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 특별 대담-정덕기(작곡가, 백석대 교수) vs 이시환(시인, 문학평론가)

정덕기 : 그러게 말입니다. 1994년 선생님의 시 「그리움」에 곡을 입힌 것을 계기로 만났는데 그 만남이 쭉 이어지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아쉽지만 지금에서라도 다시 만났으니 이젠 그 만남이 계속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시환 : 그래야겠지요. 어쨌든, 다시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솔직히 말해, 저는 작곡가 정덕기 님의 음악 세계를 얘기할 정도로 음악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합니다. 다만, 정 작곡가님께서 그동안 ‘한국작곡가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에서 활동하시며, 수많은 시인의 시 작품에 곡을 붙여왔고, 그 결과 약 600여 편의 가곡(歌曲)을 남겼으며, 조금 전 작곡가님의 방대한 작품목록을 일일이 살펴보면서 확인했지만 비교적 널리 알려진 김소월 천상병 윤종혁 김남조 이건청 정호승 신석정 유경환 최동호 신달자 나태주 한여선 등 주옥같은 시를 창작하는 훌륭한 시인들의 시에 곡을 붙임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는 객관적 사실 정도를 인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혹 결례가 되는 질문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며, 실수하더라도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평생, 음악과 더불어 살아오셨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데 어떻습니까? 자신의 삶을 스스로 돌아보았을 때 어떤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요?
정덕기 : 사실, 저는 평생 작곡만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작곡을 빼면 저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여기에 관하여 ‘음악저널’ 기사 하나를 이메일로 첨부하여 보내겠습니다).
작곡가님은 그동안 많은 시인의 시를 접하면서 공감되는 바 있어서 곡을 지으셨을 텐데 그런 경험적 안목이 쌓여 이제는 시를 보는 족족 본능적으로 ‘좋다, 그저 그렇다, 아니다’라는 식으로 작곡가 시각에서의 평가가 입 밖으로 나올 법도 한데….
정덕기 : 사실, 저도 곡을 쓰는 사람으로 시를 읽으면 본능적으로 아 좋다, 그저 그렇다, 영 아니다, 그렇게 느끼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하고 생각만 할 뿐이지요. 그렇다고, 항상 좋다는 것에만 곡을 쓰는 것도 아니니까요(때에 따라서는 영 아닌 것에도 곡을 써야 하니까 말입니다). 그렇다고, 항상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항상 곡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영 아닌 것이 영 아닌 것으로 남지도 않습니다.
이시환 : 아, 그렇군요. 상당히 유연하시군요. 하하하. 정덕기 작곡가께서 특별히 좋아하는, 아니, 애송하는 작품이 있다면 어떤 작품이 있는지요?
정덕기 : 저의 곡을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저는 저의 모든 작품이 다 고만고만해요. 어느 것을 내세울 수가 없어요. 이것은 이것 때문에 저것은 저것 때문에 사랑해야 할 이유가 다 있는 거예요. 그래도 많이 알려진 것이 있다면 「된장」, 「와인과 매너」 그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시환 : 그렇군요. 한번 들어보고 싶군요.
정덕기 : 지금 선생님의 폰으로 링크해 놓겠습니다.
이시환 : 감사합니다. 감상해 보고 소회를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시가 절박하게 다가와 있어서 평생 그것에 매달리듯 살아왔는데 혹시, 작곡가님께 가곡이라는 것도 그런 대상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시가 제게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데 타인들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너무나 늦게 깨달았지요. 그래서 이제는 너무 긴장하지 않으려고 하며, 너무 쫓기듯 살지 않으려고 합니다. ‘나의 시가 필요하면 찾아 읽겠지. 읽고서 느끼고 공감하는 바 있거나 그것이 크면 그 문장의 주인을 기억하겠지.’라고 편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시의 무엇이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지, 그리고 시의 무엇이 궁극적으로 내 마음을 편하게 하는지도 생각합니다. 가곡을 대하는 작곡가님의 마음이나 가곡에 거는 작곡가님의 기대는 어떤 것인지요? 그 의미가 사뭇, 궁금합니다.
정덕기 : 저는 어릴 적에 ‘존재(存在)’에 대한 생각이 많았던 것 같아요. 죽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아니하잖아요. 그래서 무언가를 남기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소설(小說)’을 생각했어요. 그것이 나중엔 ‘작곡(作曲)’으로 바뀐 것뿐이지요. 작곡도 무언가 남기는 작업이라 생각했지요. 사실, 저는 작곡만 열심히 하지 그 곡을 알리는 일은 저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곡이 좋으면 언젠가는 알려지겠지요.’라고 생각해 왔던 게지요.
