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무대 위의 스피커폰: 실리콘밸리를 뒤흔든 한 통의 전화
2026년 가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올인 서밋(All-In Summit)’ 패널 토론장. 검은 가죽 재킷을 입은 사나이가 주머니에서 울리는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특유의 거칠고 단호한 억양을 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었다.젠슨 황 엔비디아(NVIDIA) 최고경영자(CEO)는 통화 연결 방식을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청중 수천 명과 전 세계 생중계 카메라가 지켜보는 가운데, 세계 최대 기술 기업의 수장과 대통령의 육성이 여과 없이 울려 퍼졌다.
트럼프는 직설적이었다. 최근 테크 생태계를 달구고 있는 ‘인공지능(AI) 개발 속도조절론’과 위험성 경고를 향해 “새빨간 사기(Hoax)”라고 일갈했다. AI 발전의 발목을 잡으려는 움직임의 배후에는 워싱턴의 무능한 규제론자들과 패권 경쟁에서 뒤처진 중국의 정치적 책략이 도사리고 있다는 주장이었다.객석의 숨이 멎는 찰나, 젠슨 황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실리콘 밸리의침묵을 깨뜨렸다.
“대통령께서 이 복잡한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계십니다.”황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세간의 인공지능 공포론이 ‘혁신의 가속’과 ‘안전성’ 사이에 거짓된 양자택일 구도를 덧씌우고 있다고 일침을 놓았다. AI 속도조절론에 대해 “나는 단연코 반대일세”라는 메시지를 전 세계를 향해 던진 순간이었다.
이 극적인 장면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다. 테크놀로지의 심장부 실리콘밸리와 워싱턴의 현실 권력이 AI 규제 철폐라는 깃발 아래 의기투합한 상징적 사건이다. 젠슨 황은 왜 지금, 모두가 신중론을 읊조릴 때 가속 페달을 힘껏 밟으며 트럼프와의 ‘반(反)규제 동맹’을 만천하에 드러냈을까?
젠슨 황의 본질: '속도'로 생존해 온 생태계 설계자
젠슨 황의 이력을 돌아보면 그가 속도조절론에 거부감을 드러내는 까닭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의 삶 자체가 단 한 번도 속도를 늦추지 않은 극한의 서바이벌 오디세이였기 때문이다.1963년 대만 타이난에서 태어난 젠슨 황(황런쉰)은 9세의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켄터키의 시골 기숙학교에서 거친 환경을 견뎠고, 오리건주립대와 스탠퍼드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한 뒤 1993년 데니스 댈러스(Denny's) 식당 구석 자리에서 엔비디아를 창업했다. 당시 그가 선택한 길은 3차원 그래픽 가속기였다.
그 시절 컴퓨터 과학계 주류는 CPU 중심의 직렬 연산 체계였다. 황은 그래픽을 넘어 범용 병렬 연산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 확신했다. 2006년 사내 반대와 주주들의 비난을 무릅쓰고 수십억 달러를 쏟아부어 구축한 '쿠다(CUDA)' 생태계는 그의 집념을 입증한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투자 회수는 요원했고 엔비디아는 파산 위기를 넘나들었다. 그러나 2012년 알렉스넷(AlexNet)의 등장을 기점으로 딥러닝 혁명이 폭발했을 때, 세상의 모든 AI 연구자가 찾은 유일한 무기는 엔비디아의 GPU였다.
