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대만 반도체 하면 우선 파운드리의 황제 TSMC를 연상하게 된다. 대만은 전세계 파운드리 시장을 독점하다 시피 장악하고 있다. 그렇다고 대만에 메모리기업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난야테크(南亞科技)가 지금 이 순간에도 대만 메모리의 꿈을 이어가고 있다. 세계 반도체 지형에서 대만은 거대한 파운드리 공룡 TSMC를 중심으로 한 비메모리 시스템 반도체의 절대 강자로 군합한다. 글로벌 첨단 반도체의 위탁생산을 독점하다시피 하는 TSMC의 위용은 대만을 '반도체 패권국의 중심'으로 도상시켰다. 그러나 반도체 산업의 또 다른 축인 메모리 분야, 특히 DRAM 시장으로 시선을 돌리면 대만의 위상은 사뭇 달라진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그리고 미국 마이크론이 형성한 거대한 '메모리 빅3'의 그늘 아래에서 대만은 오랫동안 쓰라린 패배와 좌절을 경험해야 했다.
대만이 처음부터 메모리 반도체를 포기했던 것은 아니다. 1990년대 대만 산업계에는 파운드리를 넘어 메모리 반도체에서도 글로벌 제패를 이루겠다는 거대한 열망, 이른바 '대만 메모리의 꿈'이 이글거렸다. 그리고 그 꿈의 중심에는 대만 최대의 민간 재벌 포모사 플라스틱 그룹(Formosa Plastics Group)과 그들이 설립한 대만 메모리의 자존심, 난야테크놀로지(Nanya Technology, 南亞科技)가 서 있었다.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 대만 정부는 공업기술연구원(ITRI)을 중심으로 반도체 자립화 프로젝트를 강력히 추진했다. 1987년 모리스 창(張忠謀) 박사를 앞세워 TSMC를 설립하며 세계 최초의 '순수 파운드리' 모델을 개척한 대만 정부는 곧이어 메모리 반도체 국산화라는 다음 단계로 눈을 돌렸다.
당시 메모리 반도체, 특히 DRAM은 PC 산업의 폭발적 성장과 맞물려 막대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노다지 시장이었다. 대만 정부는 파운드리로 비메모리 생산 기반을 다지는 동시에, D램 시장에서도 자체적인 생산 거점을 확보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정부의 산업 육성 의지와 대만 거대 민간 자본의 자금력이 결합하며 대만 D램 산업의 창업 열풍이 불어닥쳤다. TSMC와 난야테크놀로지를 위시한 대만 D램 기업들의 태동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했다. TSMC는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는 독창적인 위탁생산 비즈니스 모델과 독자적인 공정 노하우를 바탕으로 기초를 다졌다. 반면, D램 사업에 뛰어든 대만 기업들은 거대한 초기 설비 투자 비용과 원천 기술의 부재라는 장벽에 직면했다.
포모사 그룹은 이미 계열사인 남야플라스틱(Nan Ya Plastics, 南亞塑膠)을 통해 인쇄회로기판(PCB), 동박적층판(CCL) 등 전자 소재 분야에서 막강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왕융칭 회장의 큰 그림은 명확했다. 석유 화학 원료 → 전자 소재 → D램 반도체로 이어지는 완벽한 수직 계열화(Vertical Integration)의 완성이었다.1995년, 포모사 그룹의 자본력과 전략적 비전 아래 난야테크놀로지가 공식 출범했다. 거대 재벌의 탄탄한 재무제표와 대만 정부의 정책적 지원이 뒷받침되면서 난야테크놀로지는 단숨에 대만 D램 산업의 선두 주자로 떠올랐다. 난야의 출범은 단순히 한 기업의 설립이 아닌, 포모사 그룹이라는 거대한 산업 제국이 메모리 반도체라는 초고난도 기술 집약적 시장에 던진 정면 도전장이었다.