이시환 : 그렇군요. 음악평론가들이 ‘해학가곡’이란 말로써 정 작곡가님의 가곡의 한 특징을 함축적으로 설명하려 한 것 같은데, 저는 다시 가곡 목록을 들여다보면서 더욱 그 소리의 빛깔이 궁금해졌습니다. 때마침, 보내주신 윤준경의 「액면가」와 김필연의 「라면 한 입」 등 두 곡을 연속으로 들어보았습니다만 ‘참 재미있다’라는 생각이 들었고요. 이렇게 자유분방한 노랫말에 맞추어 자유자재로 소리의 길을 내는 것을 보고서 작곡가의 뛰어난, 아니 창의적인 역량을 떠올렸습니다. 특히, 피아노가 시를 읽는 듯한 강렬한 인상을 받았는데 정 작곡가님의 의욕적이고 창의적인 노력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상 속에서 경험하고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말해지는 ‘생활언어’들이 노랫말로서 노래 불리워짐으로써 가곡이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설 수 있겠다는 생각과 함께 가곡의 외연을 확장하는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습니다. 문제는, 가곡이란 한 번 듣고 마는 그런 노래가 아니라 듣고 들어도 다시 듣고 싶은 우리의 보편적인 정서가 격조 있게 반영되어야 하는데 과연 정 작곡가님의 파격적인, 아니 전위적인 노력이 과연 대중에게 어떻게 평가될지 모르겠습니다.
정덕기 : 우리 한국가곡이 외국곡보다 더욱 그런데 모두 비슷비슷해요. 내용도 사랑, 고향 그리움, 이별, 자연, 그런 것들이지요. 작곡가도 다른데 분위기가 다 비슷비슷해요. 그래서 한 곡만 들으면 좋은데 여러 곡을 들으면 역시 지루해져요. 다 비슷하니까요. 물론, 작곡가의 역량(혹은 상상력)이 문제이지만요.
그래서 그것을 극복하고자 학예회처럼 여러 성악가가 등장하여 한두 곡으로 부르고 바뀌지요. 그것으로 비슷한 것을 극복해 보고자 하지만 사실 지루하기는 마찬가지예요. 그것이 소재의 빈곤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사실, 시에 따라 곡 분위기가 다르면 그럴 필요가 없겠지요. 예를 들면,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는 24곡으로 된 연가곡인데 한 성악가가 피아노 반주에 의해 전체를 다 불러요. 물론, 그때 무대를 들어왔다 나갔다 하지도 않고 한 자리에서 다 부르거든요. 그래도 전혀 지루하지가 않아요. 24곡의 분위기가 다 다르거든요. 그런 차원에서 소재의 다양성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이시환 : 아, 그렇군요. ‘소재의 빈곤’과 ‘소재의 다양성’이라는 말씀을 해 주셨는데 매우 중요한 얘기이지요. 사람의 욕구와 기대가 다종다양해져 가는데 그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소재 개발은, 다시 말해 소재의 다양화는 절대적으로 필요하지요. 아니, 필요하다기보다 자연스럽게 소재가 다양해져야지요. 그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봅니다. 시(詩)에서도 마찬가지이거든요. 그렇더라도 ‘소재주의’는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제가 말하는 소재주의란 특별한, 기발한 소재를 선택하여 그것을 노래하는 것으로서, 그것을 시로 쓰는 것으로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으려는 태도나 경향 말입니다. 물론, 소재를 선택하는 안목도 작가의 능력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동일 소재를 가지고 시를 썼을 때 그 시들을 동일 조건에서 비교해보면 개별적 차이가 현저히 나게 됨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작가의 역량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작품 한 편 한 편의 완성도와 그 품격을 위해서 노력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저는 개인적으로 해왔습니다.
제가 시를 공부할 때 ‘진달래꽃’을 노래한 시인들의 시를 다 모아 책상 위에 펼쳐 놓고 읽어 보면 시인마다 다른 개성과 문학적 역량이 많이 다름을 체감할 수 있듯이 저는 가곡에서도 노랫말과 곡과 연주라고 하는 삼 요소의 궁합이 잘 맞아서 작품의 완성도를 최대한 높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노력이 집중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문외한인 제가 가곡을 들을 때마다 노랫말이 된 시를 따라가기에 바쁘다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면은, 다 듣고 나도 무언가 깔끔하게 정리 정돈된 모습으로 시의 메시지가, 그러니까 작품의 주제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아마도, 시가 너무 복잡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은데 어떻습니까? 신달자 시인의 「등 푸른 여자」가 그 한 예가 아닌가 싶습니다만…. 전세원의 「눈물 꽃다발」은 좀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었습니다만…. 이런 문제는 정 작곡가님의 작품만 그렇다고 지적하는 게 아닙니다. 노랫말로서 시(詩)의 문제를 말하는 것뿐입니다.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정덕기 : 작곡을 배우려면 우선 ‘음(音)’을 알아야 해요. 문학에서 글자를 아는 것과 마찬가지이겠지요. 그 외로 화성학, 대위법, 관현악법, 음악형식론 등이 기본 과목이어요. 이것 중에 만만한 것은 하나도 없지만, 저로서는 그중에 음악형식론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음이 하나면 아무런 의미가 없지요. 그러나 음이 두 개가 되면 상대적으로 높낮이가 생기고, 길고 짧음이 생기고, 박이 생기고, 리듬이 느껴지지요. 작곡이란 그것들을 결합해가는 과정이지요. 그래서 가장 잘된 곡은 복잡하고 어지러운 곡이 아니라 음 몇 개로 정리되는 곡이지요. 사실, 베토벤 곡이 위대한 이유는 복잡해 보이지만 음 몇 개로 정리되기 때문이지요. 저도 그렇게 곡을 씁니다. 음 몇 개로 다 분석이 되지요. 이유 없는 음이 하나라도 나온다면 그 곡은 실패작이지요. 물론, 그 위에 가요형식, 복합3부형식, 변주곡형식, 론도형식, 소나타형식 등이 있기는 하지만요.

