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부터 장비 반입 건별 심사…생산능력 확대·기술 고도화 원천 차단
미국의 압박, 중국의 '기술 자립' 가속…글로벌 공급망 재편 본격화
미국의 압박, 중국의 '기술 자립' 가속…글로벌 공급망 재편 본격화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기업인 대만 TSMC는 9월 초, 미국 정부로부터 중국 난징 공장에 적용되던 VEU 자격이 올해 말 만료될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공식 확인했다. VEU는 미국이 사전에 신뢰성을 인정한 기업에 한해 미국산 기술·장비 수출 절차를 간소화해 주는 일종의 '수출 고속도로' 제도다. 이 자격을 통해 TSMC를 비롯해 삼성전자·SK하이닉스 중국 공장 역시 그동안 복잡한 허가 절차 없이 신속하게 최신 장비를 중국 현지 공장에 투입해 생산 효율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우대 조치가 사라지면서 이들 기업의 중국 내 경영 활동에는 상당한 제약이 불가피해졌다. 앞으로는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미국산 장비나 미국의 기술이 포함된 제품을 중국 공장으로 반입할 때마다 미국 상무부 산업안보국(BIS)의 개별적인 심사와 허가를 받아야 해 장비 도입 지연과 생산 계획의 불확실성 증가는 피할 수 없게 됐다.
'현상 유지' 묶인 기업들…생산 차질 우려 현실로
미국 정부의 이번 결정은 중국의 첨단기술 확보를 막기 위한 규제망을 더욱 촘촘히 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미국 상무부는 VEU 제도가 일부 외국 기업에만 특혜를 제공함으로써 자국 기업을 경쟁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하는 '규제의 허점'이라고 판단했다. 제프리 케슬러 상무부 차관보는 "허점을 막는 것은 우리의 공약을 이행하기 위한 중요한 한 걸음"이라고 강조하며 이번 조치의 정당성을 역설했다.
BIS는 향후 기존 공장의 운영 유지를 위해 필요한 부품이나 장비에 대한 허가는 계속 내줄 방침이다. 하지만 생산능력 확대나 차세대 기술 도입과 같은 신규 투자는 사실상 불허하겠다는 입장을 명확히 했다. 이러한 기조는 한국과 대만 기업들의 중국 공장이 현상 유지에 그치는 '식물 공장'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이번 결정이 시장에 미친 충격은 즉각적이었다. 특히 전체 낸드플래시 생산량의 상당 부분을 중국 공장에 의존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주가는 상무부 발표 직후 하락하며 시장의 깊은 우려를 반영했다. 특히 SK하이닉스는 중국에서 D램과 낸드플래시 생산량의 30% 이상을 담당하고 있어 이번 규제로 말미암은 영향이 상대적으로 더 클 것으로 평가된다. 반면 TSMC의 경우 규제 대상인 난징 공장의 매출 비중이 전체의 3% 미만으로 미미하고, 주로 16나노(nm)·28나노 등 구세대 공정을 중심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직접적인 타격은 제한적일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각 기업은 미국 정부와 긴밀히 협의하며 안정적인 운영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원론적 입장을 내놓았지만, 당장 단기적인 장비 조달과 유지·보수 지연에 따른 생산 차질 위험을 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미국의 역설…'기술 자립' 내세운 중국의 반격
이번 규제 강화는 KLA, 램리서치,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 등 미국 장비 업체들에도 부메랑이 될 수 있다. 중국은 이들 기업의 핵심 시장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더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번 조치가 불러올 역설적인 효과다. 미국의 고강도 압박은 오히려 중국에 기술 자립의 시급성을 절감하게 하고, 반도체 국산화를 향한 움직임을 더욱 가속하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실제로 올여름 중국의 알리바바 그룹은 독자적인 인공지능(AI) 반도체 개발 소식을 알렸고, 미국의 집중 제재 대상인 화웨이는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반도체 생산능력을 대폭 확충할 계획이라고 전해졌다. 이러한 움직임은 단순히 미국 기술을 대체하는 수준을 넘어 독자적인 반도체 생태계를 구축하려는 중국의 야심을 보여준다. 미국의 규제가 역설적으로 중국의 기술 독립을 촉진하면서 거대한 자국 시장을 기반으로 한 내수용 반도체 산업의 성장을 가속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미국의 규제 강화가 거대한 중국 시장을 자국 기업들이 독점하기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모양새다. 이번 VEU 폐지 조치는 단기적으로는 한국과 대만 기업의 발을 묶는 효과를 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이 미국·대만·한국·일본 등 우방국 중심으로 재편되는 흐름을 가속하고, 미·중 간 기술 격차를 더욱 벌리며 세계가 두 개의 기술 블록으로 나뉘는 '기술 디커플링' 현상을 심화시키는 분기점이 될 전망이다.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은 이제 생존을 위해 더욱 복잡해진 지정학적 방정식 속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