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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주식버블, 권력의 탐욕과 대중의 광기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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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주식버블, 권력의 탐욕과 대중의 광기를 말하다

[왁자지껄 경제학] ⑨ 남해회사 포말사건

[글로벌이코노믹=김종길 기자] 지난 편에서 다뤘던 ‘미시시피 버블’로 인해 상당수 프랑스인들이 혼란에 빠졌던 그때 존 로를 배운 건지 존 로가 여기서 배운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의 판박이 우행(愚行)이 바다 건너 영국에서도 벌어진다. 시점도 거의 비슷하다. 영국이 자국 부채를 민간에 이양하기 위해 세운 것이 사우스시(SOUTHSEA)라는 기업이다. SOUTHSEA라니까 헷갈릴지 모르겠지만 경제학사에서 최초의 주식 버블로 불리는 ‘남해회사 포말사건’의 바로 그 남해(南海=SOUTHSEA)를 말한다.


17C말 당시 영국에서 주식을 소유한다는 것은 극소수 고위층들만 누릴 수 있던 큰 특권이었다. 총칼을 앞세운 약탈과 노예무역으로 유명한 ‘동인도회사’의 주주도 겨우 500명에 불과했다. 주주들은 비과세로 배당수익을 얻을 수 있었고 영국 귀족 여성들이 합법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종류의 자산이었다. 이러다보니 주식에 대한 대중의 열망은 커져갔고 영국 주식시장은 크게 발달한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따르는 법, 투자자들의 전폭적인 열망과 신뢰 속에 1711년 남해주식회사가 화려하게 출범한다. 당시 영국 정부는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에 개입하는 등 넓은 오지랖으로 인해 무리하게 국채를 발행해야 했고 나라 살림은 당연히 어려웠다. 대표 존 블런트를 비롯해 남해회사를 세운 주체들은 당시 막바지로 치닫던 왕위계승전쟁이 끝나면 스페인령 아메리카와의 노예무역을 허용해주는 조약이 체결될 것이라는 매우 신빙성있는 가능성을 십분 활용했다. 그러잖아도 주식 소유를 부와 신분상승의 도구로 여기고 있던 당시 영국인들에게 남해회사는 자신들의 욕망을 실현시켜줄 적절한 수단으로 보였다.

토리黨 정부는 남해회사가 국채를 인수하도록 해 정부의 재정 부담을 덜려고 했다. 대신 남해회사에게 에스파냐領 남아메리카 및 태평양제도와의 무역독점권과 1713년 위트레흐트조약에 따른 에스파냐령 식민지의 노예무역권을 줬다. 즉 남해회사는 1000만파운드에 달하는 정부 채무를 인수하는 대신, 그 보상으로 남태평양 무역의 독점권을 인정받은 것이고 대중은 이 사실만으로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다며 이 회사에 무조건적 사랑을 보내게 된다. 존 블런트와 그 일당들은 1720년이면 국채 전액을 인수하게 된다는 사실을 국민들에게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영국 전역에 투기 광풍이 불었고 온국민이 열과 성을 다해 사우스시 주식 매입이라는 투기 놀음에 빠진다. 표면금리 6%였던 주식은 너무도 잘 팔렸으니 정부는 이제 숨통이 트인다.


하지만 남해회사의 성장은 정경유착을 통한 엄청난 주가 조작의 결과물이었다. 남해회사는 정부 채무를 인수하면서 정부 증권을 자기 회사 주식으로 교환해 줬다. 이 내부정보를 미리 알았던 내부자들은 55파운드에 팔리던 정부증권을 사 모았다가 회사 설립 후 100파운드짜리 남해회사 주식과 맞바꿨다. 초기부터 부정이 범람했던 것이다. 게다가 1713년 스페인과 맺은 위트레흐트 조약은 처음 기대했던 것보다 남해회사에 불리했다. 즉 이 조약에 따라 수입노예에 대해 예상치 못한 세금 납부 의무가 생겼고 초기에는 1년에 단 한 차례, 그것도 일반무역을 조건으로 선박을 보내는 것만이 허용됐다. 1717년 남해회사의 첫 항해는 예상 외의 적은 이익을 남겼다. 즉 영업이익이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탐욕스러운 은행가 존 블런트 일당들에게 영업 부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뒤에는 국왕 조지 1세와 존 아이슬래비 재무장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해회사 주가는 연이은 사업실패에도 계속 떨어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완만히 상승했다. 교묘하게 주가를 관리해오던 존 블런트는 1718년 다시 발발한 스페인과의 전쟁으로 인해 정부 부채가 급격하게 쌓여갔던 점을 이용해 국왕 조지 1세를 꼬드겨 남해회사의 관리자가 되도록 함으로써 극소수 투자자들에게서 막 싹트려는 남해회사에 장래성에 대한 일말의 의구심마저 자재운다. 남해회사는 그 해 100% 이자를 배당했고 존 블런트는 주가를 조작, 무려 10배를 키운다. 1720년 실제로 남해회사가 의회 승인을 얻어 국채 인수를 제의하자 이 회사 주식은 그야말로 초우량 프리미엄주가 된다. 국가채무 전액을 상환하겠다며 자본 증액을 발표하자 대중의 광기는 극에 달한다. 환호하는 대중이 너도나도 신주를 사려고 몰려들었다. 신주 매입조건은 매우 파격적이었다. 할부 매입도 가능했다.


