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0개에 달하는 무역 합의를 체결했다고 주장하며 대외적으로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지만 실제로 각국 외교관들의 반응은 이보다 훨씬 조심스럽다는 분석이 나왔다.
미국 정치 전문매체 폴리티코는 10여 명의 외교관 및 관계자들의 증언을 인용해 미국 백악관이 받은 무역 제안서들은 대부분 구체적인 최종 합의가 아닌 협상 시작을 위한 ‘기초 초안’ 수준에 불과하다고 지난달 30일(현지시각) 보도했다.
미국은 이달 초 60여 개국을 상대로 보복관세를 부과한 뒤 대부분의 조치를 90일간 유예하고 해당 기간 안에 양자 무역협상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복수의 외교관들은 “미국 측의 구체적인 요구 조건이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각국이 먼저 조건을 제시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 협상 테이블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이는 셈”이라며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전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업계 관계자는 “현재 대부분의 논의는 어디까지나 협상의 틀을 잡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며 “백악관은 이같은 협의 움직임을 외교적 성과로 포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실질적인 진전이 거의 없다”고 평가했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주 기자들과 만나 “이미 200개가 넘는 무역합의를 체결했다”고 밝혔고 백악관은 17~18개국으로부터 서면 제안서를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스콧 베센트 재무부 장관, 케빈 해싯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 제이미슨 그리어 무역대표부(USTR) 대표 등은 “상대국들이 보복관세를 피하기 위해 무역장벽을 낮추는 방안을 적은 문서를 보내오고 있다”고 밝혔다.
그리어 대표는 지난달 11일 폭스뉴스와 인터뷰에서 “상호주의 원칙에 맞춰 여러 나라들과 문서가 오가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외교관들의 평가에 따르면 이 문서들은 대부분 정식 협상안이 아닌 미국이 요구하는 이른바 ‘기본 합의서’ 형식의 개요서다. 미국은 이를 통해 시간은 벌되 협상 진전을 강조할 수 있다는 전략이다.
최근 미국과 ‘협상 개시 조건’에 합의한 인도 사례처럼 백악관은 양자 간 기본틀을 먼저 정하고 그 뒤에 구체 협상을 진행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전날 미시간주 방문 전 기자들과 만나 “인도와 곧 협상이 타결될 것”이라며 “진전이 크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다른 나라들의 입장은 복잡하다. 한국과의 협상과 관련해 베센트 장관은 “지난주 실질적 진전이 있었다”고 밝혔지만 한국 정부는 “대통령 탄핵으로 인한 과도정부 상황에서 6월 총선 이전에 실질적인 합의를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밝혔다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일부 국가는 미국이 제시한 예시문서를 전달받았고 미국 측 선호 조건이 반영된 기본 협정문을 기반으로 한 협상이 제안되고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러나 미국이 지난달 5일부터 부과한 보편관세(10%)는 ‘협상 대상이 아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실질적인 관세 완화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유럽연합(EU) 역시 ‘스코핑 단계’에 머물고 있다고 밝혔다. 스코핑 단계란 본격적인 협상이나 정책 수립에 앞서 범위를 설정하고 주요 의제, 목표, 조건 등을 사전 조율하는 준비 단계를 말한다.
한 EU 외교관은 “미국의 요구사항이 일관되지 않고 너무 다양하다”며 “우리는 아직 미국의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하려 애쓰는 중”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외교관은 “지금 우리가 먼저 협상안을 내는 건 매우 어리석은 일”이라며 “미국은 협상을 원하지 않는다. 차라리 시간을 두고 천천히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현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oc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