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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치유하는 영화(30)] 장기 기증에 감사하며 또 하나의 가족 인연 만들어 가는 영화 '투하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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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치유하는 영화(30)] 장기 기증에 감사하며 또 하나의 가족 인연 만들어 가는 영화 '투하츠'

영화 '투하츠'.이미지 확대보기
영화 '투하츠'.
최근 지인에게 너무 오래 잊고 지낸 것 같아서 안부 전화를 하려는 찰나 상대가 먼저 전화를 해왔다. 신기한 우연의 일치가 아닐 수 없다.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기에 그는 잊어서는 안될 존재였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먼저 안부 전화를 하여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전하려고 했던 필자로서는 다소 머쓱했다.
이럴 때 '먼저 전화하려고 했는데 텔레파시가 통했다'라고 말해주는 것이 최선이다. 필자는 이러한 경우가 많아서 텔레파시의 존재는 확실히 믿는다. 사람간의 사소한 만남이나 거창하게 표현하는 인연도 텔레파시가 전제된 것이 아닐까?

이번에 소개하는 영화 '투하츠'는 장기기증을 소재로 한다. 유사한 소재의 영화가 많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좀더 특별한 것 같다.

다른 기증받은 사람들보다 영화에 등장하는 기증을 받은 주인공은 어려서부터 폐가 안 좋아 오래 못산다는 진단을 받을 정도로 건강 문제가 심각했다. 인생의 황금기에 다시 살아난 것을 잊지 않고 많은 노력을 기울여서 기증자 가족을 만난다.

그러면서 영원히 감사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또 하나의 가족의 인연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 가슴에 와 닿는다.

영화에서는 우선 기증자인 갓 20대에 접어든 대학생 주인공의 활달한 모습과 화목한 가정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그리고 기증자의 첫사랑의 설렘 등 아주 행복한 모습들을 보여주며 나중에 겪게 될 극한의 슬픔과 대비시킨다.

갑자기 닥친 뇌질환으로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의 건강한 신체는 그와 가족들의 결심으로 타인에게 기증하게 된다. 다른 주인공은 기증받은 40대 사업가이다. 이민자 출신으로 성공한 사업가의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기증자처럼 완벽한 행복을 누리지는 못한다.
어려서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자신과 가족들은 알고 있었다. 하루가 마지막인 것처럼 치열하게 살아서 각고의 노력으로 사업을 성장시켰고 결혼하고 싶은 이상형의 여자를 공항에서 운명적으로 만난다.

하지만 자신의 건강상태를 알기 때문에 행복이 커질수록 불안함은 더해만 간다. 영화에서는 두 주인공들의 행복한 모습을 교차 편집으로 보여준다. 이들의 불행은 서로 다른 모습으로 찾아왔다. 기증자에게는 뇌쇼크라는 갑작스런 불행이 닥쳤고 다른 주인공은 지병이었던 폐질환의 악화는 언제가 될지는 몰랐지만 예견된 위기였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인생의 절정기에서 너무나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운명이었다. 다른 시기에 다른 환경에서 자랐지만 동시에 불행이 두 주인공에게 찾아온 것이다.

그 불행은 장기기증을 통하여 한명에게는 새 삶을 주고 한명은 세상을 떠났지만 또 다른 가족을 만들어주었고 세상에 희망을 만들어 주었다.

원래부터 남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기증자와 가족들은 기증을 통하여 기증받은 가족과 새로운 가족이 된다. 이처럼 장기기증을 소재로 한 영화는 많았지만 '투하츠'처럼 주인공 두 사람의 인생 속으로 깊이 들어간 경우는 드물다.

더구나 인간이면 누구나 갑작스럽게 닥칠 수 있는 불행을 보여주고 장기이식을 통하여 사랑을 실천하는 당사자와 가족의 내면을 잘 보여준다.

엠비씨 제작사의 김흥도 감독은 기증받은 사람의 행동에 흔치않은 영화적인 요소가 있다고 평하여준다. 기증자와 그 가족의 인간에 대한 숭고한 사랑은 이기심을 넘어선 사랑임은 말할 나위가 없지만 그에 못지않은 것은 기증받은 사람의 행동이다.

기증자를 알고 싶어도 시스템적으로 찾기도 어렵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생면부지의 그를 천사 가브리엘이라고 표현하며 진심으로 고마워했다고 한다. 그는 지속적인 수소문 끝에 기증자의 가족을 찾아내고 자신의 행복을 찾아준 감사함을 넘어서 가족처럼 지내고 있다고 한다.

감사함을 잊지 않는 것,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 쉽지 않다. 살아보면 그렇게 하기 쉽지 않다. 당시 느꼈던 감사함의 마음은 세월 속에 묻히면서 당시의 절박함은 희석되고 내가 운이 좋았던 것으로 바뀐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내가 덕을 많이 쌓아서 그런 도움을 받게 된 것으로 여긴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잘한 것이 생각나지 않으면 조상님 덕으로 돌리기도 한다. 죽을 병을 앓다가 살아나면 옆에서 죽도록 간호한 사람들은 기억 못하고 원래 건강하게 태어난 것이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직장 선후배들 도움과 희생으로 승진하여 놓고 자기 잘났다고 하는 사람들 등 셀 수 없이 많은 사례들이 있다. 지금도 주위에 많을 것이다. 아마도 장기를 기증받은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기에 기증받은 것이 아닐까?


노정용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noja@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