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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 노동의 규칙, 아이를 ‘책임지고 서명하는 인간’으로 키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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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 노동의 규칙, 아이를 ‘책임지고 서명하는 인간’으로 키우기

최홍규 미디어학 박사 / EBS AI교육팀장이미지 확대보기
최홍규 미디어학 박사 / EBS AI교육팀장
신입 사원보다 인공지능(AI)이 더 빠르게 코드를 짜고, 보고서 초안이 단 10초 만에 완성되는 시대다. 단 한 장의 가짜 이미지가 글로벌 증시를 뒤흔들고, 단 하나의 알고리즘 오류가 국가 서비스를 멈춰 세우는 시대다. 기계가 인간의 지능을 완벽히 모사하고 결과물을 쏟아내면서 우리가 수천 년간 신성시해온 노동의 정의가 뿌리째 해체되고 있다. 과거의 노동이 숙련된 기술을 연마해 남들보다 정교하고 빠른 결과를 생산하는 양적 경주였다면, 이제 그 경주는 종말을 고했다. 생성형 AI가 인간의 수십 시간을 비웃듯 수준급의 결과물을 무한대로 복제해내는 세상에서 무언가를 잘 만드는 기능은 더 이상 희소가치를 갖지 못한다. 노동의 심장은 이제 생산 현장을 떠나 승인과 책임의 영역, 즉 가치 판단의 고원으로 급격히 이동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AI가 인간의 단순 업무를 잠식할수록, 역설적으로 인간의 역할은 공정의 가장 마지막 단계인 최종 결정의 외줄 위로 밀려 올라간다. 도구를 다루는 기술이 부의 원천이었던 시대는 이미 저물었다. 이제는 AI가 쏟아내는 수만 가지 데이터의 잔해 속에서 무엇이 진실인지 가려내고, 그 결과에 자신의 이름을 걸 수 있는 결정의 담력이 곧 권력이 되는 시대다. 시장은 더 이상 효율적인 손을 빌리려 하지 않는다. 대신 목표를 설정하고 리스크를 관리하며, 품질을 평가해 최종 승인 도장을 찍을 줄 아는 사람에게 압도적인 기회와 보상을 몰아줄 것이다. AI 시대의 인간은 더 이상 무언가를 제조하는 생산자가 아니라 그 결과가 가져올 파장에 책임지고 서명하는 인간(The Signing Human)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미래의 직업 세계에서 일이 몰리고 자본이 집중되는 곳은 명확하다. 바로 책임과 판단이라는 고독한 무게를 온전히 짊어질 수 있는 사람의 곁이다. AI는 경이로운 속도로 답을 내놓지만, 그 답이 가져올 윤리적 파열음이나 현실적인 오작동에 대해서는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다. 알고리즘은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며, 법정에 서지도 않는다. 결국 기업과 조직은 AI라는 거대한 엔진을 조종하며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변수를 통제하고, 최종 결과물의 가치를 자신의 인격으로 보증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의 지휘자를 갈구하게 될 것이다. 이는 단순한 직무의 변화가 아니라 인간 주권의 재정의다.