이시환 : 저는 노랫말로서 시(詩)의 문제를 말씀드렸는데 작곡가님은 곡(曲)을 짓는 입장에서 노랫말에 소리의 옷을 입히는 방법상의 어려움 내지는 기술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래전에 김소월 시인의 「초혼」과 「진달래꽃」을 듣고 제 나름의 촌평을 한 적도 있습니다만 우리가 자주 읽어서, 아니 학창시절에 교과서를 통해서 배워 알고 있기에 친숙해져 있을 뿐 노랫말로서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 시인의 유명세를 등에 업고 너도나도 곡을 써서 연주하는 것을 보고 이것은 아닌데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우리 가곡이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가고, 널리 애창(愛唱)·애청(愛聽) 되려면 노랫말부터 정제될 필요가 있다고 저는 생각해 왔습니다만 정 작곡가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정덕기 : 사실, 저는 김소월 님의 시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아요. 역사적 산물로서의 김소월이라면 인정할 수 있지만, 시 그 자체를 좋아하지는 않아요. 그러나 정형시가 많아 아무 생각 없이 곡 쓰기에는 아주 편해요. 그 이상은 아닌 것 같아요.
이시환 : 아,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어젯밤에 잠을 이룰 수 없어서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 연가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었습니다. 제럴드 무어 피아노 반주에 바리톤 피셔 디스카우 음성으로 들었습니다만 첫 곡 「안녕히」에서부터 스물네 번째 마지막 곡「거리의 악사」까지 다 들으면서 몇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말 가곡을 듣다가 독일어 발음으로 슈베르트의 연가곡을 듣게 되니 무엇보다 우리말과 독일어의 음성학적 측면에서 많이 다름을 느꼈습니다. 그 다름이 노래의 맛깔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을 체감 확인했습니다. 저는 독일어를 모릅니다만 굴러가는 듯한 유성음 발음과 강약이 비교적 명료해, 비록, 노랫말의 의미는 지각할 수 없었지만, 듣기에는 아주 좋았습니다. 게다가, 스물네 곡이 모두 다르기에 편 편이 달라지는 변화 속에서 즐거움을 누릴 수도 있었습니다. 물론, 다 듣고 나서 우리말 번역 가사를 좀 살펴보았습니다만 그 의미를 배제하고 들어도, 솔직히 말해, 약간의 인내심이 요구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들을만했습니다. 흐르는 시냇물 소리처럼 속삭이듯 하다가도 격랑이 일기도 하고… 저로서는 아주 낯선 경험이었습니다. 소리 연주자인 바리톤 피셔 음성도 차분하고 제 귀에는 듣기에 좋았습니다. 덕분에 문장을 주무르는 사람이 말로만 들었던 슈베르트의 연가곡을 다 들어보았다는 사실인데요, 어쨌든, 정 선생님께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또 생각한 것은, 노래를 들으면서, 문화의 차이랄까 노는 방식의 차이랄까 그런 차이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는데, 부연하자면, 이분들은 실내에서 조용히 노래를 들으며 사유하고 상상하는 생활 속의 문화를 가꾸어 왔다면 우리는 그냥 밖에서, 야외에서 단순한 타악기 중심의 연주와 함께 노는 생활 속 문화를 가꾸어 왔지요. 사물놀이가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듯, 우리가 일상 속에서 대중가요를 듣기도 하고, 가곡을 듣기도 하는데, 이것은 삼겹살을 먹느냐 비프스테이크를 먹느냐의 차이처럼 우리의 기호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건에 따라, 다시 말해, 개인의 관심, 기질, 지식, 감정발산 내지는 표현 방법, 생활환경 등의 차이로 자연히 생기는 ‘노는 법’이 달라진다고 생각했습니다. 탁계석의 「와인과 매너」에서도 나왔지만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포도주의 빛깔과 향기를 연인과 사랑을 속삭이듯이 천천히 음미하는 것도, 논밭에서 힘들게 노동하느라 배고픈 데다가 몸조차 노곤 노곤해진 상태에서 막걸리 한 사발 벌컥벌컥 들이키는 것도 다 삶의 조건이 다른 상황에서 나온 일종의 노는 법, 먹는 법, 즐기는 법의 차이 곧 문화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한 편의 시를 목청 돋우어 노래 부르는 것을 즐기며 듣는 것도 노는 법이고, 스물네 곡을 연속으로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나름 공감하면서 상상하는 이들의 삶의 양태도 노는 방법일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 가곡도 어떻게 부르고 어떻게 즐겨야 하는지를 자연스럽게 모색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 작곡가님은 서울에서 대학과 대학원 수업을 마치고 독일로 유학까지 가셔서 음악공부를 하셨으니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 공연을 현장에서 보고, 느끼고, 또 곡 분석도 했을 터이고, 그런 생활문화 내지는 음악적 양식 곧 노는 방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왔으리라 판단됩니다만 어떻습니까?

