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립 슬로건 ‘우리를 위해 우리가 만든 우리의 은행’
불황과 함께한 시련, 지역민과 호흡하며 극복해가다
지역과 세계로, 고객과 미래로…새로운 비상을 꿈꾸다
불황과 함께한 시련, 지역민과 호흡하며 극복해가다
지역과 세계로, 고객과 미래로…새로운 비상을 꿈꾸다
![1967년 부산은행 신창동 본점 개점식 [사진=BNK부산은행]](https://nimage.g-enews.com/phpwas/restmb_allidxmake.php?idx=5&simg=20220107205217000589d71c7606b1181318851.jpg)
◆지역발전의 마지막 퍼즐…‘우리를 위해 우리가 만든 우리의 은행’
한국전쟁후 부산은 인구 140만 명의 대도시로 성장했다. 하지만 부족한 금융 여력이 발목을 잡는다. 1967년 당시 국내 금융기관의 예금 및 대출금의 60.1%가 서울에 몰렸다. 부산에는 10.1%만 분포됐을 뿐이다. 1959년 서울 인구가 209만 명임을 감안하면 그 격차가 크다.
![1967년 부산은행 개업 당일 영업부 창구 모습 [사진=BNK부산은행]](https://nimage.g-enews.com/phpwas/restmb_allidxmake.php?idx=5&simg=20220107205230023899d71c7606b1181318851.jpg)
1967년 1월 정부는 지방의 금융지원을 목적으로 '지방은행의 설치'관련 법안 검토에 들어간다. 같은해 부산상공회의소가 은행 설립을 위한 작업에 즉각 돌입했으며, 그해 10월 25일 부산시 중구 신창동 옛 부산상공회의소 건물에 ‘부산은행’의 첫 깃발을 올렸다. 부산은행의 1호 고객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2호고객은 서봉균 전 재무부장관, 3호 고객은 김세연 전 한국은행 총재였다. 개점일에만 5억2089만 원이 몰리는 등 ‘우리를 위해 우리가 만든 우리의 은행’이라는 슬로건 아래 지역민의 성원도 뜨거웠다.
![1973년 부산은행 시모노세키사무소 개소 [사진=BNK부산은행]](https://nimage.g-enews.com/phpwas/restmb_allidxmake.php?idx=5&simg=20220107205241019309d71c7606b1181318851.jpg)
부산은행은 개점 두 달만에 영업점 두 개를 늘리는 등 점포망 확장에도 공을 들였다. 1972년에는 지방은행 최초로 서울지점을 개설했으며, 일본 시모노세키와 뉴욕에 사무소도 열었다. 이에 1979년 말 부산은행은 총 68개의 점포를 갖게 된다. 1970년대 초부터 컴퓨터를 설치해 전산화는 물론 업무의 온라인화도 진행했다. 또한 영업활동과 창구 접객에 공 들이고 지역 반상회에도 참가하는 등 은행의 ‘이웃화’를 추구했다. 그 결과 부산은행은 1970년 예수금 100억 원달성에 이어 1975년에는 지방은행 최초로 예금고 1000억 원 돌파 기적도 일구어냈다.
◆불황과 함께한 시련, 지역민과 호흡하며 극복해가다
1980년대 경기불황은 부산은행에 있어서 최대 시련이었다. 세계 최대 단일 합판 공장 ‘동명목재상사’가 1980년 폐업하면서 부산 지역 평균 부도율이 전년 대비 2배 이상 늘게 된다. 동명목재의 강석진 회장은 부산은행의 발기인 대표와 초대 명예회장직을 역임했던 만큼 그 충격 여파는 어마어마했다.
![1980년 금융혁신자체평가회 [사진=BNK부산은행]](https://nimage.g-enews.com/phpwas/restmb_allidxmake.php?idx=5&simg=20220107205259061069d71c7606b1181318851.jpg)
태화방직 등 거래기업의 채산성이 악화되자 부산은행의 1981년 당기순이익은 40억6500만 원으로 전년 대비 27.2% 나 줄었다. 이듬해에는 무려 51%가 감소한 19억9000만 원으로 격감했다. 배당률 역시 20%에서 14%로 줄어든데 이어 1982년에는 5%까지 급락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산은행은 거래기업의 원리금 상환을 유예해주는 등 기업과의 ‘공존’을 선택한다.
