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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문재인] 문재인이 걸어 온 길, 새로운 대한민국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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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문재인] 문재인이 걸어 온 길, 새로운 대한민국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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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이코노믹 최성해 기자] 19대 문재인 대통령 당선자의 인생을 함축한 말은 운명이다. 노무현 변호사를 만나 노동·인권변호사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참모로, 그리고 노대통령의 서거에서 비롯된 현실정치인으로 굵직한 시기마다 그에게 주어진 운명에 충실하며 매번 새로운 길을 열었다. 그렇기에 19대 문재인 대통령 당선자가 우리나라의 국운을 융성하게 만들지 국민들의 기대도 크다.


■가난한 유년·소년 시절, 경찰서 유치장에서 사업시험 합격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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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으로 보면 서민이란 말이 잘 어울린다. 부모님이 아무런 준비없이 급하게 피난을 온 탓에 그의 집은 늘 가난에 시달렸다. 어머니는 연탄배달로 집안생계를 꾸렸다. 이같은 지독한 가난이 오히려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문재인은 경남중학교와 경남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세상의 불공평함에 눈 뜬 사춘기 시절 독서로 가난의 컴플렉스를 극복했다. 교우관계도 폭이 넓었다. 운동을 하는 친구뿐만 아니라 문학청년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그래도 성적은 늘 좋았다.

서울대 상대에 탈락한 뒤 재수 끝에 1972년 경희대학교 법학과 4년 전액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운명은 그를 보통 대학청년으로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한 1972년은 박정희 정권의 10월 유신 선포로 민주주의 탄압이 극심할 때다. 2년 뒤 정권유지를 위해 민청학련, 인혁당 등 대규모 공안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문재인은 사법살인항의관련 대규모 학내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된다. 석방 이후 징집신체검사와 입영통지서를 받고 군대로 강제징집된다.

요즘 ‘진짜 사나이’로 회자되는 각잡힌 군복무 모습은 특전사령부 제1공수 특전여단에서 찍은 사진이다.

군인 문재인은 A급 전투요원으로 유명했다. 폭파과정 최우수, 화생방 최우수 표창을 받았으며, 상병 때는 북한이 일으킨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에 대한 대응작전에 투입되기도 했다.

군대제대 뒤 실력이 곧 합격인 고시공부에 열중한다. 1979년초 사법고시 1차에, 다음해 2차 시험에 합격한다.

합격통지를 경찰유치장에서 받은 것도 유명한 일화다. 문재인은 복학생 대표로 민주화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됐다. 경찰서 유치장에서 사법시험 2차 합격통지를 받고, 당시 경찰서장과 조촐한 소주파티로 사법시험 합격의 기쁨을 나눴다.

■참여정부 영광과 몰락 경험한 산증인, 노무현 전대통령 서거로 현실정치인 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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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의 사법연수원 시절은 평범했으나 한편으론 특별했다.

당시 고인이 된 조영래 변호사, 박원순 서울시장, 박시환 대법관, 송두환 헌법재판관, 이귀남 법무장관, 박병대 대법관, 박정규 민정수석, 조배숙 의원, 박은수, 고승덕 전의원 등이 연수원 동기다.

쟁쟁한 동기들 속에서도 문재인의 성적은 상위권이었다. 사법연수원 수료식에서 연수원 성적 차석으로 법무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매월 받는 봉급으로 경제적으로 홀로서기도 가능했다. 7년동안 연애중인 김정숙 씨와 결혼을 한 것도 이 무렵이다.

변호사로 인생의 방향을 바꾼 것도 운명이었다. 애초 판사를 지망했지만 시위전력으로 임용에서 좌절했다. 새옹지마일까? 이를 계기로 노무현 변호사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이 두 사람은 각종 인권, 시국, 노동 사건을 맡으며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다.

문재인은 참여정부의 영광과 몰락을 모두 경험한 산증인이다. 2차례 민정수석, 시민사회 수석을 거쳐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퇴임했다.

참여정부의 요직을 맡았으나 문재인은 청렴하고 자신을 낮췄다. 고위 공직자의 관행과 특혜에 단호했다. 업무시간 외엔 직접 차를 몰았다. 방이 따로 없는 대중음식점에서 밥을 먹거나 비행기·기차 등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할 때 일반석을 이용했다.

