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칩스과학법 제정 통한 재세계화 전략 실행 불구
윤 정부 선제적 파악 못해 일본에 외교 주도권 놓쳐
윤 정부 선제적 파악 못해 일본에 외교 주도권 놓쳐

중국의 첨단기술 확보를 저지하기 위해 선진국들과 ‘비공식 경제 나토’ 같은 대연합을 구축한 다음 첨단기술별로 소자 연합을 만드는 재세계화를 추진한다는 미국의 대전략이 처음 포착된 것은 지난해 7월 미 의회에서 칩스법이 제정되었을 때다. 유관 부처 간 협력체제가 정착되어 있는 일본 정부는 칩스법을 통해 미국의 재세계화 추진 방침을 선제적으로 읽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기시다 총리가 1월 13일 바이든과의 미·일 정상회담에서 동맹국으로서는 가장 먼저 재세계화에 적극적인 참여를 약속함으로써 첨단 반도체 기술 지원과 적에 대한 반격 능력의 자체 제고를 허용받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는 미국의 칩스법 제정에서 재세계화 추진 방침을 읽어내지 못했고 이는 대미 외교에서 우위를 기시다 정권에 빼앗기는 결과로 이어졌다. 한국이 일본과 달리 미국의 재세계화 전략을 선제적으로 읽어내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은 현 정부조직법이 부처 간 칸막이를 용인하는 한계를 갖는다는 데 있다. 부처별로 배당된 업무에 대한 독점이 구조화하고 타 부처들과의 협업은 실종됐다는 비판을 받는 것이다. 그 결과 윤 정부로서는 1·13 워싱턴 미·일 정상회담에서 바이든이 기시다에게 “우리가 어떻게 이리도 다른 점이 없느냐”는 찬사를 하는 것을 영문도 모른 채 멀리서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만약 지난해 칩스법 제정 때부터 외교부와 경제부처들이 긴밀하게 협력해 분석했다면 그것이 재세계화의 서곡이라는 사실을 확인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랬다면 윤 대통령이 기시다 총리보다 먼저 바이든과 만나 재세계화에 대한 주도적 참여를 약속함으로써 전술핵 재배치나 자체 핵무장 추진에 대한 묵인을 얻어내는 외교적 성과를 거뒀을지 모른다. 이 점에서 국가안보실이 외교부와 경제부처들 간 공동 연구가 이루어지도록 구도를 만들었어야 했다. 하지만 외교안보 부처들에 대한 행정적 지휘에 몰두해온 안보실은 그 같은 한계에 갇힌 나머지 외교부가 경제부처들과의 협력 시스템을 만드는 등 전략적 확장을 하지 못한 것이다.
안보·경제 통섭 전략 짜는 부총리급 컨트롤타워가 국가 대전략 맡아야
윤석열 정부가 미국이 올해 들어 재세계화를 본격 추진할 가능성을 선제적으로 읽지 못한 데에는 학계와 언론의 책임도 크다. 지난해 중반 칩스법이 제정되었을 때부터 1·13 미·일 정상회담까지 재세계화로 전 세계가 미·중 첨단기술 패권경쟁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와 권위주의 진영 간 2차 냉전 체제로 급속히 이행할 수 있다고 전망한 논문은 물론 학자들의 기고문도 보이지 않는다. 언론계 사정도 비슷하다. 주요 언론사들의 워싱턴 특파원들 중에서 그 같은 전망을 담은 기사를 쓴 특파원은 찾기 힘들다. 1·13 미·일 정상회담이 재세계화에 합의한 분명한 내용을 담고 있는데도 그걸 읽어낸 특파원이 없는 것이다.