서민금융의 집대성을 목표로 친절봉사 캠페인과 신종상품을 출시하는 등 고객편의 위주의 예수금 증강운동도 함께 진행했다. 또한 경남은행과 ‘부산리스주식회사’를 설립해 부산·경남지역의 중소기업 지원에 나서 유망 기업들을 발굴했다. 그 결과 1986년 부산은행은 출범 20년 만에 예수금과 총대출이 1조 원을 돌파하는 대기록도 세우게 된다.
![1986년 유망중소기업 발굴지원 최우수기관 대통령 표창 시상식 [사진=BNK부산은행]](https://nimage.g-enews.com/phpwas/restmb_allidxmake.php?idx=5&simg=20220107205321042789d71c7606b1181318851.jpg)
1990년들어서도 시련을 맞는다. 금융 자율화 기조 아래 새로운 금융기관들이 대거 등장하자, 부산은행은 강도 높은 경쟁체제에 내몰린다. 부산은행이 택한 것은 변혁을 통한 정면 돌파였다. 고객순번대기제 등 새로운 제도와 서비스센터, 펌뱅킹서비스 등 혁신 시스템을 과감히 도입했다. ALM전산시스템 등 최첨단 IT금융서비스를 구축했으며, 홍콩·베트남 등에 사무소도 열었다. 하지만 이같은 노력들은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물거품이 된다.
◆외환위기를 도약의 발판으로…우량은행으로 성장
1997년 외환위기는 금융기관들의 존립 기반을 뒤흔들었다. 연이은 대기업들의 부도에 금융기관들은 자금 운용을 축소시켰고, 그 결과 우량기업들의 부도가 이어지는 악순환을 야기했다. 급기야 1998년 부산은행은 경영개선권고를 받게 된다.
기반이 취약한 지방은행이 회생하기 위해선 대규모 증자가 필요했다. 하지만, 이를 원하는 대주주는 없었다. 이에 공적자금을 지원받자는 의견도 대두됐지만, 노동조합과 지역 소상공인들의 결사 반대로 결국 부산은행은 독자생존의 길을 모색하게 된다. 인력 38% 감축, 점포 29개 폐쇄, 대규모 임원 교체 등 뼈를 깎는 경영정상화 계획을 수립해 금융감독원에 제출한다.
![1998년 부산은행 주식갖기 전담창구 [사진=BNK부산은행]](https://nimage.g-enews.com/phpwas/restmb_allidxmake.php?idx=5&simg=20220107205350022889d71c7606b1181318851.jpg)
그리고 대주주의 불참, 하락한 주가 등 시련을 겪는 과정에서 기적이 일어난다. 1542억 원의 자본금 증자에 성공한 것. 이는 시민 한 사람이 부산은행 주식 10주씩 갖자는 ‘주식갖기 운동’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말 그대로 지역민의 성원이 위기에 빠진 부산은행을 일으킨 것이다.
금감원의 경영개선 권고가 종료되자 부산은행은 자신감을 회복한다. 가장 먼저 숙원사업이던 부산시 주금고 유치에 성공하며 도약의 첫 발을 내딛는다. 2001년에는 ‘내고장 사랑 21’ 프로그램을 통해 지역 소재 기업을 적극 육성하고 시장 점유율 확대를 도모했다. 또한 국내 최초의 다기능 전자화폐인 ‘디지털 부산카드’ 상용화 사업도 적극 추진한다.
![2000년 부산광역시 시금고은행 선정 [사진=BNK부산은행]](https://nimage.g-enews.com/phpwas/restmb_allidxmake.php?idx=5&simg=20220107205401092169d71c7606b1181318851.jpg)
이같은 노력의 결과, 2002년도 들어 부산은행은 글로벌 신용평가사 ‘무디스’로부터 신용등급을 투자적격인 ‘Baa3’로 3단계 상향조정하게 된다. 2005년에는 은행경영실태평가에서 최우수 등급인 2등급도 받는다. 또한 2005년 말 기준 당기순이익 1789억 원, 총자산이익률(ROA) 0.99%, 자기자본이익률(ROE) 16.34%라는 재무적 성과도 달성한다.
