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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치유하는 영화(44)] '죽음'이라는 이별을 따스하게 풀어낸 영화 '굿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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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치유하는 영화(44)] '죽음'이라는 이별을 따스하게 풀어낸 영화 '굿바이'

죽음이라는 이별을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일본 영화 '굿바이'.이미지 확대보기
죽음이라는 이별을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일본 영화 '굿바이'.
연어는 강물을 거스르며 온갖 역경을 무릅쓰고 심지어는 죽음을 불사하며 자신들이 태어난 본향(本鄕)을 찾아간다.

지금도 기억에 선명한 어릴 때 키우던 우리 집 강아지도 그러했다. 귀염둥이 강아지는 집 근처에서 엄마 따라 시장을 다녀오던 어린 주인을 보고 길 건너편에서 반갑다며 정신없이 달려오다가 차에 치였다. 하체가 마비된 강아지는 상체로 겨우 기어서 집으로 돌아온 후 눈물을 글썽이며 죽어갔다.

강아지는 자신이 살던 개 집보다는 함께 뛰어놀고 음식을 주던 인간 가족을 보려고 돌아왔음이 틀림없다. 자기 집보다는 키워주던 어린 나이의 필자를 응시하면서 눈을 감았다.

사람들도 그런 것 같다. 공동묘지는 무서워하면서도 돌아가신 부모님이 묻힌 묘지에는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죽고 싶을 때 찾아가서 위로를 찾는다. 그냥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이리라.
곰곰이 생각해보면 태어난 곳은 지리적인 장소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모님이 계신 곳을 말한다. 그분들이 돌아가시게 되면 부모님이 묻힌 곳이 고향이 아닌가 싶다.

한국에서는 장의사를 소재로 한 영화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 '친구'에서 주인공 아버지 직업으로 단편적으로나마 나타난다. 그 유명한 대사 "너그 아부지 머하시노"에서 말이다.

흔히 돌아가신 분을 '망자'라고 표현한다. 어디로 돌아간단 말인가? 그것은 당연히 원래 있던 곳을 의미한다. 원래 있던 곳은 어디인가? 그것은 당연히 부모님이다. 하늘에서 태어났으니 하늘로 돌아가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 한국과는 차이가 나는 장례의식이 있다. 일본 장의사는 가족들 앞에서 망자의 몸을 입관한 후 갈아입을 옷으로 몸을 가리고 정성껏 닦은 후 그 옷을 입힌다. 아주 정성들여 생전의 모습처럼 화장까지 시킨다.

그 정성스러운 모습에 처음에는 장의사를 허드렛일이나 하는 사람으로 존재감 없이 생각하다가 그 모습을 보고 유족들은 대부분 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고 한다. 영화 '굿바이'에서는 죽음을 배웅하는 일본의 장례지도사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그를 통해 죽음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을 다시 갖게 한다. 삶의 마지막 관문인 죽음을 통하여 살아있는 인간들이 다시 이어지는 부분이나 유족들 마음속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기억하게 하여 그 속에서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아내를 먼저 떠나 보낸 남편이 장례지도사가 화장시킨 아내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자신이 본 가장 아름다운 아내의 모습이라면서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 역시 자신이 결국 어린 시절 버림받았던 아버지를 직접 염하게 되는 순간 아버지에 대한 모든 원망을 토해내고 아버지에 대한 증오의 굴레에서 벗어난다.

도쿄에서 유명첼리스트로 활동하던 주인공은 악단이 해체되어 실업자 신세가 된다. 그리고는 가장 설득하기 어려운 상대인 아내의 동의를 얻어 시골 고향으로 돌아간다. 거기서 직장을 구하던 중 여행사인 줄 알고 취업한 회사는 다름 아닌 죽음을 배웅하는 장례지도 회사였다.

아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회사를 몰래 다니다가 들켜서 그녀는 그의 곁을 떠난다. 처음에는 그도 그만두려고 고민하다가 진심으로 감사해하는 유족들과 사명감을 갖고 일하는 사장을 보고 그리고 직접 장례의식을 진행하면서 자신의 일을 가치있게 생각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행방불명되었던 어린 시절 자신을 버리고 떠났던 아버지의 부고를 받는다. 내키지 않지만 자신 말고는 무연고자라는 소식을 듣고 어쩔수 없이 장사지내러 간다. 하지만 가족이 안 오는줄 알고 의례적으로 염습하는 사람들을 보고 그만두라고 한다. 그리고는 그동안 배운 경험으로 자신이 직접 모든 정성을 다하여 아버지의 마지막 가는 길을 준비한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도 놓지 않고 끝까지 손에 쥐고 있던 아들과 추억이 담긴 조약돌을 보고 그가 평생 아들을 생각했음을 알고 회한의 울음을 터트린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시신을 가장 예쁜 모습으로 화장을 시키고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억하도록 한다.

인간의 존재는 다른 사람에게는 기억이나 추억의 형태로 존재한다. 그것이 남들에게는 나의 모습이다. 주인공 역시 낙향하고 나서 고향에 있는 어릴적 놀던 다리 위에서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를 본다.

그가 실직하고 고향으로 온 것은 그가 돌아가고픈 어린 시절 아버지를 기억하기 위해서 그리고 아버지가 자신에게 존재함을 느끼기 위해서이지 고향 마을에 살고 싶어서가 아님을 관객들에게 알려주는 메타포일 것이다.

어떻게 보면 주인공은 망자를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세상에 존재하게 하는 일을 하면서 자신 역시 아버지를 생각하고 자신이 망자가 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들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엠비씨제작전문 자회사의 김흥도 감독은 영화의 전체적인 스토리보다는 관객들 누구나 부모님 상을 당해본 분들은 주인공이 자신의 돌아가신 아버지 얼굴을 차분히 화장하는 모습을 보면 감정이입이 되어 울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면서 너무나 인간의 근본을 향한 본성을 각성시키는 영화라고 극찬한다.

김흥도 감독은 돌아가신 부모님의 기억들은 추억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슬픔이라고 표현한다. 추억이라고 하기에는 훨씬 더 가슴이 아리기 때문이다. 추억이 묻어나는 사진을 보면 미소가 떠오르지만 부모님의 그것은 눈물만 나오는 경험을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금년 봄에는 거기에 대한 영화를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니 기대가 된다. 김 감독의 말을 듣고 보니 만약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부모님을 회상한다면 떠오르는 감정은 추억이라고 하기보다는 훨씬 더 큰 슬픔이다. 가장 표현이 다양하다고 생각하는 우리말에도 표현하기 힘든 단어가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다.


노정용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noja@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