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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캘리포니아 와인 산업, 금주법 이래 최대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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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캘리포니아 와인 산업, 금주법 이래 최대 위기

과잉공급·소비절벽·관세장벽 '삼중고'…풍작마저 재앙으로
농가, 수십 년 가꾼 포도밭 갈아엎어…산업 기반 붕괴 우려
캘리포니아 지역 와인 산업은 과잉 공급, 소비 감소, 관세 장벽이라는 삼중고에 직면하며 금주법 시대 이래 최대 위기를 맞았다. 풍작이 오히려 재앙이 되어 농가들이 수십 년 가꾼 포도밭을 갈아엎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캘리포니아 지역 와인 산업은 과잉 공급, 소비 감소, 관세 장벽이라는 삼중고에 직면하며 금주법 시대 이래 최대 위기를 맞았다. 풍작이 오히려 재앙이 되어 농가들이 수십 년 가꾼 포도밭을 갈아엎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사진=로이터
미국 와인 산업의 심장, 캘리포니아에 금주법 시대 이래 가장 혹독한 겨울이 찾아왔다. 한때 황금기를 구가하던 와인 산지가 과잉 공급과 소비 절벽, 무역 장벽이라는 삼중고에 직면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지난 10일(현지시각) 보도했다. 축복이 되어야 할 풍작마저 가격 붕괴를 부채질하는 재앙으로 돌아오면서, 농부들은 수십 년간 가꾼 포도나무를 뽑아내는 고육지책까지 고심하는 전례 없는 '산업 대전환기'에 들어섰다.

넘쳐나는 포도, 팔리지 않는 와인


위기의 원인은 복합적이다. 포도밭에는 주인을 찾지 못한 포도가 넘쳐나고, 특히 건강을 중시하는 젊은 층을 중심으로 와인 소비가 눈에 띄게 줄었다. 지난해에만 팔리지 않은 포도가 최대 40만 톤에 이르렀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포도값이 절반 넘게 폭락해 농가 수익에 치명타를 안겼다. 여기에 미국의 가장 큰 와인 수출 시장이던 캐나다가 관세 문제로 하루아침에 빗장을 걸어 잠갔다. 올해 수확이 한창이지만, 와이너리 창고에는 예년에 만든 와인이 먼지 속에 잠겨 있다.

이러한 공급 과잉을 부추긴 것은 뜻밖에도 이상적인 날씨였다. 서리나 폭염 없이 서늘한 기후가 이어진 덕에 포도는 풍성하게 열렸고, 와인 애호가들이 좋아하는 농축된 풍미를 지닐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 그러나 팔리지 않는 마당에 풍작은 축복이 아닌 재앙이 됐다. 지역 와인·농업 무역 단체인 소노마 카운티 와인그로워스는 "이번 시즌에 기른 포도의 30~40%가 팔리지 않을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을 내놨다.

상황이 이렇자 대형 구매자들도 등을 돌리고 있다. '모델로' 맥주로 유명한 콘스텔레이션 브랜즈는 와인 사업을 줄이며 포도 구매량을 축소해왔고, 이 흐름은 올해 더욱 뚜렷해졌다. 미국 9위 와인 생산업체인 잭슨 패밀리 와인스의 미치 데이비스 최고운영책임자(COO)는 외부 구매량을 줄이는 것을 넘어 극단 조치를 검토하고 있다. 그는 "전 세계에서 운영하는 약 1만 4000에이커의 포도밭 일부를 갈아엎고 다른 품종을 심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공급이 넘치는 품종을 소비뇽 블랑처럼 시장 수요가 높은 품종으로 바꿔 위기를 기회로 삼으려는 고심 끝의 방책이다.

소비자들의 얇아진 지갑을 열기 위한 가격 인하 경쟁도 본격화했다. 잭슨 패밀리 와인스의 실라 새먼 마케팅 담당 수석 부사장은 "19.99달러는 마법의 가격선"이라며 "이 가격을 넘어서면 특히 식료품점에서 와인을 사는 많은 이들에게 큰 부담이 된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인기 상품인 '라 크레마 소노마 코스트 피노 누아'는 병당 1.50달러 값을 내렸고, 20달러 미만의 새로운 '켄달-잭슨 스파클링 와인'도 시장에 나왔다.