젠슨 황에게 '속도'는 기업의 생사를 가르는 절대적 법칙이다. 그는 무어의 법칙이 물리적 한계에 부딪혔다고 공언하며 ‘황의 법칙(Huang's Law)’을 설파해 왔다.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네트워크 아키텍처를 결합해 AI 컴퓨팅 성능을 10년에 100만 배 향상시키겠다는 과감한 로드맵이다.그의 시각에서 기술 문명의 진보는 전속력으로 내달릴 때만 유효하다. 연구실에 칩을 모셔두고 규제 가이드라인이 완성되기를 기다리는 태도는, 엔비디아가 거쳐온 30년 사투의 문법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아모데이·올트먼 vs 젠슨 황
젠슨 황의 이번 공개 발언은 AI 진영 내부의 거대한 사상적 균열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결정적 의미를 갖는다.그간 실리콘밸리는 이른바 'AI 안전(Safety)' 담론에 포섭되어 있었다. 앤트로픽의 다리오 아모데이 CEO는 AI가 가져올 재앙적 위험과 파국을 경고하며 개발 속도조절론을 공식 제안했다. 오픈AI의 샘 올트먼 역시 초지능(AGI)의 통제 불가능성을 언급하며 국제적 규제 기구 설립의 필요성을 피력했고, 일론 머스크 또한 인공지능이 핵무기보다 위험할 수 있다는 경고를 수년째 이어왔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앤트로픽의 핵심 연구원 제이콥 콕슨이 기업의 안전 불감증을 비판하며 전격 사임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테크계는 급격히 윤리적 신중론과 규제 강화론으로 기우는 듯했다.그러나 젠슨 황의 시각은 냉철했다. 황은 콕슨 연구원의 사임에 대해 “조직 내부에서 소신 있게 목소리를 낸 용기는 존중받아야 한다”며 인격적 품격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곧바로 사안의 구조적 모순을 짚었다.
"위험에 대한 공포가 혁신과 안전성 사이에서 거짓된 양자택일 구도를 조장하고 있다."소프트웨어와 프런티어 모델을 만드는 기업들은 규제를 통해 후발 주자의 진입 장벽을 쌓는 일명 '사다리 걷어차기'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반면 기반 인프라를 공급하는 엔비디아 입장에서 연산 속도의 정체는 곧 산업 전체의 동맥경화를 뜻한다.
자동차에 안전벨트와 브레이크가 필요하다 해서 엔진 개발을 멈출 수는 없는 법이다. 젠슨 황은 더 빠르고 강력한 컴퓨팅 인프라가 존재해야만 AI의 잠재적 위험을 시뮬레이션하고 방어할 기술적 해법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규제로 발을 묶는 것이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신념이다.
트럼프의 계산법: "데이터센터는 21세기의 석유"
그렇다면 도널드 트럼프는 왜 하필 젠슨 황의 손을 잡았는가?트럼프는 통화에서 데이터센터를 가리켜 비유를 남겼다.
"데이터센터는 향후 20~25년간 석유와 같은 존재이며, 인터넷 혁명보다 훨씬 더 거대한 패권의 원천이다."트럼프 특유의 경제적 민족주의와 자원 중심적 세계관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대목이다. 20세기 패권국 미국이 텍사스의 유전과 달러-석유 결제망(페트로달러) 위에 세워졌다면, 21세기 패권의 핵심 자원은 다름 아닌 방대한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클러스터라는 인식이다.
트럼프는 현재 미국 일부 주 정부가 전력망 과부하와 환경 문제를 들어 신규 데이터센터 인허가를 반려하거나 지연시키는 행태를 맹비난했다. 연방 차원에서 모든 행정력을 동원해 데이터센터 인프라 확충을 밀어붙이겠다는 선언이다.여기서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와 젠슨 황의 '컴퓨팅 가속주의'가 화학적 결합을 이룬다. 트럼프에게 AI는 환경 규제나 관료주의적 잣대로 재단할 대상이 아니라, 패권 경쟁국 중국을 압도해야 할 전략 자산이다.
중국이 국가 차원의 자본과 전력을 쏟아부어 자체 AI 모델과 반도체 자립을 추진하는 상황에서, 미국이 윤리적 논쟁과 속도조절론에 갇혀 허송세월하는 것은 적에게 안방을 내주는 이적행위라는 것이 트럼프의 직설이다. 젠슨 황의 반도체 제국은 이 패권 구상에 없어서는 안 될 탄약고다.
젠슨 황의 선택에는 엔비디아가 처한 지정학적 위기감도 짙게 깔려 있다.조 바이든 행정부 시절부터 이어진 대중국 첨단 반도체 수출 통제는 엔비디아에 적잖은 타격을 주었다. 황은 규제 기준에 맞춘 다운그레이드 칩(A800, H800, H20 등)을 거듭 설계해 중국 시장의 끈을 놓지 않으려 분투했다. 기업인으로서 거대한 시장을 포기할 수 없다는 실리적 판단 때문이었다.