대중은 만족을 몰랐다. 기고만장해진 남해회사는 더 높은 가격에 신주를 추가 발행한다고 발표한다. 추가발행은 이전보다도 더 좋은 조건이었고 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1720년1월 128.5파운드이던 주가는 그해 8월 1000파운드를 넘어섰다. 주식을 살만한 여유가 없던 사람들마저 빚을 내서 무분별하게 투자했다. 참여정부 시절 부동산 광풍의 시기에 떳다방이 유행했듯 이 분위기에 편승한 사기공모가 이어졌다. 이미 이성을 상실한 대중의 광기는 묻지마 투자로 이어진다. 그들에게 그 회사가 무슨 일을 하는 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주식만 살 수 있으면 그 뒤에 부가 보장된 것으로 착각했다. 터무니없는 프로젝트 수백개가 시장에 나돈다. 그 중에는 ‘큰 이득을 올리는 사업이지만, 내용을 공개할 수 없다’ 는 희한한 회사가 설립되고 더 웃기는 것은 단 5시간만에 투자금을 모아 바로 영국대륙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이런 비정상의 시기에 인류 최고 과학자 중 한 사람이자 당시 영국 왕립조폐국 국장이었던 아이작 뉴턴도 남해회사에 투자해 한때 7000파운드를 번다.



하지만 뉴턴의 최종 투자 성적은 마이너스 2만파운드다. 뉴턴의 투자 실패는 예견된 것이었다. 사우스시의 영업이익이 그리 좋지 못한 상황인데 인위적으로 주가를 띄웠으니 어느날부터 주가가 떨어진 것은 경제논리 상 당연했다. 헨델처럼 상투에 팔고 나와 왕립음악원을 차리는데 비용을 보탠 경우는 정말 휘귀한 케이스다. 회사는 네 번에 걸쳐 주식을 발행한다. 발행된 주식은 매번 단 두 세 시간 만에 소진될 정도였다. 남해회사의 이같은 성공 사례(?)를 벤치마킹한 새로운 회사들이 설립됐고 이들의 등장을 꺼렸던 남해회사는 자신들의 영향력을 이용해 주식 상장을 어렵게 하고 본래 사업 목적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버블법'(The Bubble Act)을 통과시킨다. 이 법은 남해회사 자신의 특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거품이 꺼지게 만드는 단초를 제공했다.

특히 이 회사의 장래성에 대해 회의적 시각을 가지게 된 일부 임직원들이 주식을 조용히 처분했던 일이 크게 작용했다. 그 소문이 시장에 퍼지면서 걷잡을 수 없는 공황이 발생했다. 9월부터 시장이 붕괴되면서 12월 남해회사 주가는 124파운드로 폭락했다. 국채를 포함해 남해회사 관련 다른 주식 가격도 덩달아 떨어졌다. 바다 건너 프랑스의 ‘미시시피 컴퍼니’와 마찬가지로 남해회사는 붕괴된다. 영국 국회는 대중의 피해 확산을 막기위해 기업들의 주식발행을 금지하는 ‘거품법’ 을 통과시켰고 이후 한 세기동안 영국에서 주식은 금기어가 됐다. 존 블런트의 정치 로비 사실까지 드러나면서 투매가 일어났고 회사는 회생불능 상태로 추락한다.

존 블런트의 행위는 많은 영국 가정의 경제를 악화시켰다. 존 블런트는 이미 돈을 다른 곳에 써대 피해를 배상할 만큼의 재산이 없었다. 국가 채무를 일개 기업 혹은 개인이 좌지우지 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지만 당시에는 가능했다. 많은 투자가들이 파산했으며 하원이 사건에 대해 조사를 시작한 이후 최소 3명의 장관들이 뇌물을 받고 투기했음이 드러났다. 존 블런트를 비롯한 회사 중역들 다수가 해직됐으며 1750년 회사가 보유하고 있던 대부분의 권리는 스페인 정부에 매각됐다. 이 사건은 공인회계사와 회계감사 제도를 탄생시키는 데 기여했다.

미시시피 버블도 그랬지만 남해회사 버블 사태의 수혜자는 일반 투자자들의 돈으로 부채를 모두 '털어버린' 두 나라 정부였다. 아 참! 아이작 뉴턴은 나중에 이 일을 두고 “천체의 움직임은 센티미터 단위까지 측정할 수 있지만 주식시장에서 인간들의 광기는 도저히 예상할 수 없다”며 후회했다고 한다. 산업/IT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