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글로벌이코노믹

전기차 때린 트럼프의 역설…방산 광물정책이 전기차 살린다

글로벌이코노믹

전기차 때린 트럼프의 역설…방산 광물정책이 전기차 살린다

7500달러 세액공제 없애며 전기차 수요 압박
국방·AI용 광물산업은 EV 없으면 규모의 경제 어려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진=로이터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전기차 보급을 억제하는 정책을 펴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전기차 산업의 핵심인 배터리 원료 공급망을 대대적으로 지원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전기차 구매 세액공제를 폐지하고 자동차 배출가스 규제를 완화해 전기차 수요에는 제동을 걸었지만 중국산 핵심광물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리튬·흑연·배터리 소재 등의 미국 내 생산을 지원하면서 결과적으로 전기차 업체들이 혜택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더 큰 역설은 미국이 국방과 인공지능(AI)을 위해 독자적인 핵심광물 공급망을 만들려 해도 이를 경제성 있는 규모로 유지하려면 세계 최대 수요처인 전기차 산업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미국 정치 전문매체 폴리티코는 트럼프 대통령이 전기차와의 전쟁을 벌여왔지만 중국에서 독립적인 핵심광물 공급망을 구축하려는 정책이 결과적으로 전기차 산업을 지원하고 있다고 16일(현지시각) 보도했다.

◇전기차 수요는 누르고 공급망은 키운다

트럼프 행정부는 출범 이후 바이든 정부의 전기차 확대 정책을 잇달아 뒤집었다.

대표적인 조치가 최대 7500달러(약 1072만원)의 전기차 구매 세액공제 폐지다. 자동차업체들이 전기차 판매 비중을 빠르게 높이도록 압박했던 배출가스 규제도 완화했다.

소비자가 전기차를 구매할 유인을 줄이고 자동차업체가 내연기관차를 계속 판매할 수 있는 여지를 넓힌 것이다.

그러나 자동차 공급망의 더 위쪽으로 올라가면 정책 방향이 정반대로 바뀐다.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이 장악한 핵심광물 공급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국 내 광산과 정제시설, 배터리 소재기업에 자금을 투입하고 있다.

최근에도 흑연과 실리콘 음극재, 영구자석 등을 포함한 핵심광물 공급망에 30억달러(약 4조2864억원)를 투입하기로 했다.

직접적인 정책 목표는 전기차 육성이 아니라 국가안보다. 미사일과 군용기, 드론을 비롯한 방산제품과 AI 데이터센터에 필요한 광물을 중국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같은 리튬과 흑연, 자석이 전기차 배터리와 모터에도 사용되면서 국방을 위해 구축한 생산시설이 전기차 공급망을 함께 강화하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방산 수요만으로는 광물공장 유지 어렵다

핵심은 시장의 규모다.

시장조사업체 벤치마크미네랄인텔리전스(BMI)에 따르면 세계 리튬 수요의 약 70%는 전기차에서 나온다. 에너지저장장치(ESS)가 약 20%를 차지하고 군수용 수요는 이에 비하면 매우 작다.

따라서 미국 정부가 국가안보를 이유로 리튬이나 흑연 생산시설을 세워도 미 국방부의 수요만으로 대규모 공장을 경제성 있게 운영하기는 어렵다.

윌 로버츠 BMI 자동차 연구책임자는 핵심광물 산업이 필요로 하는 생산 규모는 국방 수요만으로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고 지적했다.

결국 광산과 정제시설이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전기차처럼 수백만대 규모의 제품을 생산하는 민간시장이 물량을 받아줘야 한다.

트럼프 정부가 국방 공급망을 구축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지원을 축소한 전기차 산업의 수요를 필요로 하는 모순이 생기는 이유다.

◇전기차 지원 축소로 고객 잃은 기업에 정부가 다시 지원

이 같은 정책 충돌은 미국 배터리 소재기업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다.

배터리용 흑연을 생산하는 웨스트워터 리소시스는 전기차 시장 환경이 악화하면서 고객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스텔란티스와의 공급계약이 취소됐고 SK온과의 계약도 종료됐다.

그런데 중국산 광물 의존도를 줄이려는 트럼프 정부가 다시 이 회사의 미국 내 생산시설을 지원하고 있다.

미 수출입은행은 앨라배마주에 건설되는 웨스트워터의 배터리용 흑연 음극재 공장에 2500만달러(약 357억원)의 대출을 제공하기로 했다.

전기차 지원 축소로 고객을 잃은 배터리 소재기업을 중국과의 공급망 경쟁 때문에 연방정부가 다시 지원하는 셈이다.

실리콘 음극재 업체 실라 나노테크놀로지스도 비슷하다.

미 정부는 워싱턴주 모지스레이크 생산시설 확대를 지원하고 있다. 실라는 드론과 데이터센터 등으로 고객층을 넓히고 있지만 핵심 시장은 여전히 전기차용 배터리다.

국방과 AI 시장이 성장하더라도 전기차만큼 큰 배터리 소재 수요를 단기간에 만들어내기는 어렵다.

◇중국산 배제할수록 美 전기차 공급망엔 호재

트럼프 행정부의 대중국 정책도 결과적으로 미국 전기차 공급망을 지원한다.

미국은 정부 지원을 받는 기업들이 중국 등 특정 국가와 연계된 원료와 부품을 사용하는 데 대한 제한을 강화하고 있다.

중국산 배터리 소재를 값싸게 공급받는 길은 좁아지지만 미국에서 흑연·음극재·자석 등을 생산하는 기업에는 새로운 시장이 열린다.

미국 자동차업체 입장에서도 초기에는 조달비용이 높아질 수 있지만 미국 내 공급업체가 늘어나면 장기적으로 중국 의존도를 줄일 수 있다.

실라 공동창업자인 진 버디체브스키 최고경영자(CEO)는 미국이 강력한 군수산업 기반을 갖추려면 강력한 민간 산업 기반도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는 핵심광물 문제에서 국방과 전기차 산업을 완전히 분리하기 어렵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전기차 없는 ‘광물 자립’도 어렵다

트럼프 행정부 정책을 관통하는 목표는 중국 의존 축소다.

전기차 보급 확대 자체에는 부정적이지만 미국이 중국 없이 첨단 무기와 AI 산업을 유지할 수 있는 광물·배터리 공급망을 확보하는 데는 적극적이다.

문제는 그 공급망을 지탱할 최대 고객이 전기차라는 데 있다.

리튬 수요 10개 가운데 약 7개가 전기차에서 발생하는 상황에서 미국이 전기차 시장을 지나치게 축소하면 자국에 새로 짓는 광산과 소재공장도 충분한 고객을 확보하기 어려워진다.

정부 지원만으로 공장을 세울 수는 있어도 장기간 경쟁력 있는 가격으로 운영하려면 대규모 민간 수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소비 단계에서는 전기차 구매 유인을 없애면서 생산 단계에서는 전기차에 필요한 공급망을 지원하는 정책을 동시에 펴고 있다.

방산과 AI를 위해 시작한 핵심광물 자립 정책이 전기차 산업에 도움을 주고, 그 핵심광물 산업이 살아남기 위해 다시 전기차의 대규모 수요를 필요로 하는 순환구조가 형성된 셈이다.

‘전기차와의 전쟁’을 내세운 트럼프 정부가 결과적으로 미국 전기차 공급망을 키우게 된 역설이다.


김현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oc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