현실주의 외교를 대표하는 전략가인 미국의 헨리 키신저, 구글을 글로벌 빅테크로 도약시킨 에릭 슈미트, 그리고 MIT 슈워츠먼 컴퓨팅 대학 학장을 맡고 있는 AI·컴퓨팅 석학 대니얼 허튼로커가 공동 집필해 2021년 출간한 저작 'AI 시대(The Age of AI: And Our Human Future)'에서는 AI 시스템을 설계하고 배치하는 책임은 인간에게서 떼어낼 수 없으며, 그 책임을 넘겨주는 순간 인간은 기술이 만들어낸 질서에 스스로 복종하게 된다는 경고를 담고 있다. 결국 미래 노동의 핵심은 기술의 성능이 아니라 인간이 기계의 판단 위에 군림하며 결정의 자격을 사수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가 우리 아이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단순한 기술 활용법이 아니라 AI의 결과물에 자기의 이름을 걸 수 있는 당당한 주도권이다.
그러므로 교육의 좌표는 정답을 생산하는 기계적 성실함에서, 도출된 답을 검증하는 비판적 사유로 전면 수정되어야 한다. 아이는 더 이상 매끈한 결과물을 쏟아내는 시스템의 부속품으로 머물러선 안 된다. 숙제를 완수하고 시험 문제를 맞히는 성취에 안주하기보다 AI가 내놓은 논리의 허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해체하는 안목이 절실하다. 질문의 각도를 틀어 데이터의 이면을 살피고, 그 결과가 가져올 파장까지 계산해낼 수 있는 인간 고유의 감각을 날카롭게 갈고닦아야 한다. 사유의 중심축을 결과물의 양이 아니라 판단의 질로 옮겨오는 것만이 아이를 기술의 하청업자가 아닌 공정의 설계자로 세우는 길이다.

부모가 줄 수 있는 최고의 미래 준비는 일상의 작은 순간마다 책임의 무게감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거창한 담론이나 비싼 코딩 교육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주변의 프로젝트를 하나의 작은 비즈니스 공정으로 치환해보는 연습이다. 아이에게 단순히 시키는 일을 수행하는 수동적 주체로 남겨두지 마라. 대신 전체 기획과 역할 분배, 리스크 관리 등을 전담하는 프로젝트 매니저의 권한을 과감히 부여해야 한다.

가령 가족여행을 준비할 때 아이가 직접 목적지의 동선을 짜고 예상되는 돌발 상황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게 하라. 갑작스러운 날씨 변화나 예산 초과 같은 변수 속에서 아이가 스스로 우선순위를 조정하고 구성원의 의견을 조율하게 하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그 여행의 결과가 어떠했는지 스스로 복기하게 하라. 이 과정에서 아이는 자신의 결정이 현실 세계에서 어떤 파장을 일으키는지, 그리고 결과에 책임을 진다는 것이 얼마나 고독하고도 무거운 작업인지 뼈저리게 체득하게 된다. 이 작은 서명의 경험들이 모여 장차 거대한 시스템을 움직이는 결정의 담력으로 진화한다.

이러한 체득은 아이가 훗날 거친 직업 세계에 나갔을 때 AI를 도구로 활용하면서도 결코 기술에 종속되지 않는 단단한 자아의 갑옷이 된다. 기술은 갈수록 유능해지겠지만, 결정의 무게를 견디는 인간 고유의 역량은 결코 알고리즘으로 학습할 수 없다. 품질을 평가하는 날카로운 안목과 리스크를 감내하는 용기, 최종 승인자의 자부심은 오직 인간만 점유할 수 있는 인간 주권을 증명하는 낙관(落款)이다. 우리는 이제 무엇을 아는가가 아니라 ‘어떤 책임을 질 수 있는가’를 묻는 시대로 들어섰다.

아이를 알고리즘의 하청업자로 키우지 마라. 대신 AI가 내놓은 수많은 데이터의 바다에서 길을 잃지 않고, 당당히 “이것이 최선이다”라고 선언하며 자신의 낙관을 찍을 줄 아는 사람으로 키워야 한다. 노동의 규칙이 완전히 전복되는 시대, 우리 아이의 자리는 더 이상 생산의 말단이 아니라 판단과 책임이 교차하는 정점에 놓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기술에 압도당하지 않고 미래의 주권을 사수하는 유일한 길이다. 이제 우리는 아이에게 더 많은 지식을 주입할 것이 아니라 결정의 책임을 감당하는 연습부터 시켜야 할 때다. AI 시대의 교육은 지식을 늘리는 일이 아니다. 책임을 떠맡을 인간을 만드는 일이다.
최홍규 미디어학 박사 / EBS AI교육팀장


박희준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acklondon@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