중간에 10개의 이가 빠질 정도의 과로로 민정수석을 사퇴하기도 했다. 히말라야로 트래킹을 떠나는 등 자유의 시간을 보냈으나 운명은 자연인인 그를 허락치 않았다. 노 전대통령의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하며 업무에 복귀한 것이다.

탄핵재판 종료 이후 시민사회수석으로, 2005년 1월 다시 민정수석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2007년 3월, 문재인은 노무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참여정부와 함께 임기를 마쳤다.

그 뒤 문재인은 양산 시골집으로 돌아왔다. 보통사람이고 싶었으나 세상은 문재인을 놔두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주변 인물들에 대한 조사가 시작됐으며 이 과정에서 노대통령도 검찰에 출석하는 등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이는 결국 노무현 전대통령 서거라는 비극을 낳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 과정에서 상주 문재인이 보여준 절제력과 의연함이 국민에게 감동을 주면서 새로운 정치인 문재인으로 떠오르는 시발점이 됐다.


■당대표시절 혁신위원회 통해 혁신바람, 새로운 대한민국 재탄생 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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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묻지 않은 정치인 문재인은 승승장구했다. 지역감정극복, 국민통합의 가치를 위해 2012년 4월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 국회의원에 출마했다.

총선승리 두 달 뒤 18대 대통령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민주당 국민경선에서 정치신인 문재인은 13번 모두 1위에 오르며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됐다.

하지만 18대 대선 결과, 득표수 1469만표, 득표율 48.02%로 석패한다.

대선 패배 뒤 문재인은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시대는 문재인의 겨울잠을 허락하지 않았다.

국정원 대선공작 불법 선거비호, NLL 포기 논란, 정상회담 대화록 불법공개 등으로 국론과 국민의 분열은 극에 달했다.

큰 아픔도 있었다. 세월호 참사로 죄없는 어린 생명들을 잃었다. 진상규명에 나서야 할 정부는 사건을 덮고 은폐했다. 당시 문재인은 세월호 유족과 동조단식을 통해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했다.

2014년 12월 29일 문재인은 당대표 출마선언을 밝혔다. 당을 혁신없이 총선은 물론 다음 정권교체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절박함 때문이다.

당대표가 된 뒤 당의 개혁을 위해 기득권 세력과 맞섰다. 혁신위원회를 통해 공정한 공천 룰을 만들었다. 새로운 인재에 대해 문호를 열었다. 각계각층에서 참신한 인재가 모이자 젊고 역동적인 당으로 탈바꿈했다.

지난해 촛불혁명으로 국민이 박근혜 정권을 탄핵했다. 탄핵으로 치르진 19대 조기대선에서 당당히 19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문재인 대통령 당선자는 자신을 국민의 도구로 써달라고 강조한다. 스스로 정권교체의 삽이, 적폐청산의 벽을 깨는 망치가 되고, 나아가 정의로운 반석을 다지는 곡괭이가 되겠다는 각오다.

또 새로운 대한민국을 희망하는 국민의 뜻을 모아 정의로운 통합을 이루겠다고 역설했다. 그의 인생이 곧 운명이고, 이제 그 운명이 19대 대통령으로 국운을 번창하게 만드는 숙명으로 뒤바뀐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 당선자 주요 프로필>

1953 경남 거제 출생 (53년 1월 24일생, 만 64세, 음력 1952년생, 용띠)
1968 경남중학교 졸업
1971 경남고등학교 졸업
1972 경희대학교 법대 입학
1978 육군 병장(특전사령부 제1공수 특전여단) 만기 제대
1980 경희대학교 법대 졸업
1980 제22회 사법고시 합격
1981 김정숙 씨와 결혼 (슬하에 1남 1녀)
1982 노무현 변호사와 합동법률사무소 시작
1995 법무법인 부산 설립
2002 노무현 대통령 후보 부산 선거대책본부장
2003 청와대 민정수석
2004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2007 청와대 비서실장
2009 故 노무현 前대통령 국민장의위원회 상임집행위원장
2010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
2012 민주통합당 제18대 대통령 후보
2013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2015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
2016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

최성해 기자 bada@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