 벌금 2000억 원에 "EU 폐지해야"… 무역 갈등 넘어 ‘체제 전쟁’ 확전
유럽 지도부 "동맹이 적대국으로 돌변"… 우크라 지원·나토 체제 근본적 회의론 확산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집권 2기 첫 국가안보전략 보고서에서 유럽연합(EU)을 중국이나 러시아보다 더 심각한 위협으로 규정하고, 유럽이 이민자와 진보적 사회 정책 탓에 ‘문명적 소멸(civilizational erasure)’ 위기에 처했다고 명시해 파장이 일고 있다. 이미지=제미나이3이미지 확대보기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집권 2기 첫 국가안보전략 보고서에서 유럽연합(EU)을 중국이나 러시아보다 더 심각한 위협으로 규정하고, 유럽이 이민자와 진보적 사회 정책 탓에 ‘문명적 소멸(civilizational erasure)’ 위기에 처했다고 명시해 파장이 일고 있다. 이미지=제미나이3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집권 2기 첫 국가안보전략 보고서에서 유럽연합(EU)을 중국이나 러시아보다 더 심각한 위협으로 규정하고, 유럽이 이민자와 진보적 사회 정책 탓에 ‘문명적 소멸(civilizational erasure)’ 위기에 처했다고 명시해 파장이 일고 있다. 이에 유럽 지도자들은 이를 사실상의 "정치적 선전포고"로 받아들이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80년간 이어온 서방 자유주의 동맹이 와해 직전이라고 우려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지난 9일(현지 시각) 트럼프 행정부의 적대적인 안보전략 발표와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소유한 소셜미디어 엑스(X)에 대한 EU의 거액 과징금 부과 사태가 맞물려, 대서양 양안 관계가 사상 최악의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고 보도했다.

"유럽은 자유 훼손하는 적(敵)"…백악관, 적대감 공식화


WP가 입수한 미 국가안보전략 보고서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는 EU를 "정치적 자유와 주권을 훼손하려는 세력"으로 규정했다. 특히 유럽 내 표현의 자유 검열과 국가 정체성 상실을 비판하며, 유럽이 이민자 유입으로 인해 문명 자체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는 극우 진영의 논리를 공식 외교문서에 담았다.

이는 단순한 외교적 수사가 아니었다. 나탈리 토치 이탈리아 국제문제연구소(IAI) 소장은 "이번 전략은 유럽을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유일한 지역으로 묘사하고 있다"면서 "백악관이 유럽을 '공공의 적 1호'로 간주하는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세계관을 공식화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러한 기조는 지난 2월 뮌헨안보회의에서 J. D. 밴스 부통령이 "유럽 정부들이 증오 표현 규제를 빌미로 정적을 검열하고, 과도한 이민자 수용으로 공포를 조장했다"고 맹비난했던 연설과 맥을 같이한다. 당시에는 돌출 발언으로 여겼으나 이제는 미국의 공식 외교 독트린(원칙)으로 자리 잡은 셈이다.

크리스토퍼 랜도 미 국무부 부장관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본부를 방문한 직후 소셜미디어를 통해 유럽 국가들이 "미국의 이익과 안보에 완전히 배치되는 의제를 추구하고 있다"면서 "경제적 자살 행위이자 기후 광신주의"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빅테크 규제 갈등, ‘체제 전쟁’으로 비화


갈등의 불씨를 키운 또 다른 요인은 기술 패권 전쟁이다. EU 집행위원회는 지난 5일 미국의 소셜미디어 엑스(X)가 EU의 디지털시장법(DMA)을 위반했다며 약 1억4000만 달러(약 2050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이에 X의 소유주이자 트럼프의 핵심 측근인 일론 머스크는 즉각 반발했다. 그는 "EU를 폐지하고 개별 국가로 주권을 환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트럼프 지지층의 반(反)EU 정서를 자극했다.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 또한 "미국 기술 플랫폼과 국민에 대한 외국 정부의 공격"이라며 강경 대응을 예고했다.
유럽 측은 이를 주권 문제로 보고 있다. 티에리 브르통 전 EU 집행위원은 "미국이 유럽 제도를 '불안정하게 만들어야 할 적'으로 간주한다는 사실을 흑백논리로 명시한 충격적인 문서"라면서 "미국은 분열되고 약해진 유럽을 원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달라진 안보 지형…"동맹의 배신에 대비해야"


