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계약은 삼성전자의 첨단 반도체 생산 역량을 입증하는 동시에 수익성 악화와 고객 신뢰 저하로 위축된 파운드리 부문의 재도약 가능성을 점검받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가 지난달 31일(현지시각) 분석했다.
◇ 美 텍사스 신공장서 테슬라 AI 칩 위탁생산…수율과 문화 혁신이 과제
삼성과 테슬라가 맺은 8년 계약은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에 건설 중인 삼성의 반도체 공장에서 테슬라의 차세대 인공지능(AI) 칩인 ‘AI6’를 생산하는 내용이다. 테슬라는 자율주행과 로봇 개발을 위한 AI 모델 훈련에 해당 칩을 사용할 예정이다.
삼성은 이번 계약을 계기로 “미국 내 신규 반도체 공장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향후 추가 고객 유치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반도체 업계에서는 단일 고객 유치만으로 파운드리 사업 전체를 회생시키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도 제기된다.
이종환 상명대 반도체공학과 교수는 “삼성의 파운드리 사업이 적자를 면치 못하는 상황에서 테슬라 계약은 기술력을 인정받는 계기가 될 수 있지만, 과거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했다.
삼성은 한때 세계 파운드리 시장에서 선두를 다퉜지만 지난 1분기 기준 점유율은 7.7%에 그치며 대만 TSMC(67.6%)와 격차가 크게 벌어진 상태다. 파운드리 부문의 부진은 지난 2분기 삼성전자 순이익이 전년 대비 50% 가까이 감소한 5조1000억 원 수준에 그친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
◇ 기술력보다 신뢰 회복이 관건…TSMC와의 경쟁 구도도 변수
테슬라의 AI5 칩은 현재 TSMC가 생산하고 있으며 AI6 칩은 미국에서 생산돼야 한다는 조건 아래 삼성에 낙찰된 것으로 보인다. 업계 관계자들은 “TSMC의 애리조나 공장 가동 여력 부족으로 삼성이 수주를 따냈을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TSMC 관계자는 FT와 인터뷰에서 “보통 이런 주문에 가격 경쟁을 벌이지 않지만, 이번 계약은 우리가 정말 원했던 계약”이라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다른 관계자는 “애플은 더 이상 성장 동력이 아니고 테슬라는 로봇과 로보택시 등으로 급성장할 가능성이 있어 TSMC도 충분히 대응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이번 계약의 실제 수익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이 교수는 “수율이 낮고, 고객을 확보하려는 삼성의 절박함을 고려할 때 테슬라가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파운드리 생산은 메모리와 달리 수주 기반이기 때문에 고객 맞춤 생산 시스템과 엔지니어 중심 조직 운영이 필수다. 따라서 삼성 내부에서는 문화적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반도체 시장조사기관 카운터포인트리서치의 황민수 애널리스트는 “삼성의 가장 큰 문제는 낮은 수율과 반복된 생산 지연으로 고객 신뢰를 잃었다는 점”이라며 “이 악순환을 끊지 못하면 테슬라 계약도 성공하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 AI 수요 확대 따른 ‘기회’도…삼성, 2나노 수율 확보에 집중
삼성은 이번 계약을 계기로 테일러 공장의 본격적인 가동을 2026년으로 잡고 있으며 2나노 공정에서의 안정적인 수율 확보에 주력할 계획이다.
씨티그룹의 피터 리 반도체 담당 애널리스트는 “테슬라와의 계약이 삼성의 AI칩 생산 내재화에 도움이 될 수 있으며 다른 빅테크 고객 유치에도 긍정적”이라고 전망했다.
다만 반도체 분석기관 세미애널리시스의 딜런 파텔 창립자는 “계약 기간이 긴 만큼 테슬라가 향후 삼성이 약속한 성과를 달성하지 못할 경우 계약을 철회할 여지가 충분하다”고 경고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이번 주 직접 테일러 공장 생산라인을 감독하겠다고 밝히며 생산 속도 가속화 의지를 드러냈다. 업계에서는 삼성의 파운드리 전략이 이번 계약을 계기로 기술뿐 아니라 기업 문화와 조직 운영 방식에서 얼마나 변화할 수 있을지가 향후 성패를 가를 관건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김현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oc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