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 상승·공급망 마비 우려한 현실론 우세…보호무역 강경론 한발 물러서
관세 대신 보조금·대출로 선회…자국 내 생산 기반 확보 장기전 돌입
관세 대신 보조금·대출로 선회…자국 내 생산 기반 확보 장기전 돌입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추진해 온 고강도 의약품 관세 정책이 중대 기로에 섰다. 수개월간 내부 논의 끝에 미국 내 처방약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복제약(제네릭 의약품)을 관세 부과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가닥을 잡았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8일(현지시각) 보도했다. 이번 결정은 지난 4월 시작한 '의약품 관련 국가안보 관세 조사(무역확장법 제232조)'의 적용 범위를 대폭 줄이는 조치다. 관계자들은 "완전한 종결은 아니지만 방향의 전환"으로 평가한다. 이로써 행정부는 의약품 공급망의 자국 복귀를 목표로 한 기존 보호무역 기조에서 상당 부분 물러섰다. 국가 안보 논리와 소비자 물가 안정이라는 두 가치 사이에서 깊은 딜레마에 빠진 셈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8일 외국산 복제약에 대한 관세 부과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쿠시 데사이 백악관 대변인은 성명을 통해 "행정부는 복제약에 무역확장법 제232조의 관세를 적용하는 문제를 현재 논의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관세 조사를 직접 담당하는 상무부 역시 "232조 조사 결과가 복제약에 대한 관세 부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확인했다.
이번 결정은 행정부의 당초 구상에서 크게 축소된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1962년 무역확장법 제232조'를 근거로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된다는 명분을 내세워 수입 의약품에 대한 관세 부과를 검토해왔다. 지난 4월 연방 관보에 조사를 고시할 당시만 해도 대상은 '완제 복제약과 오리지널 의약품' 그리고 원료의약품을 모두 포함했다. 트럼프 대통령 자신도 지난 9월 10월 1일부터 오리지널 의약품에 100% 관세를 물리겠다고 공언하며 고강도 압박에 나섰으나 복제약은 언급하지 않았다. 이후 제약사들과 추가 협상 때문에 관세 부과를 연기한 데 이어 이번에 복제약 제외 방침을 공식화하면서 정책의 범위가 대폭 줄었다. 이 결정은 "관세와 수입 제한을 단계적으로 도입해 모든 필수의약품 생산을 미국으로 되돌려 놓겠다"던 2023년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공약과도 어긋난다.
'안보냐 물가냐'…격렬했던 내부 노선 투쟁
트럼프 대통령의 국내정책위원회(Domestic Policy Council)와 시오 머켈 의료 정책가 등은 대표적인 신중론자다. 이들은 "복제약은 미국 소비자의 90% 이상이 사용하는 핵심 의약품으로, 가격 상승은 즉시 소비자 부담으로 이어진다"며 반대 뜻을 분명히 했다. 현재 미국 내 처방 의약품의 약 90%는 복제약이지만 이들 중 절반 이상이 인도, 중국 등 해외에서 생산된다. 특히 인도는 미국 복제약 시장의 45~50%를 공급하는 핵심 국가다. 이처럼 해외 의존도가 절대적이어서 고율 관세는 미국 내 생산 수익성 개선 효과가 거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공급망 차질과 의약품 품절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했다. 이러한 우려는 코로나19 대유행 시기 공급망 차질이 심각하게 나타나면서 트럼프 행정부가 '의약품의 전략물자화'를 추진하게 된 배경과도 맞닿아 있다.
반면 상무부 내 일부 관료들과 트럼프 대통령 측근의 보호무역주의자들은 강경론을 폈다. 릭 스콧 플로리다주 상원의원은 행정부에 보낸 공개서한에서 "복제약이야말로 미국의 약물 자주권을 약화시키는 핵심 요인"이라며 복제약을 관세 대상에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반면 공화당 내 자유시장론자들과 제약업계는 약값 폭등을 막았다며 이번 결정을 환영하는 분위기다.
관세 대신 '당근'…장기전 채비
복제약이 관세 대상에서 빠졌지만, 트럼프 행정부의 의약품 공급망 재편 의지가 꺾인 것은 아니다. 다만, 방식이 직접 관세 압박에서 간접 자국 생산 유도로 바뀌고 있다. 행정부는 현재 관세 대신 연방 보조금, 대출, 투자유치 혜택 같은 직접 지원 방안을 검토한다. 백악관은 대통령 행정명령으로 필수 복제약의 국내 제조업체에 연방 보조나 저금리 융자제도를 마련할 수 있다고 밝혔다. 나아가 일본 등 우방국의 대외무역 기금 자금을 미국 의약품 기반시설에 활용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데사이 대변인은 "코로나 시대에 겪었던 것처럼 미국인들이 해외 의존 때문에 다시는 곤경에 처하지 않도록, 복제약 제조업의 자국 이전을 위해 다층적이고 정교한 접근법을 시행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번 조치는 '전면적인 제약 관세전쟁'을 피하면서, 단기적으로는 약값 안정과 공급 유지를, 장기적으로는 의약품 자급 기반 확보라는 두 목표 사이에서 균형을 꾀한 현실적인 정책 조정으로 평가된다. 앞으로 연말까지 나올 상무부의 제232조 조사 공식 권고안에서 복제약의 국가안보 관련성을 어떻게 평가할지, 또 보조금 정책이 항생제·항암제 등 어떤 필수 의약품을 중심으로 구체화될지에 따라 미국 의약품 공급망의 미래가 결정될 전망이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