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칩 붐에 16시간 야간근무·임금 차별·중개업체 갑질 횡행

글로벌 IT 전문매체 레스트 오브 월드(Rest of World)가 지난달 28일(현지시각)과 지난 4일 연속 보도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만 칩 공장에서 일하는 필리핀 노동자 약 10만 명이 열악한 근무환경과 차별 대우에 노출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만은 전 세계 반도체 공급량의 60% 이상을 생산하는 세계 최대 칩 제조국이다. 애플, 엔비디아, 테슬라 등 글로벌 기업들이 사용하는 고성능 칩 대부분이 대만에서 제조된다. AI 데이터센터와 자율주행차 등의 급속한 확산으로 칩 수요가 폭증하면서, 대만 기업들은 인근 아시아 국가에서 기록적인 수의 노동력을 모집하고 있다.
타이베이 주재 필리핀 이주 노동자 사무소의 세자르 차베스 주니어 노동 담당관은 레스트 오브 월드와의 인터뷰에서 "대만 기업들이 올해에만 반도체 부문에서 2만 명 이상의 필리핀 노동자를 추가 고용할 예정"이라며 "이미 이 산업에서 일하고 있는 약 8만 명의 필리핀인에 25%가 증가한 수치"라고 밝혔다. 그는 "AI 때문에 앞으로 몇 년 동안 여전히 증가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 중개업체가 통제하는 노동자 삶
대만 반도체 공장의 필리핀 노동자들이 겪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중개업체(브로커)의 과도한 통제다. 대만에 오는 모든 이주 노동자는 도착 전 특정 중개업체에 배정되며, 이들 업체가 서류 작업부터 숙박, 식사, 교통, 보험, 취업 알선까지 노동자 삶의 모든 영역을 관리한다. 대만에는 1700개 이상의 등록 중개 회사가 있으며 일부는 200개 이상의 제조업체에서 인력을 고용하고 있다.
타이중에서 필리핀 이주 노동자 보호소를 운영하는 가톨릭 사제 조이 타조네라는 "보호소 도움을 구하는 이주민 10명 중 약 7명이 브로커와 문제를 겪고 있다"고 레스트 오브 월드에 말했다. 그는 "이민자들은 브로커들이 그들의 편이라고 배우지만, 실제로는 고용주의 대리인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필리핀 노동자들은 중개업체가 달마다 고정 서비스 수수료와 함께 숙박, 식사, 유틸리티, 교통비 등을 따로 징수하고 있다고 증언했다. 루이스라는 가명을 쓴 한 노동자는 "7명과 방을 같이 썼지만 각자 한 달에 3000 대만달러(약 13만 6000원)의 전기세를 냈는데, 이는 대만 평균 가구 요금의 거의 3배"라고 말했다. 그는 "중개인은 결코 그에게 지폐를 보여주지 않을 것"이라며 "그들은 모두 거짓말쟁이들이다. 아마 우리 방에서 수십만 달러를 챙겨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많은 필리핀 노동자들이 급여의 약 5분의 1을 중개업체에 지불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필리핀 이주 노동자 권리 옹호 단체인 미그란테 타이완의 길다 바누간 회장은 "브로커들은 노동자들보다 고용주한테서 더 많은 돈을 벌기 때문에 회사의 이익을 우선시한다"며 "노동자가 목소리를 내고 싶어 하면, 고용주는 브로커에게 전화를 걸고, 브로커는 노동자에게 줄을 서거나 사직하도록 강요한다"고 레스트 오브 월드에 말했다.
◇ 차별 근무환경과 장시간 노동
대만 반도체 공장의 필리핀 노동자들은 현지 직원보다 더 어렵고 위험한 업무를 담당하면서도 낮은 임금을 받고 있다. 레스트 오브 월드가 인터뷰한 20명 이상의 필리핀 반도체 노동자들은 12시간 교대 근무가 일반적이며, 하루 16시간 근무도 드물지 않다고 증언했다.
제니라는 가명의 33세 여성 노동자는 "애플, 엔비디아 등에서 사용하는 칩 부품을 처리하는 12시간 교대 근무를 했지만, 필리핀 출신 트레이너가 소리를 지르고 '멍청하다'고 부르며 괴롭혔다"고 말했다. 그는 "한 달에 650달러도 안 되는 급여가 예상보다 낮았고, 기숙사 생활이 힘들어 대부분 방에 앉아서 울곤 했다"고 털어놓았다. 몇 달 동안 괴롭힘을 당한 후 불평했지만 결국 사직을 강요받았다고 그는 말했다.
