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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유역 살피고 돌아다닌 진흥왕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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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유역 살피고 돌아다닌 진흥왕 기념

[큐레이터 추천유물 6]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글로벌이코노믹=윤지영기자]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는 신라 제24대 임금인 진흥왕(재위 540~576)이 북한산에 세운 비로서, 국보 3호입니다. 이 비의 성격은 첫머리에 ‘순수(巡狩)’라는 표현이 있어,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두루 살피며 돌아다닌 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래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구기리(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비봉(碑峰)에 있었으나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고대관 신라실에서 전시하고 있습니다.

▲ 비봉에 있던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신라 제24대 국왕인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순수한 것을 기념으로 세운 비입니다.
조선 후기에 비문 내용 발견, 진흥왕순수비 명칭 얻어

비석은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비 몸돌의 높이는 약 155.1cm, 폭은 약 71.5cm, 두께는 약 16.6cm입니다. 왼쪽 아래로 약 25.1cm 되는 지점에서 오른쪽 아래로 약 45.4cm 되는 부분에 걸쳐 깨졌었으나, 뒤에 붙였습니다. 비의 윗부분에는 비의 덮개돌이 들어갈 수 있도록 너비 약 69cm, 높이 약 6.7cm 정도를 돌출시키고 있습니다. 이 비의 덮개돌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받침돌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지금도 비봉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로 보아 이 비는 덮개돌, 몸돌, 받침돌의 세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비문은 12행으로 각 행 21자 혹은 22자이나, 읽기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신라 555년경, 높이 155.1ㆍ폭 71.5ㆍ두께 16.6 cm, 국보 3호 이 비는 이끼가 끼어 있어 정확한 내용을 모르는 상태에서 무학대사왕심비(無學大師枉尋碑) 또는 몰자비(沒字碑) 등으로 불리어 왔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조선 후기 서유구가 10여 자를 판독하여 진흥왕순수비라 이름 지었고, 조선 순조 16년(1816)에 김정희가 친구 김경연과 함께 북한산 승가사에 갔다가 이 비를 발견하여 ‘진(眞)’자를 확인하여 신라진흥왕순수비로 확정하였습니다. 그는 이듬해 조인영과 더불어 새로이 68자를 확인하였지요.

김정희가 조사한 내력은 이 비의 옆면에 실려 있습니다. 비의 옆면에는 오른편으로부터 “此新羅眞興大王巡狩之碑 丙子七月 金正喜 金敬淵來讀(이것은 신라진흥대왕 순수비이다. 병자년(1816년) 7월 김정희, 김경연이 와서 비문을 읽었다)”라고 새겨져 있고, 그 옆에 “己未八月二十日 李濟鉉 龍仁人(기미년(1859년) 8월 20일 용인사람 이제현)’이 새겨져 있으며, 다시 예서로 “丁丑六月八日 金正喜 趙寅永同來 審定殘字六十八字(정축년(1817년) 6월 8일 김정희, 조인영이 함께 남아있는 글자 68자를 심정하였다)”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이 비는 김정희가 탁본하여 중국의 유연정에게 전달되었고 이것이 그의 ≪해동금석원≫에 실리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일제강점기에 이마니시 류(今西龍) 등이 재조사하여 ≪대정오년도고적조사보고≫에 실렸습니다.

비문에는 정확한 연대를 알려주는 간지나 연호가 없어 여러 학설이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진흥왕 16년(555)이나 진흥왕 29년(568) 무렵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확정되지는 않았습니다. 전자는 진흥왕이 16년(555)에 북한산을 순수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토대로 이때에 비석을 세웠다는 것이고 후자는 북한산비의 내용이 568년에 세워진 마운령비, 황초령비와 비슷한 점과 비문 중의 ‘남천군주(南川軍主)’를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보이는 “진흥왕 29년(568) 10월에 북한산주를 폐하고 남천주를 설치했다.”는 내용과 연결하여 이 비는 568년 10월 이후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진흥왕 대 지방 및 군사제도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

이 비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제목, 두루 돌아다닌 배경과 경과, 임금을 따른 사람 등을 기록하였습니다. 보이지 않는 글자가 많아 자세한 내용을 알기는 어렵지만, 내용 가운데서 당시 상황을 알려주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비의 첫머리에 ‘진흥태왕(眞興太王)’이 나타나는데, 이전의 임금인 지증왕과 법흥왕은 임금의 이름으로 마립간, 매금왕, 태왕 같이 불렀으나, 진흥왕은 명실공히 자신을 태왕으로 칭하고 있습니다. 이는 고구려에서 사용한 태왕을 본떠서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크지만 신라의 달라진 위상을 알 수 있는 임금 이름입니다.

다음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김무력이 비문에 보입니다. 이 비에는 ‘사돌부 출신인 무력지가 잡간’이라고 하는데, 잡간은 신라 17관등 중에서 3등급에 해당하는 고위직입니다. 김무력은 한강유역으로 확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장군으로 550년 무렵에는 5등급인 아간지였으나 창녕비의 내용으로 보아 561년 이후에는 잡간으로 승진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이 석굴에 거주하는 ‘도인’입니다. 도인은 불교의 도를 닦아 깨달은 사람인 승려로서, 새로이 편입된 지역의 백성을 교화하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진흥왕은 단지 새로운 영토를 확보하는 것에만 주력한 것이 아니라 정복지의 백성들을 교화하고자 하였습니다. 이 비에 보이는 ‘남천군주(南川軍主)’는 진흥왕대의 지방 및 군사제도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입니다.

▲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탁본(왼쪽)과 김정희가 순수비 옆면에 새긴 글자(오른쪽)

이와 같이 진흥왕은 변경지역을 돌아보고 순수비를 여럿 세웠습니다. 이는 진흥왕이 자신이 이룬 정복 활동의 성과인 영역을 과시하고 정복민을 통치하는 이념을 밝히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진흥왕 순수비는 6세기 중엽 신라 진흥왕대 신라의 발전상과 이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