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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청소년들을 제대로 보호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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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청소년들을 제대로 보호하고 있는가?

[힐링마음산책(314)] 청소년 자살, 우리 모두의 책임
우리나라에서는 지난해에만 1만4439명, 하루 평균 39.6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사진은 서울 마포대교에 설치된 생명의 전화 모습.  사진=뉴시스이미지 확대보기
우리나라에서는 지난해에만 1만4439명, 하루 평균 39.6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사진은 서울 마포대교에 설치된 생명의 전화 모습. 사진=뉴시스
“부모님, 고마워요. 하지만 힘들어요. 죄송해요.”

매년 9월 10일이 돌아오면 우리는 '세계 자살 예방의 날'을 맞는다. 세계보건기구(WHO)와 국제자살예방협회(IASP)가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전 세계적으로 증가하는 자살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제정한 이날은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보유한 채 자살이 암·심혈관질환·뇌혈관질환과 함께 주요 사망 원인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현실 때문이다. 우리나라 역시 매년 9월 10일을 '자살 예방의 날'로 제정하고, 이날부터 일주일을 '자살 예방주간'으로 지정해 다양한 예방활동과 교육·홍보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살률은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특히 청소년 자살 문제는 더욱 심각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모든 자살이 가슴 아픈 비극이지만, 그중에서도 아직 꽃망울조차 제대로 터뜨려보지 못한 청소년들의 죽음은 더욱 참담하고 안타깝다. 미래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어야 할 나이에 희망 대신 절망을 선택하는 아이들. 이들의 죽음은 단순히 개인적인 불행이나 가정의 문제를 넘어 우리 사회 전체의 구조적 병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거울과 같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3년 기준으로 자살한 초·중·고 학생 수는 214명에 이른다. 이는 3일에 2명꼴로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의미다. 청소년 사망 원인 1위가 여전히 '자살'이라는 충격적인 현실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과연 우리 사회는 미래의 주역인 청소년들을 제대로 보호하고 있는가? 아니, 더 나아가 우리가 오히려 아이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유서에 담긴 절규-반복되는 비극의 패턴


얼마 전 부산의 한 예술계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사건은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2학년 여학생 3명이 함께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다. 이들이 현장과 휴대전화에 남긴 유서에는 "고3이 되는 것이 두렵고 진로에 대한 불안이 크다"는 고충이 절절하게 담겨 있었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주변 사람들에게 미안한 감정과 함께 "슬퍼하지 마라"는 당부까지 남겼다는 점이다. 죽음의 공포와 절망 속에서도 타인을 배려하는 그 순수한 마음이 오히려 더 큰 비극성을 자아낸다.

청소년 자살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이들이 남긴 유서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키워드들이 있다. '성적', '공부', '부모님 기대'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의 유서 내용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공부가 너무 힘들고, 더 이상 부모님의 기대에 맞출 자신이 없다"는 절망적 고백으로 귀결된다.

성적 지상주의가 만든 왜곡된 가치관


우리 사회는 언제부턴가 청소년들에게 입시와 성적이 곧 자기 존재의 가치를 증명하는 유일한 척도라고 믿게 만들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은 시험 결과가 좋지 않으면 자신이 무가치한 존재라는 왜곡된 자기 인식을 내면화하게 된다. 이는 우리의 교육 시스템이 성취를 '삶의 목적'으로 전락시킨 결과이며,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경쟁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라 할 수 있다.

현 교육부 장관의 일화는 이러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교사 시절 늘 전교 1등을 하던 여학생이 한 시험에서 전교 12등을 했다고 우는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뺨을 때렸다고 회상했다. "전교 12등이 울면 13등은 더 크게 울고, 꼴찌 한 애는 죽으라는 말이냐"는 생각이 들어서였다고 한다. 물론 학생을 때린 것은 잘못된 행위였고, 후에 교사가 된 그 학생에게 용서를 받았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전교 12등을 했다고 우는 학생이 있는 사회 자체가 문제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는 성공을 강요하고 조금의 뒤처짐도 실패로 간주하는 문화가 팽배하다. 청소년들은 어린 나이부터 "잘해야 한다"는 압박을 끊임없이 주입당하며, 그것도 그냥 잘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남보다" 잘해야 한다는 상대적 우위에 대한 강박에 시달린다. 실패에 대한 사회적 낙인은 청소년들에게 심리적 절망 상태를 야기하고, 이는 결국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경쟁 구조는 교육 현장에서 더욱 치열하게 나타난다. 상대평가 제도하에서 누군가의 성공은 곧 다른 누군가의 실패를 의미하게 되었고, 아이들은 동료를 경쟁자로, 친구를 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협력과 상생보다는 경쟁과 독주가 미덕으로 여겨지는 교육 환경에서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메마르고 인간적인 유대감을 잃어가고 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압박