정덕기 : 저가 최고로 생각하는 음악회는 박수가 없는 음악회입니다. 저는 박수가 없는 음악회를 몇 번 경험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겨울 나그네」를 독일 카를스루에에서 들었을 때입니다. 24곡을 다 듣고 난 후 그 누구도 박수를 치지 못했습니다. 아니, 칠 수가 없었습니다. 슈베르트의 다양한 24곡의 음악 성악가와 피아니스트의 멋들어진 표현력, 그것 때문에 그 누구도 그 정적을 깨뜨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음악애호가라면, 아니 사람이라면 그런 경험을 한 번쯤은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슈베르트 가곡은 분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가곡은 분석이 되질 않는 겁니다. 이제 우리 가곡도 이론에 정통한, 시에 충실한, 음악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이시환 : 아, 좋은 말씀입니다. 정품과 유사품은 다른 법이지요. 최소한의 기능은 같을지 몰라도 머지않아 다름을 알게 될 것이니까요. ‘박수 없는 음악회’라…. 공연을 막 마치었지만, 그 여운이 진하게 남아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가만히 눌리어 있는 상태, 그런 분위기를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청중의 몰입된 태도, 그리고 공감이 만들어내는 압도적인 연주와 호흡에 감동된 나머지 그곳에서 빠져나오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요.
이제, 우리 가곡에 대해서 좀 얘기해 볼까 합니다. 저는 가곡을 들으면 상당수가 그 노랫말의 의미가 지각되지 못합니다. 저도 ‘왜 그럴까?’ 생각해 보았는데 첫째는 저의 지각능력 부족을 들 수 있고, 둘째는 음의 고저장단이 단어나 어구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데에 있을 수 있고, 셋째는 노랫말에서 의미 전개 자체가 잘못되었거나 주제를 부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실제로, 먼저 주어진 노랫말을 읽고 이해하는 과정을 거친 뒤 곡을 쓰시는 작곡가님 생각은 어떠신지요?
정덕기 : 우선 두어 번 시를 읽으면 내용이 파악되고, 그 내용에 의해 주제(Thema)에 피아노의 음악적 무늬(Figure)를 상상하여내고, 그다음은 시에 맞추어 악구를 만들고, 악절을 만들고, 그 후 어떤 형식을 만들고… 뭐 그런 형태로 작곡을 합니다. 어떤 분은 우선 노래 선율을 먼저 만들고 피아노 반주를 붙이는데 저는 일체형으로 같이 합니다.
그렇게 하는 사이에 언어의 악센트, 고저장단, 시의 내용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간단하지가 않아요. 우리 언어는 서양 알파벳과는 달리 음절문자이어서 100% 맞지 않아요. 하지만 최대한 맞추려고 노력하지요. 시의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시환 : 아, 그렇군요. 작곡가의 작업실 풍경이 그려집니다. 제가 시를 쓰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가곡의 노랫말에 문제가 많다고 느껴왔고, 그래서 자주 지적하는데요, 노랫말로서 흠결이 없는 정품(正品)을 넘어서서 내용이나 정서 면에서도 정제된 정품(精品)을 선택해 곡을 지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것이 현실적으로는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저는 시가 노랫말로서 반듯하면 작곡가가 곡을 쓰기에도 한결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그래야 곡으로서도 반듯한 정장(正裝)이 입혀져서 시와 곡이 어울리지 않을까 해서요. 시에서부터 파격(破格)이 많으니 자연히 곡도 파격이 많아지게 되고 그럼으로써 들어도 무슨 소린지 거리감만 더 생기어 대중으로부터 외면받는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덕기 : 저도 정형률로 된 시가 곡으로 만들기 편합니다. 이미 형식이나 악절이 다 나와 있거든요. 그러나 이런 시에도 단점은 있습니다. 작곡이 매너리즘(mannerism)에 빠지기 쉬워요. 상상력을 발휘하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오히려 산문시 같은 것을 좋아합니다. 글자가 잘 맞지 않을 때 궁리하게 되고 또 다른 아이디어를 찾게 되어 저도 놀라는 음악이 되거든요. 물론, 이때도 악절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아요. 악절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문장이 되지 않는 글처럼 되어버리거든요.