이번 사태는 유럽 안보전략의 근본적인 수정을 요구하고 있다. 안토니우 코스타 유럽의회 의장은 지난 8일 파리에서 열린 행사에서 "2차 대전 이후의 동맹관계는 변했다"면서 "우리는 적대국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도전하는 동맹국으로부터도 스스로를 보호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그동안 유럽 지도자들이 국방비 증액, 우크라이나 지원 확대, 관세 타협 등으로 트럼프를 회유하려던 시도가 실패했음을 자인한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새 전략 문서는 러시아와 중국의 위협보다는 러시아와의 '전략적 안정' 회복을 우선시하며, 미국을 NATO의 지도자가 아닌 러시아와 유럽 사이의 '중재자'로 설정했다.

이는 우크라이나 전쟁에도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에 유리한 조건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중단시키려 하고 있으며, 미 안보전략서는 유럽의 우크라이나 지원이 "비현실적 기대에 기반했다"고 폄하했다.

러시아는 이러한 미국의 변화를 반기고 있다. 마리아 자하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은 "유럽 내 '전쟁 세력'에게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효과가 있기를 바란다"고 논평했고,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전 러시아 대통령은 머스크의 EU 폐지 주장에 "정확하다"며 동조했다.

유럽 내 분열과 반격…"통계 왜곡" 지적도


유럽 내 반응은 엇갈리고 있다. 독일의 극우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은 미국의 새 전략을 "유럽, 특히 독일을 위한 외교정책의 현실 점검"이라며 환영했고, 친러 성향의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는 머스크가 "브뤼셀의 지배자들에 맞서 선을 지켰다"고 치켜세웠다.

반면, 주류 정치권은 미국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라도스와프 시코르스키 폴란드 외무장관은 "총기 사망이야말로 '소멸'의 흥미로운 지표"라고 꼬집으며, 미국의 연간 총기 사망자가 EU보다 7배나 많다는 점을 지적했다.

독일 쾨르버 재단(Körber-Stiftung)의 연례 조사 결과에 따르면, 독일인 59%는 자국 내에서 자유롭게 의견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는 반면, 미국에서도 이것이 가능하다고 보는 비율은 35%에 그쳤다. 이는 "유럽이 자유를 억압한다"는 트럼프 행정부의 주장이 유럽인들의 인식과 괴리가 있음을 보여준다.

호세프 보렐 전 EU 외교안보 고위대표는 미국의 이번 전략을 "정치적 전쟁 선포"라고 규정했다. 그는 "트럼프는 국가별로 분열된 '백인 유럽'을 원하고 있다"면서 "트럼프가 우리의 적대자가 아닌 척하는 것을 멈추고 EU의 주권을 주장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가 이끄는 기민당(CDU)의 위르겐 하르트 외교정책 대변인조차 트럼프의 전략이 "유럽의 우익 급진 정당이나 푸틴이 유럽에 대해 말하는 것과 비슷하게 들린다"며 우려를 표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갈등이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 이라크 침공을 둘러싼 갈등보다 훨씬 심각하다고 본다. 당시에는 정책에 대한 이견이었으나 지금은 민주주의와 동맹의 가치 자체를 부정하는 양상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이 경제 난관 속에서도 우크라이나 지원을 유지하고 독자적인 방위 태세를 구축할 수 있을지, 대서양 동맹의 미래가 시험대에 올랐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