외국인 근로자의 교대 근무는 종종 밤샘이다. 일부 공장에서는 생산 라인에서 작은 실수를 저질러도 처벌을 받고, 주문을 거부하면 추방당하겠다는 협박을 받기도 한다고 한다. 이주 노동자들의 고용주와 노동 분쟁을 돕는 비영리 단체 '서브 더 피플 협회'의 이사 레논 잉다 왕은 "반도체 회사들의 경우, 환경은 종종 군대 스타일이며, 할당량을 채워야 하고 그 할당량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노동자들을 해고한다"고 레스트 오브 월드에 말했다.
바누간 회장은 "태풍이 닥치는 동안에도 외국인 노동자들은 남아서 일해야 하지만, 현지인들은 종종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며 "거부하면 일자리를 잃을 위험이 있다"고 레스트 오브 월드에 말했다.
카비테에서 온 또 다른 필리핀 공장 노동자는 일론 머스크의 인공지능 회사 엑스AI가 사용하는 수백만 달러짜리 서버를 테스트하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 불평했다. 제임스라는 이름을 써달라고 부탁한 그 직원은 자신의 기본급이 예상보다 낮아서 집으로 돈을 보낼 수 있을 만큼 벌기 위해 초과 근무를 했다고 말했다. 집으로 가져가는 급여도 예상보다 취약했는데, 그의 일이 기대에 못 미쳤을 때 벌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는 레스트 오브 월드에 말했다. "모든 작은 실수가 보고된다"라고 그는 말했다.
노동자들과 전문가들에 따르면, 필리핀인들의 월 임금은 최저 임금인 약 2만 9000 대만달러(약 131만 원)에 근접하는 반면, 현지 직원들은 더 높은 급여에서 시작해 보너스와 특전, 인상 혜택을 받는다. 타이완 국립중정대학교의 류황 리촌 부교수는 "같은 일을 하고 있다면 이것은 명백한 차별"이라고 레스트 오브 월드에 지적했다.
또한 필리핀 노동자들은 무작위 약물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회사들이 생산이 소강상태에 접어들거나 노동자를 쥐어짜고 싶을 때 인원수를 줄이기 위해 이 테스트를 사용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 당국 대응과 현실의 괴리
대만 노동부는 외국인 근로자 불만 접수를 위한 24시간 핫라인을 운영하고 있으며, 여러 언어로 된 소셜미디어와 라디오 콘텐츠를 통해 노동자들의 권리를 알리고 있다고 밝혔다. 노동부 대변인은 "현지 노동 당국이 이주 노동자에게 분쟁 책임이 없다고 판단하면 고용주 허가를 취소하고 노동자가 고용주나 직업을 바꿀 수 있도록 허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는 증언이 나온다. 보도에 따르면 한 외국인 근로자는 동료들과 중개업체에 괴롭힘을 불평했지만 "강경하게 조용히 하라"는 말만 들었고, 결국 핫라인에 신고했지만 "작업 환경 개선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불만 제기 후 사직을 강요받았으며, 중개업체한테서 "빨리 일자리를 찾지 못하면 경찰에 신고하고 집으로 돌려보낼 것"이라는 협박을 받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직장을 그만둔 외국인 근로자는 새 고용주를 찾지 못할 경우 60일 후에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는 두 아이가 있고 그냥 일하고 싶다. 왜 나를 이렇게 대했는지 모르겠다"라고 그 외국인 근로자는 말했다.
타조네라 사제는 "노동자들이 경영진과 갈등을 빚을 때, 브로커들은 공식 불만을 제기하지 말고 '개인 이유'로 집으로 돌아가거나 다른 회사로 전근을 요청하도록 지도한다"며 "개인 이유가 가장 큰 변명이다. 결코, 회사나 고용주의 잘못이 아니다. 그것은 항상 노동자의 잘못이다"라고 말했다.
한편 노동자들은 일부 중개업자들이 취업을 신속히 처리하거나 주요 서류를 공개하기 위해 은밀한 지급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 외국인 근로자는 그의 중개인 중 한 명이 기술 공장에 입사 지원을 빨리 하기 위해 거액을 청구한 적이 있다며 "돈을 내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건 그들 사업의 일부"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필리핀 정부는 브로커 시스템의 효율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차베스 담당관은 말했다. 그는 "최고의 회사들이 수수료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법은 필리핀 노동자들을 보호한다"며 "노동자가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 한 중개인이 있어도 상관없다"고 레스트 오브 월드에 말했다.
이주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우 문제가 지속되면서, 일부는 중개업체를 피해 불법 취업을 선택하고 있다. 대만 정부에 따르면 대만의 서류 미비 노동 인구는 2021년 이후 거의 두 배로 증가해 올해 초 9만 명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한 불법 체류자는 "당국 단속을 피해 숨어 살면서도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이 중개업체와 계약해 일하는 것보다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