일본이 미국의 재세계화 전략을 선제적으로 읽어낸 뒤 적극적인 참여를 약속해준 것은 미국을 크게 만족시켜 주었다. 이 때문에 미국은 그 후 한·미·일 3국 안보협력의 강화가 필요하다는 의제를 제기하면서도 일본에는 부담을 주지 않은 반면 한국에는 과거사 문제 중심으로 한·일 관계의 적극적인 개선에 나서 달라는 보이지 않는 압박을 가해 왔다. 4월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에 앞서 해야 할 ‘숙제’를 내준 것이다. 윤석열 정부가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금을 일본 기업들 대신 정부가 주는 ‘제3자 변제’ 방안을 선택해 한·일 관계 개선을 시도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친일 외교 논란에 직면하게 된 데는 이 같은 배경이 있다.
요컨대 윤석열 정부가 겪고 있는 친일 외교 논란은 미국의 재세계화에 대한 주도적 참여 순위를 둘러싸고 동맹국들 간에 벌어진 대미 외교 경쟁에서 기시다 정권에 선수를 빼앗긴 데서 말미암는 것이다. 제일 큰 문제는 미국이 중국과의 글로벌 및 역내 패권경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대전략으로서 추진하는 재세계화를 일본보다 먼저 읽지 못한 결과 적극적인 동참 약속을 제일 먼저 하는 기회를 일본에 빼앗긴 데 있다. 그러다 보니 한·미·일 3국 협력 강화를 위해 한국도 최선을 다했다는 워싱턴의 인정을 받고자 제3자 변제 방안을 결단함으로써 한·일 관계 개선에 나섰다가 덜컥 친일 외교 논란에 직면하고 만 것이다.
윤석열 정부가 미국의 재세계화를 일본에 앞서 선제적으로 읽어내지 못한 결과는 친일 외교 논란을 넘어서 한·일 간에 글로벌 외교 퍼포먼스의 엄청난 격차로 이어졌다. 이는 한·일 정상회담을 한 지 일주일이 지난 3월 23일 윤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의 대조적 행보에서 확인된다. 이날 친일 외교 논란을 해명하는 데 골몰한 윤 대통령과 달리 바이든의 대중·러 전략 파트너로 ‘신분 상승’을 이룬 기시다는 시진핑 주석이 푸틴 대통령과 만나 반미 연합을 구축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하는 날에 맞춰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전격 방문했다. 일본이 중·러에 대한 ‘이중 봉쇄’에 적극 나섰음을 만방에 과시한 것이다.
이 때문에 외교와 안보, 대북 관련 부처들의 국장급 고위 관계자들과 외교안보 분야 민간 연구원의 중진 학자들은 대미 외교에서 일본에 더 이상 외교적 굴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현 전략 수립 및 집행 시스템을 개혁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개혁 방향은 국가안보실이 전략 수립의 중심 역할을 하지 않고 행정 상부 기관으로서 외교부와 국방부, 통일부를 지휘하는 데만 골몰하고 있는 현 시스템으로부터의 탈피다. 국가전략기획원은 총리실 소속이지만 대통령 직할로 두고 외교부와 국방부, 통일부는 각기 고유 현안을 맡고 국가안보실은 미 국가안보보좌관제로 축소하는 시스템 개혁이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국가전략기획원은 외교안보와 경제 부문을 총괄하는 정부 내 유일한 전략 전담 부처가 되어야 하는 만큼 외교부와 국방부, 통일부 등 외교안보 부처들은 물론 기획재정부와 산업통상자원부 등 경제 부처들로부터도 주요 인력을 공급받아 설립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미·중 간 첨단기술 패권경쟁이 2차 냉전의 주 전선이 되는 경제안보 시대에 외교안보 전략과 경제발전 전략 모두가 국가전략기획원에서 수립될 수 있다. 하지만 이들 정부 부처 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외교안보와 경제 부문의 학계와 연구소의 주요 인력들도 국가전략기획원에 참여시킴으로써 정부지(政府知)와 학계지(學界知)를 융합하는 노력이 요청되는 것이다.