이시환 : 예, 공감합니다. 아주 구체적인 얘기 감사합니다. 작곡가는 작곡가로서 애로가 있겠고, 문제를 타개하려는 창의적인 노력도 모색하리라 생각됩니다. 실은, 정 작곡가님께서 일전에 보내주신「우리 예술가곡의 문제점」이란 글을 분석적으로 읽어 보았습니다. 저는 그 글에서 작곡가가 얼마나 세심한 신경을 쓰고 있는지 ‘작곡가의 고민’을 새삼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정덕기 : 「우리 예술가곡의 문제점」이란 제 글은 음악잡지 「음악저널」 2011년 4월호에서부터 11월호에 걸쳐 연재했던 것입니다. 의욕을 갖고 연재했습니다만 반응이야 ‘그저 그랬어요.’ 몇 분 전화 오는 정도였습니다.
이시환 : 그렇군요. 음악인들이 보는 전문잡지의 연재를 통해서 우리 가곡의 문제점들을 일일이 지적하기도 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는 글을 적지 아니한 음악인이 보았을진대 몇 분이 전화했다는 것은 아주 큰 반응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글을 읽고 부러움을 느끼면서 한 수 배워도, ‘나는 못 썼는데 당신이 써’라고 하면서 경쟁심리가 작동되거나 질투해도, ‘야, 이거 정말 요긴한 가르침이네’라고 감탄해도 대개는 무반응이거든요. 다들 속으로 새길 뿐이지요. 여담입니다만 제가 언젠가 최영미 시인의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에 관한 신문 기사가 4대 일간지가 앞다투어 보도할 때 제가 평문 하나를 발표했었는데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신동한 문학평론가를 비롯하여 몇 분의 문사들이 전화를 걸어와 ‘잘했다’, ‘내 속이 다 후련하다.’ 등의 말을 했었거든요. 생각건대, 아마도 작곡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리라 판단됩니다.
지금에서야 읽게 된 저도 정 작곡가님의 글을 읽으며 많은 생각을 했으니까요. 작곡가께서 노랫말인 시를 어떻게 인지하고 있는지, 실제 작곡하는 과정에서 시의 의미를 혼란스럽게 하거나 시의 분위기나 의미를 헤아리지 못하고 상투적으로 작곡하는 경향을 지적한 점이나, 제4장이었던가요? 시의 주제와 피아노 반주의 조화 등의 문제를 언급하셨는데 시인으로서 작곡가의 고민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조금 생각이 다른 점도 없지는 않은데 특히, 가사와 곡의 일치성에 대해서는 시를 짓는 사람으로서 저도 한번 정리해 보고자 하는 의욕까지 생겼으니까요.
정덕기 : 이 시인님의 말씀처럼 제 글이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미치어 좋은 곡을 짓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영광이지요. 감사합니다.
이시환 : 이제 다시 분위기를 좀 바꾸어 볼까요. 저는 그동안 정 작곡가께서 작곡한 가곡 600여 곡 중에서 열한 곡을 두세 번씩 반복적으로 들었습니다. 자꾸 듣다 보면 더 친숙해지지 않을까 싶고, 그 특징이나 보완점도 같이 짚이지 않을까 해서였습니다. 물론, 600여 곡 가운데 11편은 너무 적은 표본이지만 이런저런 이유에서 선택된, 정 작곡가님의 음악 세계를 이해하는 단초(端初) 같은 곡들이기에 이들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판단되었습니다. 그 목록을 먼저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①액면가(윤준경 작시) ②라면 한입(김필연 작시) ③등 푸른 여자(신달자 작시) ④눈물 꽃다발(전세원 작시) ⑤정물화(김영선 작시) ⑥시래기(유영애 작시) ⑦살다 보면(임승환 작시) ⑧된장(탁계석 작시) ⑨와인과 매너(탁계석 작시) ⑩노을 속을 걷다(이명희 작시) ⑪구름 같은 인생아(유경환 작시) 등입니다.
노래 감상자로서 그리고 시인으로서 느낌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을 받아들이신다면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조금은 일방적입니다만…. 제 기억력이 좋지 못함으로 메모를 보면서 말하겠습니다.
「액면가」는 어떤 상품의 액면가가 아니고 화자(話者) 자신의 액면가(額面價)입니다. 언제나 깎이고 싸게 쳐지는 내 인생에 대한 액면가, 아주 재밌게 들었는데 한 번쯤 생각게 하는 진중함도 느껴졌습니다.
「라면 한 입」은 아들과 아빠의 라면 사랑 얘기처럼 들리는데 라면 한 그릇을 놓고 아들과 아빠의 관계가 잘 그려진 산문입니다. 상황 묘사력이 연극에서의 한 장면처럼 뛰어납니다. 피아노와 소리 연주자가 호흡을 맞추어 잘 어울리는 것 같았습니다.
「등 푸른 여자」는 신달자 시인의 시(詩)인데 그렇게 단순한 시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 너른 바다와 파도를 떠올리고 그 무거움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야 하는 어족(魚族)을 전제해 두어야 하지요. 그런 다음, ‘세상’이라는 바다가 내 몸에 올려져 있는, 그 세파(世波)를 헤쳐나가기에는 너무 버겁고 너무나 힘든 여자의 삶을 빗대어 놓았습니다. 얼핏 들으면, 이 둘이 단순히 나열된 것 같으나 단순 나열이 아니라 관계 지워져 있지요. 바다에서 힘들게 싸우듯 몸부림치며 살아가는 물고기와 인간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힘들게 살아가야 하는 여자를 오버랩해 놓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둘이 합쳐져서 ‘등 푸른 여자’가 되었는데 노랫말로서는 조금 복잡한 면이 없지 않으나 피아노가 비교적 잘 이끌어가며 받쳐 주고 있습니다.
