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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에저지 톺아보기] 북극항로, 짧지만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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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에저지 톺아보기] 북극항로, 짧지만 만만치 않다

이한우 울산테크노파크 에너지기술지원단장(국제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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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 울산테크노파크 에너지기술지원단장(국제정치학 박사)
북극항로는 동북아시아의 관문도시 부산과 북유럽의 관문도시 로테르담 사이 항해 거리를 최대 40% 가까이 줄여줄 새로운 길이다. 수에즈 운하를 경유할 때보다 기간은 10일이 단축되고, 연료 소모량도 대폭 줄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짧아진 길이 곧 안전하고 값싼 길을 의미하지만은 않는다. 기후변화로 인해 쓸 수 있게 된 길이지만, 북극은 여전히 극지이다. 기상이 수시로 변해 항로 예측이 어렵고, 두꺼운 얼음을 깨며 나아가는데 필요한 쇄빙선이 있어야 지나다닐 수 있다. 쇄빙선 건조 비용은 일반 선박 대비 약 1.5~2배 높고, 보험료도 크게 상승한다. 또한 구난 인프라가 충분하지 않아 사고 발생 시 대응이 늦어질 수도 있다. 러시아와 서방 간 갈등으로 북극이사회 기능도 사실상 마비 상태에 놓여 있는 점 또한 고려해야 할 위험요인이다.

이러한 불확실성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규범 기반 참여가 필수적이다. 국제해사기구가 제정한 ‘폴라 코드’는 2017년부터 발효되어 선박 구조, 선원 훈련, 환경보호 등 엄격한 요건을 부과하고 있다. 이 코드는 권고 정도가 아니라 의무 규범으로, 이를 충족하지 않으면 항해 자체가 불가능하다. 한국은 2013년 북극이사회 옵저버 지위를 획득했다. 앞으로는 환경보호, 안전운항, 구조 인프라 구축 등 분야에서 선제적으로 아젠다를 제시할 수 있는 지위를 획득해야 한다. 규범을 만드는 나라로 도약할 때 비로소 북극항로 시대의 주도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산업적 준비도 필요하다. 울산은 이미 Arc7급 쇄빙 LNG 운반선 건조 경험을 통해 극지 해역 대응 역량을 입증한 바 있다. 러시아 야말 가스전 프로젝트에 투입된 이 선박은 영하 50도의 혹한에서 얼음을 깨며 LNG를 운반했고, 이는 세계 조선산업에서 한국의 기술력을 확실히 보여준 사례였다. 극저온 기자재, 방빙 코팅, 해양플랜트 설계 등 울산이 보유한 기술은 다른 지역과 비교해도 경쟁 우위가 뚜렷하다.
울산에서 추진 중인 암모니아 벙커링 규제자유특구사업은 미래를 내다본 과감한 시도이다. 국제해사기구는 2050년까지 국제해운의 탄소 배출을 2008년 대비 50% 이상 감축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따라 기존 벙커유에서 LNG, 암모니아, 메탄올, 수소로의 연료 전환 논의가 가속화되고 있다. 울산은 국내 최초로 암모니아 벙커링 실증에 착수했으며, 이는 글로벌 해양연료에 관한 규범 변화에 대응하는 전략적 준비라 할 수 있다. 머지않아 부산에서 화물을 환적한 선박이 울산 앞바다에서 청정연료를 충전한 뒤 북극항로로 출항하는 장면을 상상해볼 수 있다.

HD현대중공업은 메탄올 추진선을 머스크에 판매하였고, 암모니아 추진선을 수주하였으며, 수소 추진선 개발을 주도하고 있다. SK는 국가 수소공급망 다변화 전략의 일환으로 울산에 액화수소 플랜트를 건설해 해외 청정수소를 도입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수소특화단지 지정 및 암모니아 선박 산업생태계 조성과 맞물려 있다. 울산이 선박제조, 수소와 암모니아 생산 및 공급과 활용, 나아가 관련 금융·거래 인프라를 종합적으로 구축할 수 있다면, 북극항로 시대에 필요한 ‘청정에너지 허브 항만’으로 도약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거버넌스의 통합도 절실하다. 지금까지는 각 부처가 극지 정책을 추진해왔다. 소통부족으로 인해 정책의 일관성이 떨어지고, 산업계와 학계, 지방정부 간 협력도 쉽지 않았다. 이제는 산업, 외교, 안보, 환경을 아우르는 종합 전략이 필요하다. 가칭 ‘극지전략위원회’를 설치해 장기 비전과 단기 실행계획을 병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북극항로는 단순한 항로가 아니라 에너지 안보, 공급망 재편, 기후변화 대응과 직결되며, 이는 곧 국가 전체의 생존전략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북극항로 시대는 이미 시작되었다. 러시아는 2024년 북극항로 물동량을 3,790만 톤까지 끌어올렸고, 중국은 ‘빙상 실크로드’를 국가 전략에 포함시키며 북극 진출을 가속화하고 있다. 일본 역시 쇄빙 LNG선 건조와 북극 연구에 적극 투자하고 있다. 세계 각국이 치열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대응이 늦으면 기회를 잃는다.

울산이 중심에 선다면 한국은 항해 참여국의 지위에 머무르지 않고 극지 규범과 산업을 주도하는 제안국으로 성장할 수 있다. 울산 시민과 지역 기업이 함께 비전을 공유하고, 중앙정부가 전략적 뒷받침을 한다면 한국은 북극항로 시대를 선도하는 나라로 도약할 수 있다. 지금이야말로 짧지만 만만치 않은 항로에 국가적 의지를 세워야 할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