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산하여 들르게 되는 청와대, 삼청동, 송현동, 인사동 길에는 옛 시골 5일 장터와 같이 남녀노소가 모여 활기차다. 종로3가 피맛길 식당들도 은퇴한 실버들의 미팅 플레이스로 여전히 성업 중이다. 장애인 등 신체적 약자들은 무장애(barrier free) 남산 둘레 북측 순환로에서 산책하고 있다.
이 지도에는 역 오메가(Ω) 형태로 중랑천과 한강이 에워싸고, 그 북쪽으로부터 내려오는 도봉산, 북한산 삼봉, 보현봉 그리고 백악을 그렸다. 백악에서 다시 동쪽으로는 응봉과 낙타산으로, 서쪽으로는 인왕산과 남산으로 이어져, 도읍을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1970년대 이후 강남권역이 현대 도시로 눈부시게 개발되었다. 그렇지만 사대문 안의 옛 도성 골격과 건축은 여전히 그 품격을 잃지 않고 살아있어, 대체할 수 없는 서울의 핵이라고 할 수 있다.
흥미진진하고 레슨 뭉치 덩어리인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 건국 초기 한성 천도 과정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당시 수도를 고려조 수도로서 완성된 도시인 개성(송경)으로 하느냐? 한성(한경)을 신수도로 건설하느냐? 갈팡질팡했다. 태조 이성계 등 일부가 신수도를 지지했고, 대신들이나 백성들은 대부분이 송경에 마음이 가 있었다. 결국 태종이 몇몇 대신들과 같이 종묘에 가서 그 답을 얻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왕을 중심으로 한 일부 핵심 권부의 의지에 따라서 한경으로 결정된 것이다. 자연히, 신수도 건설 사업에서 백성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려 했다.
백성들의 농사철을 세심히 고려해 한성 건설 노역에 동원했고, 가능한 한 농민보다는 군인이나 승녀를 동원하려 했다. 또한 부엉이가 궁궐에서 운다든지 별의 움직임이 이상하다든지 하면, 공사를 축소하거나 중지했다. 그만큼 태조나 태종은 마음고생하면서 신수도를 건설했다. 그래서 "사치하지도, 누추하지도 않은 도시"를 만들었다. 한성은 최대한의, 최소한의 도시였다. 최소한의 노력 한도 내에서 도성이 갖추어야 할 요소와 원칙을 최대한 갖춘 도성이었다. 그래서 지혜의 도시(city of wisdom)였다.
우리 전통 건축에 ‘덤벙주초’가 있다. 가공을 최소화한 자연석을 땅에 묻고 나무 기둥을 지지하도록 했다. 최고·최대의 화려한 사찰에서도 덤벙주초를 사용했으니, 전통 건축의 대표적 공법이었다. 도시 건설뿐만 아니라 건축도 가공을 최소화했다. 왕이나 백성들이나 우리 선조들은 검약(儉約)을 실천하고자 했다. 우리 몸속에 잠복된 유전자인 ‘검약’이 21세기 친환경, 탄소 중립 시대의 덕목으로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이영한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명예교수(건축학), 지속가능과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