「눈물 꽃다발」은 분위가 사뭇 다릅니다. 피아노에 바이올린이 추가되었지요. 잊지 못하는 연인에 대한 그리움이랄까, 더는 다가갈 수 없는 사랑이라 눈물 꽃다발을 보내야 하는 슬픈 사랑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수식어 남용이 오히려 노랫말의 의미를 단절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주제 부각에서 좀 아쉬웠습니다. 너무 화려하게 치장한 여인의 장신구와 복장이 오히려 그녀의 진심을 가리는 형국이라고 빗대어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물화」는 하늘의 달이 하늘의 ‘구멍’으로, 그 구멍이 ‘빈 공간(空間)’으로 환치되면서 채워야 하는 인간의 욕구로까지 연계되어 있습니다. 그 채우는 것을 ‘눈물’로 받았는데 시적 화자의 사유가 정물화 속 화병의 꽃으로 머물면서 슬픔이 강조되었지요. 죽어간다는 이유에서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정물화를 들여다보듯, 구도에 갇혀있는 사물들의 관계를 서로 잘 알고 있지만 말하지 않는 ‘침묵의 공간’이라는 표현으로 귀결시켰습니다. 이 노랫말을 쓴 시인의 내면적 정신세계와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은 매우 흥미로우나 한 편의 시에서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했던 주제를 부각하지는 못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러나 생각게 하는 여지 곧 그 공간이 크게 확보되어 있어 함축적 상징성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시래기」는 좋은 소재입니다. 노랫말도 참 좋습니다. 무청이 시래기나물이 되어 밥상 위로 올라오기까지 과정이 설명되면서 최종적으로는 ‘고향의 푸른 맛’이라고 의미가 부여되었습니다만 정말 ‘푸른’ 맛일까요? ‘푸른’이라는 시어가 제게는 걸렸습니다. 무청의 색깔을 드러낸 말이긴 하지만 시래기나물의 맛을 ‘푸른’으로 받은 것은 조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두 차례 추임새 같은 후렴은 오히려 없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개인적 판단이 들었습니다. 특히, ‘된장과 눈맞은 속 깊은 사랑’이라는 어구는 함의가 깊고 정감도 살아있습니다. ‘아름다운 우리네 사랑’으로 받은 것도 좋습니다. ‘어머니의 허기진 삶처럼 눈물같이 달라붙은 시래기 한 줌’ 등의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살다 보면」은 살면서 느끼는 고난, 힘듦, 고통 등을 위로해 주는 노랫말입니다. ‘살다 보면 이런 일, 살다 보면 저런 일’이라는 함축적인 표현이 돋보입니다. 이에 버금가는 표현으로 ‘살다 보면 살다 보면 다 살아진다’라는, 조금은 어색하지만 새기어볼 만한 표현이 있습니다. 이런 함축적 표현이 좋습니다. 말은 단순하게 그리고 간결하게, 그 함의는 깊게 하는 것이 노랫말의 생명이라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하는데 모르겠습니다.
「된장」 그리고 「와인과 매너」는 노랫말에 비하면 곡이 너무 화려합니다. 솔직히 노랫말은 유치하나 곡이 화려한, 귀티 나는 포장지를 씌워주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노을 속을 걷다」는 소리 없이 웃으며 들을 수 있었습니다. 중년에서 노년으로 가는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는 내용이지요. 여기서 ‘노을’은 ‘늙어가는 사람의 시간’ 혹은 ‘시기’를 빗댄 말인 것 같습니다. 노랫말에서처럼 젊은 날과 다르게 ‘쉬엄쉬엄’과 ‘조심스러운 연습’이 필요한 시기이지요. 그러나 ‘꽃내음이 도발한다’라는 다소 생경한, 젊은, 의욕적인 표현으로 시작합니다만 전체적으로 보면 무난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름 같은 인생아」는 대중가요 최희준의 「하숙생」을 닮아있습니다. 노랫말만을 보면 하숙생이 더 깔끔합니다. 여기서는 ‘바람’과 ‘구름’이 키워드로 쓰이고 있습니다만 ‘인생’과 ‘행복’이라는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끌어 들여져 있습니다. 후반부에 삶과 죽음이라는 말과, ‘섞는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부자연스럽게 다가왔습니다. 철학적 함의를 부여하려는 시인의 욕심이 반영된 듯 보입니다.