미·중 갈등이 장기화되면서 규제의 그물망은 갈수록 촘촘해졌다. 젠슨 황은 수출 규제 일변도의 관료주의 정책이 오히려 중국 테크 기업들의 자체 생태계 조성을 자극하는 역효과를 낳고 있다고 줄곧 경고해 왔다.이런 맥락에서 규제 만능주의를 배격하고 기업의 공격적 확장을 옹호하는 트럼프의 등장은 젠슨 황에게 하나의 돌파구가 될 수 있다. 트럼프의 화법에 동조함으로써 미국 내 인프라 투자에 대한 압도적 지원을 확보하는 한편, 관료적 규제 프레임을 허물어 기술 주도권을 확고히 틀어쥐겠다는 포석이다.
젠슨 황은 결코 정치적 이상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생존을 위해 권력의 흐름을 읽고, 그 권력이 자신의 기술 생태계에 봉사하도록 유도하는 노련한 전략가다.젠슨 황과 트럼프가 손을 잡고 쏘아 올린 '반(反)규제 가속주의'는 글로벌 테크 지형에 중대한 질문을 던진다.우리는 지금 산업혁명 이래 인류가 경험해 보지 못한 인지 노동의 외주화 시대를 지나고 있다. 속도조절론자들의 우려는 허상이 아니다. 통제 범위를 벗어난 자율 에이전트의 오작동, 가짜 뉴스와 정보 왜곡의 일상화, 일자리 축소와 사회적 양극화는 눈앞의 현실이다. 기술이 질주할 때 제도가 뒤따르지 못하면 사회적 안전망은 순식간에 붕괴할 수 있다.
젠슨 황의 반박 또한 가볍게 넘길 수 없다. 역사적으로 기술 혁신의 역풍을 두려워해 규제의 빗장을 걸어 잠근 문명은 예외 없이 쇠퇴했다. 19세기 영국의 '적기조례(Red Flag Act)'가 증기자동차의 속도를 마차 수준으로 묶어두는 사이 자동차 산업의 패권이 독일과 미국으로 넘어갔듯, AI의 속도를 인위적으로 늦추는 국가는 세계사적 경쟁에서 낙오할 수밖에 없다.젠슨 황이 내건 해법은 분명하다. “속도를 늦추어 안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더 고도화함으로써 위험을 통제해야 한다.”
그는 연산 능력이 기하급수적으로 폭발해야만 기후 위기를 해결할 정밀 기상 예측이 가능하고, 난치병을 치료할 단백질 구조 분석이 완성되며, 에너지 효율을 극대화할 자율 전력망을 구축할 수 있다고 믿는다. 기술의 부작용을 치유할 유일한 해독제는 더 강력한 기술뿐이라는 확신이다.LA의 무대 위에서 스피커폰을 들었던 젠슨 황의 표정은 결연했다. 그는 엔지니어 출신 경영인 특유의 실용주의로 무장한 채, 트럼프라는 거대한 정치적 풍랑마저 자신의 항해를 위한 돛으로 삼았다.
데이터센터를 21세기의 유전이라 부르는 정치가와, 그 유전에 들어갈 엔진을 독점 공급하는 실리콘밸리의 황제. 이들이 결성한 '반규제 동맹'은 이제 전 세계 테크 산업의 규범을 완전히 뒤바꾸려 하고 있다.워싱턴의 정책 입안자들은 관료적 규제 문구를 다듬는 대신 전력망 확충과 원자력 발전소 재가동을 고민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유럽이 포괄적 AI 규제법으로 울타리를 치는 동안, 미국은 다시 한번 야생의 실리콘밸리식 무한 경쟁으로 회귀할 태세다.
젠슨 황의 오디세이는 이제 칩 제조사를 넘어 글로벌 문명의 속도를 규정하는 자리까지 나아갔다. 속도조절론을 향해 “나는 반대일세”라고 단언한 그의 선택은 인류를 풍요로운 초지능의 신세계로 인도할 것인가, 아니면 통제 불가능한 프랑켄슈타인의 탄생을 앞당길 것인가.역사의 갈림길에서 가죽 재킷의 승부사는 이미 엑셀러레이터를 끝까지 밟았다. .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