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이관지(一以貫之, ‘한 이치로 모든 일을 꿰뚫는다’)라는 표제를 내건 조선 춤에서 살아남은 민천식 춤방은 「해주수건춤」, 「기본무」, 「화관무」를 전시했다. ‘화관무’를 비롯한 전통춤에 해박한 무용학 박사 차지언(황해도 무형문화재 ‘화관무’ 예능 보유자)이 「해주수건춤」을 김나연 사범과 동무(同舞)하면서 민천식 춤방을 연출했다. 「화관무」가 차지언에 의해 독무로 추어졌고, 현재적 전승 상황을 읽게 해주었다. 기본무(출연: 김소연, 염예주, 여혜연)를 통해 차지언 춤방의 수련 과정을 살필 수 있게 된 것은 참관자의 소득이었다.


차지언의 민천식 평설과 국립국악원 자료로 글을 쓴다. 민천식, 본명 민관식(閔寬植)은 황해도 사리원의 유복한 가정 출신이다. 부모의 권유로 탈춤을 배워, 일곱 살 때부터 봉산탈춤의 애기 탈꾼으로 활약했다. 평양숭실중학교를 졸업한 뒤, 이왕직아악부 아악생양성소에서 이 년 동안 수학하며 궁중 예술을 섭렵했다. 한국전으로 남하하기 전에 그는 해주·개성 권번의 수장이었고, 기생들에게 소리, 춤, 연주 등에 걸쳐 전통 예능을 가르쳤다. 봉산탈춤과 궁중무용을 개작한 전통춤의 교육과 창작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악가무(樂歌舞)에 재담이 출중했던 민천식의 기예(技藝)는 전국적으로 명성이 자자했으며 조선조 마지막 왕비인 순정효황후가 그를 궁(宮)으로 초대하고, 노리개를 하사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신무용가 최승희도 민천식의 권번을 공식 방문해 보름씩 머물며 각종 전통춤을 배워가기도 했다. 경서도 소리에도 뛰어났던 민천식은 일본에서 유성기 음반에 취입하고 민형식(閔亨植)이라는 소리꾼 이름을 달았다. 민천식은 각종 탈과 장구를 직접 제작할 정도로 전방위적으로 손재주까지 뛰어났던 천부적인 예인이었다.

6·25 동란은 황해도지역 예인들이 인천에 정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민천식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민천식은 월남하여 인천 송현동 국제시장 골목에서 국악무용학원(인천국악원으로 개칭)을 운영하며, 권번춤·탈춤·배뱅이굿·서도민요 등 황해도지역의 여러 갈래의 춤과 연희를 보급 및 계승시켰다. 봉산탈춤 연희자 김진옥, 해주탈춤 이근성·양소운과 합심하여 봉산탈춤 복원을 주도한 것은 주목할만한 성과이다. 민천식은 국가무형문화재 봉산탈춤의 예능보유자 지정(1967) 통지서가 도착일에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민천식의 타계 이후 황해도 지역춤의 맥은 김실자, 김정순, 김나연 등으로 이어졌다. 김실자와 김정순이 강령탈춤 예능 보유자로 지정받자, 민천식류 춤의 전승은 자연스럽게 김나연에게 맡겨졌다. 춤사범 김나연은 황해도 무형문화재 「화관무」 명예보유자로서 민천식춤보존회·화관무보존회 대표를 맡고 있다. 그녀는 딸 차지언과 함께 「화관무」, 「해주수건춤」 등 민천식의 대표적 춤을 복원하는데 춤 외적인 문제까지 안으며 눈물겨운 노력을 했다. 이 가운데 「화관무」는 이북5도청으로부터 황해도 무형문화재로 지정(2011) 받았다.
김나연 사범은 민천식을 회고하면서 “민천식은 못 하는 것이 하나도 없는 천재 예인이다.”라고 했다. 제자 김진환(예명 김뻑국)은 민천식은 “장구를 치면 장구가 울고, 북을 치면 북이 울고, 소리를 하면 심금을 울리고, 손을 들면 춤이 되는 사람이었다.”라고 했다. 춤 교습 시에 '눈썹은 기러기 삼자, 반달 같은 눈, 오이씨 같은 버선발에 사부작사부작 걸어가는 모습'을 요구했다. 선생의 춤은 자연적으로 멋이 배어 나왔다. 이번 공연에는 최경만 서울시 무형문화재 삼현육각 예능보유자가 ’구음‘으로 출연하여 춤의 의미를 더했다.


「해주수건춤」(구음 최경만, 춤: 김나연. 차지언), 정확하고 충동적이며 상징적인 민천식의 춤사위가 총합된 춤이다. 사위와 디딤이 섬세하면서도 교태로우며 역동적인 힘이 섞여 있다. 해서지방 특유의 토속적 구음이 어우러진 흥신의 춤이다. ’황해도 자체가 연희하는 문화가 많은 지역이어서 흥의 정서를 지닌 춤이 많았다'라고 한다. 반주도 풍류 음악인 듯 하고 수건을 잡고 뿌리는 동작도 독특하다. 이 춤은 발디딤새, 호흡법, 손목 꺾기, 수건 뿌림, 반주음악 측면에서 기존 ‘수건춤’이나 ‘살풀이춤’과 차별화된다.
「기본무」(춤: 김소연, 염예주, 여혜연), 민천식 ‘기본무’는 선생의 장단에 따라 동작을 연결하는 방식이었다. 김나연 사범이 학습 당시 ‘기본무’의 명칭은 타령장단에 맞춘 ‘타령춤’, 굿거리장단에 맞춘 ‘굿거리춤’이라 불리웠다. 민천식 ‘기본무’는 전후좌우를 고르게 활용하고, 원을 이용하여 상·하체 춤사위를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이 특징이다. 김나연 사범은 타령춤을 보여주길 원했지만, 민천식 굿거리춤 음악 복원작업이 진행 중이라서 이번 공연은 굿거리 장단에 맞춘 민천식의 기본 춤사위를 재현했다.


「화관무」(춤 차지언): 해주 권번의 춤사범 민천식은 예기(藝妓)들을 위해 궁중정재와 해서 지방의 민속춤을 섞어 「화관무」를 창제했다. 타령장단은 전후좌우로 춤사위가 똑 떨어지게 구성되며, 동작 사이의 호흡이 정갈하게 담긴다. 굿거리장단에 들어가면서 움직임은 자유로워지고, 민속풍으로 변한다. 민천식 「화관무」는 왼발을 먼저 쓰는 점, 한삼을 뿌리는 방식, 춤의 구성 양식이 독특하며, 굿거리장단의 절정에서 민천식의 연풍대는 춤꾼들이 원을 계속 돌면서 춤을 구사하지 않고 온전히 호흡과 하지의 힘으로만 회전한다.
역사는 창작되지 않고 다양한 방법으로 시대적 사실을 유추할 뿐이다. 그래서 동시대를 같이 살아내며, 문화를 배우고 같이 일구었던 사람들의 고증은 힘이 있다. 민천식 춤방의 풍경을 더욱 아름답게 한 것은 민천식의 애제자 김나연(1939년 음력 10월 29일생)이 「화관무」 역사를 써내려 가고 있는 예능보유자 차지언과 같이 같은 무대에서 춤을 추면서 존재감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공연을 같이 본 사람들은 아름다운 역사의 증인이 되었다. 만화경을 통해 백일몽을 꾼 사람처럼 공연은 여운은 길게 남기며 종료되었다.
장석용 문화전문위원(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 사진=국립국악원·화관무보존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