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표 지원책 뒤집자 배터리·전기차 공장 53곳 '스톱'…일자리 1만3000개 증발
고금리·수요 둔화에 정책 불확실성까지…"중국에 녹색산업 주도권 뺏길 것" 경고
고금리·수요 둔화에 정책 불확실성까지…"중국에 녹색산업 주도권 뺏길 것" 경고

지난 5일(현지시각) 파이낸셜 포스트의 보도에 따르면 최근 몇 년간 수백억 달러 규모의 공장 신설 계획이 발표됐지만, 올해만 최소 53개가 넘는 친환경 제조 사업이 취소됐고 더 많은 사업이 미뤄지거나 규모를 줄였다.
애리조나주 85번 국도 옆 넓은 터는 한때 '메이드 인 아메리카' 제조업 부활의 상징이었다. 수십억 달러짜리 배터리 공장이 들어서 일자리 수천 개를 만들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해당 기업은 "애리조나여, 준비하라"고 선언했고 주지사는 환영했으며 대통령까지 나서서 사업을 치켜세웠다.
◇ 부푼 '녹색 꿈'의 좌초… 계획만 남고 공장은 텅 비어
하지만 4년이 지난 지금, 피닉스에서 한 시간 거리인 신흥 도시 벅아이의 214에이커 터는 비어있다. 근처 주유소 관리인 셸비 리저라가는 "공사를 시작하는가 싶더니 이내 모든 것이 멈췄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사례는 배터리 제조업체 코어 파워다. 이 회사는 벅아이에 12억 달러(약 1조6380억 원) 규모 공장을 짓기로 한 계획을 모두 거두었다. 최고경영자는 자리에서 물러났고, 약속했던 8억5000만 달러(약 1조1602억 원) 연방 대출도 없던 일이 됐다.
좌절된 녹색 야망은 코어 파워만의 문제가 아니다. 매사추세츠에서는 옛 석탄 발전소 터에 들어설 예정이던 풍력 터빈 케이블 공장이 무산됐고, 조지아에서는 공정률 50%를 넘긴 전기차 배터리 부품 공장 건설이 멈췄다. 콜로라도의 한 리튬이온 배터리 업체도 공장 건설 계획을 잠정 보류했다.
◇ 친환경 지원 '급제동'… 트럼프발 세제 개편이 결정타
'유령 공장' 확산 뒤에는 여러 원인이 얽혀 있다. 가장 큰 타격은 트럼프 행정부의 대규모 세제와 예산 법안이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서명한 이 법안은 바이든 행정부가 내놓은 관대한 녹색 지원책을 대거 줄이는 내용을 담았다. 풍력·태양광 생산 세금 혜택을 예정보다 여러 해 앞당겨 없애고, 2032년까지였던 전기차 연방 세금 혜택은 올해 9월에 끝내기로 했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직후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따른 연방 지원금과 대출이 얼어붙거나 취소된 것도 결정타가 됐다. 크리스 라이트 에너지부 장관은 바이든 행정부 때 약속했던 대규모 친환경 제조 공장 대출 일부를 다시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정책의 급격한 변화와 불확실성이 투자 심리를 위축시켰다.
높은 금리와 원가 상승, 전기차(EV) 같은 일부 제품의 수요 증가세 둔화 역시 사업 취소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 "미래 산업에 심각한 해"… 커지는 경쟁력 상실 우려
연구 기관 아틀라스 퍼블릭 팔리시에 따르면, 2021년 이후 발표된 2610억 달러(약 356조2650억 원) 규모의 친환경 공장 투자액 가운데 9%가량이 보류됐고, 이로 인해 2025년에만 일자리 1만3000개 이상이 사라졌다.
과거 바이든 행정부와 민주당은 2021년 초당적 기반시설법과 이듬해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통해 청정에너지 사업에 수천억 달러의 지원책을 약속했다. 그 결과 사우스캐롤라이나, 미시간, 애리조나 같은 곳에 전기차와 배터리 공장 건설 계획이 잇따랐다. 제조업의 부활과 중국에 대한 기술 독립, 그리고 경쟁력 확보가 목표였다.
하지만 공화당이 우세한 지역과 경합주에 사업을 유치해 정치 공세를 피하려던 셈법은 실패했다. 트럼프의 법안에 찬성표를 던진 의원 중에는 벅아이를 지역구로 둔 공화당 폴 고사 의원도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법안에 서명하며 미국 경제가 "로켓처럼 솟아오를 것"이라고 말했지만, 업계의 우려는 크다.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최고경영자는 X를 통해 이 법안이 "미래 산업에 심각한 해를 끼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로듐 그룹의 해나 헤스 연구원은 "미국이 지금 녹색 기술 투자에서 물러서는 것은 다른 경쟁국에 뒤처지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며 "이는 긴 안목에서 경제 성장을 막고 해외 제조업 의존도를 높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의 국제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 위기 속 엇갈린 풍경… 그래도 미래는 온다
에너지 전환 전문 투자은행 마라톤 캐피털의 맷 섀너핸은 "규칙이 바뀌었다"며 "특히 초기 단계 사업들이 큰 위험에 처했다"고 진단했다.
물론 모든 사업이 멈춘 것은 아니다. 벅아이에서 128km쯤 떨어진 퀸크리크에서는 LG에너지솔루션이 30억 달러(약 4조950억 원)를 들여 전기차 배터리 공장을 짓고 있다. 명년 가동을 목표로 공사가 한창이며, 2027년까지 1500명을 고용해 "지역 배터리 생태계에 이바지하겠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유령 공장'은 미국 친환경 제조업의 미래에 대한 엄중한 경고임이 틀림없다. 세금 혜택 조기 종료 같은 정책 변화가 시장의 믿음을 무너뜨리고 있으며, 긴 안목의 정책 일관성과 공급망 안정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청정에너지 전환과 제조업 부흥 모두 어려워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벅아이의 텅 빈 터는 그 상징적인 현장이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