이후 부산은행은 본격적인 확장에 들어간다. 울산, 양산, 김해 등 인접 지역에 점포를 확장했으며, 중소기업에 2조 원을 지원했다.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에도 부산·경남 지역 조선·자동차 등의 호황에 힘입어 순이익도 2750억 원을 달성한다. 2009년 3월에는 2000억 원 규모 유상증자에 성공한다. 이를 바탕으로 부산은행은 2009년부터 증권사와 캐피탈사를 출범시킨다.
2010년에는 일자리 창출을 위해 142억 원을 투입해 지역경제 활성화에 나선다. 300개 업체를 발굴해 1조 원의 특별저리자금을 지원하고, 지원센터를 설치해 자영업자의 창업과 경영 전반의 컨설팅도 진행했다.
◆지역과 세계로, 고객과 미래로…지방의 거목에서 비상을 꿈꾸다
![2011년 BS금융지주 출범기념식 [사진=BNK부산은행]](https://nimage.g-enews.com/phpwas/restmb_allidxmake.php?idx=5&simg=20220107205423053469d71c7606b1181318851.jpg)
2010년대는 금융환경의 개방과 겸업화 기조로 전통 예대업무만으로는 금융업에 한계가 명확한 시기였다. 부산은행 역시 미래성장동력과 경쟁력 확보를 위해 지주사 설립을 추진했다. 2011년 3월 지방은행 최초로 금융지주사인 'BS금융지주'가 출범한다. 이어 2011년에는 IT자회사 ‘BS정보시스템’을 설립했으며, 2012년에는 파랑새저축은행과 프라임저축은행의 우량자산과 부채를 인수해 BS저축은행을 출범시켰다. 또한 2012년에는 500여 명의 전산 인력을 동원해 차세대시스템 ‘네오비스(NeoBS)’ 를 오픈한다. 새로운 금융환경에 맞설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이후 부산은행은 2014년 문현금융단지로 옮겨가 새로운 둥지를 튼다.
![2017년 소상공인 특별자금 지원 MOU 체결 [사진=BNK부산은행]](https://nimage.g-enews.com/phpwas/restmb_allidxmake.php?idx=5&simg=20220107205441022479d71c7606b1181318851.jpg)
부산은행은 지역민에 대한 애정도 각별했다. 지역 자영업자를 위해 1500억 원 한도로 자영업자 지원 대출을 출시했으며, 서민전용상품도 출시했다. 2014년엔 1조 원 규모의 중기지원대출을 실행하고, 5000억 원 규모의 펀드도 조성해 혁신기업을 유치했다. 그 결과 부산은행은 그해 ‘제19회 중소기업 금융지원 포상’에서 단체부문 ‘대통령 표창’을 수상한다.
2014년 경남은행과 하나가 된 BS금융지주는 2015년 3월 ‘BNK’로 사명을 바꾼다. 이를 통해 부산은행은 부산·경남 양 은행 공동 예금 상품을 출시하고, 교차 서비스를 실시하는 등 본격적인 시너지를 내기 시작한다. 특히 모바일 뱅킹 서비스 ‘썸뱅크’에 롯데의 온·오프라인 유통망과 롯데 L포인트, L-페이 등을 접목시키는 등 차별적인 혁신으로 지역의 한계를 뛰어 넘고 있다. ‘고객 지향을 바탕으로 한 금융 디지털화’를 선도하고 있다.
![2011년 BS금융지주 출범기념식 [사진=BNK부산은행]](https://nimage.g-enews.com/phpwas/restmb_allidxmake.php?idx=5&simg=20220107205432042749d71c7606b1181318851.jpg)
부산은행은 새로운 성장동력을 위한 해외 영업망 확충에도 적극 나섰다. 2012년 중국에 지방은행 최초로 영업점을 설립했으며, 베트남과 미얀마, 인도 등에도 진출했다. 중국-인도-동남아시아를 잇는 글로벌 비전의 밑그림을 완성한 것이다. 2020년 이후에는 중국 난징과 우즈베키스탄에 진출하는 등 코로나19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부산은행은 새로운 성장동력을 마련하기 위해 오늘도 세계의 문을 두드리며 동분서주하고 있다.
김지완 BNK금융그룹 회장은 신년사를 통해 “불위호성(弗爲胡成). 즉 행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다”며 “속도감 있는 디지털 전환을 통해 미래 성장동력을 확보하고, 지속가능한 경영을 위한 견고한 펀더멘탈을 구축하자”고 강조했다.
신민호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sho634@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