저는, 위 열한 곡을 조용한 시간에 차례로 쭉 들어보는 기회를 가졌습니다만 비교적 한 편 한 편이 귀에 들어왔습니다. 그렇다고, 아주 흠결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보다 곡의 문제가 아니라 노랫말이 조금씩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문장을 주무르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껄끄러운 시어 선택과 부자연스러운 표현, 하나의 주제로 모이는 전체적인 질서 등이 본능적으로 제겐 지각됩니다. 쉽게 말하면, ‘기승전결’이라고 하는 최상·최고의 질서가 깨어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시를 해독, 재해석하는 과정을 거치는 작곡가는 나름대로 소리의 길을 내느라 많은 공을 투자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시에 곡이 얹어진 듯한, 그래서 부족한 함량의 시에 곡이 크게 도움을 주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밋밋한 시 문장에 감정이 적절히 드러나도록 고저(高低)·장단(長短)·완급(緩急)·청탁(淸濁) 등의 요소로 얽어진 소리를 얹었으니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작곡가는 스스로 선택한, 혹은 타자에 의해서 주어진 시를 가지고 이해 공감하는 과정을 거친 뒤 주관적으로 이해한 그 내용을 음악적으로 재구성해 놓는 과정을 즐긴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의 음악적 역량을 실험하고 발휘하는 즐거움과 배설의 기쁨을 함께 누렸겠다는 상상도 해보았습니다.
다양한 소재를 통해서 대중의 기대나 욕구에 부응하는 노력도 엿볼 수는 있었습니다. 가곡의 외연 확장이라고 할까요, 긍정적인 공과도 분명히 있다고 봅니다. 특히,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 경험하거나 가까이하지만, 그 본질에 대해 깊은 사유를 하지 못하다가 그 의미를 끄집어냄으로써 우리의 생활문화에 철학적 의미를 불어넣는 노력도 함께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쨌든, 피아노가 말을 하는 것 같았고, 피아노가 우리를 어디론가 이끌고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면서 밤새워 듣는 우리 가곡에서 저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정품(正品)을 넘어선 정품(精品) 시(詩)에 정장(正裝)의 가곡(歌曲)을 입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훌륭한 노랫말을 먼저 내놓는 일이 요긴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저처럼 시를 쓰는 사람의 노력이 우선되어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제 말이 너무 장황했지요? 작곡가님의 생각과 다른 점이 있더라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가끔 노래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개인적으로는 조용한 시간에 노래를 들으면서 위로받거든요.
정덕기 : 저의 곡을 전부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시환 : 조금 전에 제가 ‘정품(精品) 시(詩)에 정장(正裝) 가곡(歌曲)’이란 말을 했습니다만, 듣기에는 시인 작곡가 여러분의 기분이 나빠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이해해 주시리라 믿고, 평소에 우리 가곡 노랫말에 대해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으로서 이상적인 노랫말로서 시를 얘기할 필요가 있는데요, 이 문제에 관해서는 평생 시를 써온 제가 말하는 편이 옳겠지요?
정덕기 : 우리 작곡가들은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주어진 시를 가지고 나름대로 그에 맞는 곡 짓기를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곡이야 작곡가의 문제이지만 노랫말은 시인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시인님께서 말하는 노랫말로서 ‘정품(精品) 시(詩)’가 어떤 것인지 저도 관심이 많이 갑니다.
이시환 : 노랫말로서 ‘시의 정품(精品)’이란 말을 했으니 그 정품이 무엇인지를 설명함으로써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겠지요.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이 필요합니다만 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시에는 주제가 하나이어야 합니다. 둘이 나란히 병립되어서도 안 됩니다. 시의 모든 이야기는 그 하나의 주제로 귀결되어야 합니다. 이 주제는 시인이 궁극적으로 드러내어 말하고자 함이며, 동시에 노래를 불러 대중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최종의 메시지이지요.
그런데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은 양각(陽刻)과 음각(陰刻) 두 가지가 있습니다. 양각은 조각에서 볼록 튀어나오게 하는 것처럼 주제를 겉으로 드러내어 강조하는 것인데, 의미를 설명하거나 기술하는 문장에서 많이 쓰입니다. 그리고 음각은 시 전문을 통해서 그러니까, 시 전문은 어떤 상황을 묘사했거나 그 묘사한 내용으로 정작 말하고자 함을 환기해주거나 떠올리게 할 뿐 그것을 직접 지시하거나 단정하지는 않습니다. 미루어 짐작게 하고 느끼게 하지요.
양각이든 음각이든 그것은 주제를 드러내 놓은 결과로서 ‘양태(樣態)’라고 한다면 그 하나의 주제를 말하고 강조하는 데에는 일정한 ‘순서(順序)’랄까 ‘질서(秩序)’가 있는데 이것이 또한 중요합니다. 쉽게 말해, 무엇을 주장하고자 할 때 주장하기 위해서 말을 개진해나가는 과정이 있듯이 한 편의 시에서 정작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서 일정한 질서를 탄다는 뜻입니다. 그 질서가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기승전결(起承轉結)’이라고 하는 가장 경제적이면서 가장 탄력적인 방법 곧 길입니다.