난야테크놀로지의 출발은 화려했으나, 독자 기술이 없다는 한계는 오래지 않아 치명적인 독으로 돌아왔다. 난야는 기술 격차를 극복하기 위해 해외 기업들과의 기술 제휴 및 합작 투자에 사활을 걸었다. 가장 대표적인 파트너십이 바로 독일의 반도체 공룡 인피니온(Infineon)에서 분사한 키몬다(Qimonda)와의 만남이었다. 난야와 키몬다는 합작 법인인 이노테라(Inotera, 亞華科技)를 설립하고 대대적인 12인치 웨이퍼 공장 투자를 단행했다. 유럽의 선진 D램 설계 기술과 대만의 효율적인 제조 역량, 포모사 그룹의 거대 자본이 결합한 이노테라의 출범은 한국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당시 하이닉스반도체)를 위협할 강력한 대항마로 주목받았다. 메모리 반도체 역사는 대만 기업들의 편이 아니었다. 2007년부터 2012년까지 글로벌 D램 시장을 피로 물들인 역사상 가장 혹독한 '치킨게임(Chicken Game)'이 시작되었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는 막대한 R&D를 통해 축적한 자체 공정 기술과 독보적인 원가 절감 수율을 바탕으로 D램 가격을 원가 이하로 폭락시키는 고강도 치킨게임을 전개했다. 공정 전환 능력이 부족하고 기술 라이선스 비용을 지속해서 지불해야 했던 대만 업체들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다.2009년, 난야의 핵심 기술 파트너였던 독일 키몬다가 수조 원의 적자를 견디지 못하고 파산 신청을 단행했다. 파트너의 파산으로 난야의 기술 공급선이 순식간에 끊겼다. 이후 난야는 미국 마이크론(Micron)과 손을 잡고 이노테라를 공동 운영하며 연명했으나, 가중되는 영업손실과 시설 투자 리스크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결국 2016년, 포모사 그룹은 이노테라 지분 전체를 마이크론에 매각하며 선진 D램 제조 주도권을 마이크론에 넘겨주고 말았다. 이 치킨게임을 거치며 엘피다(일본), 키몬다(독일)가 퇴출당했고, 대만의 힘스코(Powerchip), 프로모스(ProMOS) 등 수많은 D램 업체들이 연쇄 도산하거나 사업을 포기했다. 대만의 메모리 제국 꿈은 한국 반도체의 '초격차 공세' 앞에 산산이 조각났다.
선진 첨단 공정 경쟁에서 한국 기업에 완패하고, 기술 파트너마저 잃은 난야테크놀로지는 생존을 위한 대대적인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이 주도하는 서버용, 모바일용 최첨단 D램 및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서의 정면 승부를 포기하고, 니치 마켓(Niche Market, 틈새시장)으로 전략적 후퇴를 단행한 것이다. 난야는 최신 미세공정 투자를 줄이는 대신 가전제품, 셋톱박스, 공유기, 와이파이 모듈, 차량용 반도체 등에 들어가는 레거시(성숙 공정) D램(DDR3, DDR4 등) 생산에 집중했다. '전략적 명찰 바꾸기'는 난야의 체질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낮은 캡엑스(CAPEX) 리스크: 초첨단 노광 장비(EUV) 등 조 단위의 설비 투자를 지속해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났다. 범용 가전 및 산업용 메모리는 고성능을 요구하지 않는 대신 수요가 꾸준하여 적정한 마진을 확보할 수 있다.
대만 D램 산업이 치킨게임으로 무너지면서 갈 곳을 잃은 수많은 대만의 D램 설계 및 공정 엔지니어들이 중국으로 스카우트되었다. CXMT를 비롯한 중국 메모리 기업들의 초기 생산 라인을 구축하고 기술 기반을 다진 핵심 주역들 중 상당수가 과거 난야, 이노테라, 엘피다 출신의 대만계 인력들이었다. 미·중 안보 패권 전쟁과 미국의 첨단 반도체 장비 수출 규제로 인해 CXMT 역시 최첨단 미세공정으로의 진입이 봉쇄되었다. 그 결과 CXMT는 자국 내수 시장과 레거시(DDR4 등) D램 물량을 무섭게 늘리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이는 난야테크놀로지가 주력하고 있던 니치 D램 시장 영역과 직접적으로 겹친다. CXMT의 저가 물량 공세는 난야의 입지를 압박하는 가장 강력한 위협 요소로 부상했다.난야테크놀로지는 포모사라는 민간 그룹의 재무적 채산성과 시장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반면, CXMT는 중국 국가集成電路産業投資基金(국가펀드)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국가 국유기업 성격을 띤다. 지정학적 충격 속에서 난야는 미국 중심의 공급망 재편과 중국의 저가 물량 공세 사이에 끼인 형태가 되었다.
난야테크놀로지는 첨단 메모리의 정상에 오르지는 못했다. 그러나 혹독한 생존 전쟁터에서 무너지지 않고 니치 마켓의 강자로 살아남아 포모사 그룹의 반도체 수직 계열화 축을 유지하고 있다.글로벌 AI 혁명으로 인해 HBM과 초고속 D램에 대한 한국 기업들의 집중도가 극에 달한 지금, 범용 및 가전용 D램 공급망을 받치고 있는 난야테크놀로지의 존재감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다. "대만 메모리의 꿈"은 비록 절반의 성공이자 절반의 좌절로 남았으나, 그들이 흘린 땀과 눈물은 오늘날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지형도를 형성한 소중한 자산이자 역사적 교훈으로 남아있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