국가전략기획원이 맡을 전략은 5가지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 대전략인데 이는 15~20년 뒤 외교안보와 경제 부문을 총괄하는 국가 발전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다. 2050년 글로벌 3대 강국 도약 같은 비전이 대전략의 명징한 예에 속한다. 국가 대전략을 마련한 뒤 그 기조에 맞춰 경제 전략, 외교 전략, 안보 전략, 그리고 대북 전략 등 4대 전략을 수립해야 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점이다. 5년 단임 대통령제인 만큼 취임 첫해에 이들 5가지 전략을 모두 수립해야 하는 것이다. 국가 대전략의 경우 대통령 임기를 훨씬 넘어선 목표이지만 대전략의 비전을 국민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점에서 취임 첫해에 제시해야 한다.
국가전략기획원 장관은 부총리로 하고 1차관과 2차관이 각각 맡는 외교안보와 경제 부문은 주요 부처들의 인재들을 기본으로 하고 교수들과 민간 학자들까지 참여할 경우 정부 내 전략과 정책 수립 및 집행 기능의 체계가 확립될 것으로 전망된다. 전략기획원은 대통령 임기 첫해 대전략과 각 부문 전략을 수립한 뒤 미 재세계화 같은 변화를 읽어낸 뒤 대응전략을 수립하면 관련 부처들이 이들 전략에 기초한 정책을 입안해 집행하는 시스템이 정착될 것이다. 안보보좌관이 전략기획원과 외교안보와 경제 부처들 간 소통을 지원하고 조정하는 데 충실하면 재세계화에 대한 선제적 읽기 경쟁에서 일본에 다신 뒤지지 않을 것이다.
미국 같은 제국이 백악관에 국가안보보좌관만 두는 것도 전략 수립과 관련 정책 입안은 관련 부처들과 그들의 협력에 맡기고 백악관은 조정만 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미 국가안보보좌관의 이 같은 역할과 달리 전략 수립과 정책 입안을 조정하거나 주도하기보다는 관련 부처들을 행정적으로 지휘하는 역할에만 집중하는 국가안보실 체제가 지속될 경우 재세계화에 대한 선제적 읽기 실패 같은 큰 사고는 물론 작은 사고도 계속될 것이다. 최근 김성한 국가안보실장이 4월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사퇴한 것도 걸그룹 ‘블랙핑크’가 참여하는 축하 행사를 갖자는 미국 영부인 질 바이든 여사의 제안을 관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보도가 확산되는 것도 결국은 전략 전담 부처의 부재가 낳은 비극이다.
대통령이 경제와 외교안보를 자유자재로 총괄하는 의제와 정책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전제한다면 전략 전담 부처의 필요성은 높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같은 능력을 소유한 대통령이 등장하더라도 제도적으로 경제와 안보 부문의 통섭을 통한 전략 수립과 정책 입안 시스템이 부재하는 한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은 근본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는다. 미 현실주의 전략가들인 브랜즈와 베클리가 저서 ‘위험지대’에서 예상하는 바와 같이 미·중 2차 냉전이 군사적 충돌 없이 첨단기술 경쟁으로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경제가 안보를 주도하는 시대가 온 만큼 이 같은 시대에 맞는 전략 수립 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문제는 국가전략기획원 같은 경제와 안보 전략을 통섭하는 전담 부처가 설립되지 않는 한 외교안보 부처들이 경제 부처들과 주기적으로 회의를 열어 세계와 역내 질서가 경제와 안보 간 연계성으로 어떻게 변화하는지에 대해 논의하고 대응하는 노력을 기울일 가능성이 낮다는 데 있다. 미국이 냉전 때부터 오늘날까지 경제와 안보 간 통섭과 융합을 통해 수립된 안보 전략을 추진해 왔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미 경제학자 게리 거슬은 저서 ‘신자유주의 질서의 흥망’에서 미 주류의 이념과 가치, 규범의 합으로서의 ‘정치 질서(political order)’가 지난 100년간 뉴딜 질서이냐 신자유주의 질서이냐에 따라 미국의 안보 전략이 변화해 왔다고 지적한다. 이 점에서 윤석열 정부도 미국처럼 당대의 정치 질서에 부합하는 안보 전략을 추진해야 한다고 본다면 경제와 안보 부문을 통섭해 전략을 수립하는 국가전략기획원의 설립 필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교관 CNBC KOREA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