기승전결에는 군더더기가 있을 수 없지요. 시인의 욕심이 많아지거나 정작 드러내고자 하는 바가 잘 정리되어 있지 않으면 군더더기가 자꾸 붙게 되어 있습니다. 이 기승전결은 시가 몇 행이든 관계없이 정상적이라면 따를 수밖에 없는, 가장 간단한 방식으로 자신의 의중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최적화된, 일종의 기본 틀입니다. 물론, 노랫말이 기승전결을 타고 있을 때 곡도 같이 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체적인 흐름을 타지 않고 지엽적인 부분에서 곡을 너무 화려하게 치장하면 전체적인 주제 부각을 방해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사실, 주제는 한 편의 시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고, 나머지 모든 문장은 그 키워드를 향해서 사방에서 모여드는 형국이 됩니다. 결과적으로 키워드가 많으면 많을수록 집중력을 분산시켜 놓기에 좋지 않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시 문장에서 어순(語順)과 선택되는 시어(詩語)는 너무 중요합니다. 같은 의미의 문장이라고 해도 어순이 도치되면 강조되는 낱말이 바뀌게 되면서 호흡도 바뀌게 됩니다. 시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데 시인 개인의 어휘력 문제이기도 하고, 동시에 언어 감각 문제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절절한 사랑을 느끼도록 하는 문장으로 사랑 노랫말을 짓고 싶습니다. 시인으로서 일종의 목표이지요. 천명(天命), 고독(孤獨), 혁명(革命), 사랑, 영원(永遠) 등의 굵직굵직한 시어(詩語)들은 함부로 쓰면 역효과가 나지요. 평이(平易)한 시어로도 얼마든지 자신의 의중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문장은 쉽고 절실하게, 구조는 단순하게, 그리고 내용은 깊게, 의미심장하게 하는 것이 노랫말의 기본이자 목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시에 담기는 정서는 보편적인 것일수록 공감의 파장이 크겠지요.
두서없는 저의 주장은 별도로 구체적으로 집필되어야 하겠지만 아직 검증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앞으로 제 시에 곡을 붙여서 확인하고픈 심정입니다. 그리하여 정 작곡가님처럼 노랫말에 대한 각론을 쓰고도 싶습니다.
정덕기 : 사실, 좋은 시를 만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요. 왜냐하면, 시인의 상상력 위에 작곡가의 상상력이 보태어지니까요. 시인의 상상력이 빈약하면 그만큼 작곡가의 상상력도 빈약해지지요. 그래서 작곡가로서도 좋은 시를 만나고자 합니다. 또한, 한문으로 된 문장, 추상명사 등은 작곡이 되었을 때 잘못하면 어색해집니다. 보통명사가 좋지요.
그러나 아이니컬하게도 좋은 시에 곡을 붙이면 늘 좋은 곡이 되어야 하고, 보통의 시에 곡을 붙이면 보통의 곡이 되어야 하는데 반드시 그렇게 되지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곡 쓸 그 때의 컨디션, 상상력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시환 : 정 작곡가님, 정말 감사합니다. 정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을 곰곰이 새겨 저도 노랫말로서의 좋은 시란 어떤 시인가? 탐구 과제로 삼고 반드시 각론을 써보겠습니다.
30년 만에 작곡가님을 다시 만나게 된 현장에서 작곡가님이 제게 한 말에 제가 잠시 꽂혔었습니다. ‘이제 정년퇴임(停年退任)하고 앞으로 10년 동안은 새로운 음악 인생을 살고 싶다’라고 했을 때 의욕과 희망이 제게 전이(轉移)되었으며, 무언가 공통 관심사에 관해서 얘기할 수 있겠다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600여 가곡을 포함하여 천여 곡을 쓰시고 간단없는 활동을 해오셨는데 그간에 익히고 터득하신 음악적 역량을 발판 삼아 제2의 도약(跳躍), 아니 비상(飛上)이 있기를 축원하겠습니다. 저도 우리 가곡을 자주 들으며 응원하겠습니다.
그리고 음악에 대해서 무지한 제가 노랫말에 초점을 맞추어 질문했는데 너그럽게 잘 받아주시어 감사합니다. 부디, 정 작곡가님 하시고자 하는 일에 성취가 있기를 기대하면서 저도 시인으로서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덕기 : 어느 예술잡지사에 나가서 일단 저의 정년은 앞으로 10년, 그러니까 75세까지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 10년 동안 매년 교향곡 1곡, 오페라 1곡을 쓸 예정이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그렇게 해 보고 싶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응원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시적 상상력이 그 누구보다도 많으신 선생님을 만나 정말 즐거울 것 같습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작곡가 정덕기(鄭德基 : CHUNG, Duk-Kee)
오페라, 오라토리오, 칸타타, 관현악곡, 실내악곡, 가곡, 합창곡, 교회음악, 동요, 행사곡, 각종 편곡 등 1,000여 편 작곡, 이 가운데 가곡이 600편 있음.
백석대학교 문화예술학부 교수 역임.
시인 겸 문학평론가 이시환(李是煥)
시집, 문학평론집, 여행기, 종교적 에세이집, 명상법 등 33종의 개인 저서
동방문학 발행인 겸 편집인
장석용 문화전문위원(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