청소년들이 남긴 유서에서 빠지지 않는 또 다른 내용은 부모에 대한 사과와 죄책감이다. "엄마 아빠 사랑해요. 미안해요", "효도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짐만 되고 떠납니다"와 같은 문장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표현들은 절망과 애착이 동시에 드러나는 복합적 감정의 발현이며, 아이들이 자신을 가족에게 짐이 되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2022년 서울의 한 중학생은 성적 하락과 부모의 잦은 꾸중 끝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남긴 유서에는 "부모님을 실망시키는 게 더는 싫다"라는 절망적인 심경이 담겨 있었다. 단순히 공부를 잘 못했다는 문제를 넘어서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죄송하다"라는 깊은 죄책감이 아이를 벼랑 끝으로 몰았던 것이다. 분명히 가족은 사랑을 주었지만 아이에게는 그 사랑을 성적으로 보답해야 한다는 무거운 부담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자살하는 청소년들을 문제아가 아닐까 하는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자신의 자녀들은 '착하기 때문에' 자살은커녕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안일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자살하는 청소년들 대부분은 마음이 여리고 순수하며, 부모에게 자신이 힘들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아이들이다. 오히려 부모에게 반항하고 집을 나갈 수 있는 청소년들은 비행을 저지를지언정 자살까지는 하지 않는다. 자신의 감정과 의견을 외부로 표출할 수 있는 통로가 있기 때문이다. 반면 착하고 순종적인 아이들은 부모를 실망시키지 않으려는 마음에 자신의 고통을 혼자 감당하려 하다가 결국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된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에 대한 기대를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야"라는 말을 달고 사는 부모들이 많다. 물론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어느 부모가 자녀를 괴롭히려고 공부를 강요하겠는가. 모든 부모는 자녀가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기를 바란다. 하지만 문제는 그 사랑의 표현 방식이다. 부모의 기대가 아이에게는 부담과 압박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특히 그 기대가 구체적인 성과나 성적으로 표현될 때, 아이들은 자신의 존재 가치가 그러한 성과에 달려있다고 인식하게 된다. 이는 결국 아이들로 하여금 성과를 내지 못하면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왜곡된 믿음을 갖게 만든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부모들의 인식 변화와 양육 태도 개선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청소년들에게 사회의 압력을 직접 전달하는 일차적 대리인은 바로 부모다. 따라서 부모가 변하지 않으면 근본적인 변화는 기대하기 어렵다. 사회가 청소년들을 과도한 경쟁으로 내몬다고 비판하지만, 실상 그 '사회'라는 것은 실체가 없는 추상적 개념이다. 청소년들에게 사회의 압력을 구체적으로 전달하는 것은 바로 부모와 교사 그리고 주변의 어른들이다. 특히 부모는 가장 직접적이고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다.

청소년들의 유서에 사회에 대한 원망이 아닌 부모에 대한 죄송함이 담겨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아이들은 사회가 아닌 부모로부터 직접적인 압력을 받고, 그래서 부모에게 미안해한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우리 자녀들을 입시 지옥으로 몰아넣는 것은 추상적인 '사회'가 아니라 자녀를 가장 사랑한다고 믿는 바로 그 부모 자신이다.

"다 자식 잘되라고 하는 일이다"라는 부모들의 항변을 모르지 않는다.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그 사랑도 진실하다. 하지만 의도가 선하다고 해서 결과까지 좋은 것은 아니라는 냉혹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사랑하는 자녀가 잘되기를 바라는 그 간절한 마음이 오히려 아이를 절망의 나락으로 밀어넣을 수 있다는 아이러니를 받아들여야 한다.

실제로 우리 청소년들이 마음속으로 부모에게 하고 있는 말은 다음과 같다. "부모님, 저를 위해 온갖 희생을 마다하지 않으셔서 정말 고마워요.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어서 죄송해요." 이보다 가슴 아픈 고백이 또 있을까. 이제 우리 모두가 진지하게 물어야 할 때다. "우리는 정말로 아이들을 안전하게 지켜내고 있는가?" 만약 이 질문에 대해 진정성 있는 답을 찾지 못한다면, 청소년 자살률 1위라는 부끄럽고 아픈 기록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우리를 따라다닐 것이다. 그리고 "부모님, 고마워요. 하지만 힘들어요. 죄송해요"라는 절규는 계속 들려올 것이다.

한성열 고려대 명예교수이미지 확대보기
한성열 고려대 명예교수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 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심리학자의 마음을 빌려드립니다' '문화심리학' '신명의 심리학'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 '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한성열 고려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