황금기 이끌던 '사이드웨이'의 영광, 옛이야기로


캘리포니아 와인의 역사는 1933년 금주법 폐지 뒤 꾸준한 성장의 길을 걸었다. 1990년대 초 '프렌치 패러독스'가 와인의 건강 효능을 시사하며 대중적 인기를 끌었고, 2004년 영화 '사이드웨이'는 피노 누아를 스타 반열에 올리며 캘리포니아를 세계적인 와인 관광지로 만들었다.

이러한 유행을 타고 많은 농부가 밭을 포도원으로 바꿨다. 소노마 토박이인 존 발레토는 70여 가지 채소를 기르던 700에이커의 농장을 1995년부터 포도밭으로 바꾸었다. 그는 "25년 만에 처음으로 포도의 30%가 팔리지 않았다"며 "올해 약 300만 달러(약 42억 원)의 매출 손실이 날 것 같다"고 토로했다. 그는 손실을 메우기 위해 남는 포도를 대형마트 자체상표(PB) 상품으로 납품하는 '벌크 와인'으로 만들 계획이지만, 이마저도 낮은 이윤과 불확실한 판로라는 위험을 떠안아야 한다.

코로나19 대유행 시기 '집에서 마시는 술' 문화가 퍼지며 잠시 활기를 띠었던 시장은 이제 급격히 얼어붙었다. 2021년 2억 4050만 상자에 이르던 캘리포니아 와인의 미국 내 출하량은 지난해 2억 350만 상자로 곤두박질쳤다. 건강에 대한 높아진 관심, 무알코올 음료와 오젬픽 같은 체중 관리 약품, THC 대체 음료의 등장은 소비 위축을 재촉했다. 갤럽 조사를 보면, 올해 미국 성인의 알코올 소비율은 지난 90년 동안 가장 낮은 수치로 떨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트럼프 대통령이 일으킨 캐나다와의 관세 분쟁은 결정타가 됐다. 캐나다 정부가 25%의 보복 관세를 물리자 현지 시장에서 캘리포니아 와인이 자취를 감추면서, 2분기 캐나다 와인 수출액은 지난해 같은 기간 1억 1100만 달러(약 1590억 원)에서 400만 달러(약 57억 원) 밑으로 96%나 폭락했다. 와인 인스티튜트의 로버트 코크 최고경영자는 "미국 와인이 팔리지 않는 현실은 와인 제조업자뿐 아니라 그들에게 기댄 지역사회 전체에 실질적이고 오래가는 피해를 주고 있다"고 경고했다.

지역 경제 '휘청'…"포도 농사 포기" 속출


포도밭을 갈아엎는 것은 단순히 한 해 농사를 접는 것을 넘어선다. 소노마 카운티에서만 올해 약 2000~5000에이커가 문을 닫았으며, 일부 농가는 포도 농사를 아예 포기하는 '미재식 전환'을 택하고 있다. 이들은 포도밭을 과일이나 채소밭으로 바꾸거나, 주택 개발 부지로 팔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지역 경제 전반에 심각한 타격을 준다. 캘리포니아 전체 와인 포도밭 면적은 이미 15~20%가량 줄었고, 앞으로 더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포도밭 감소는 곧 농가 폐업과 일자리 축소로 이어진다. 나파 밸리, 소노마 카운티 같은 세계적 명성을 자랑하던 와인 주산지의 이름값과 농업 경제 기반이 흔들리는 것이다. 많은 농가가 2025년 수확을 마지막으로 사업을 접거나 완전히 바꿀 생각을 하고 있어 산업 재편의 움직임은 더욱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과 불확실한 앞날


벼랑 끝에 몰린 농부들은 마지막 수단을 쓰고 있다. 더튼 랜치의 스티브 더튼 공동 소유주는 팔리지 않은 200만 달러(약 28억 원)어치의 포도를 보며 페이스북 장터에 판매 글을 올리는 등 백방으로 뛰고 있다. 그는 "내년에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면 가족의 땅 일부를 개발업자에게 팔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한탄했다.

기나긴 불황의 터널 앞에서 캘리포니아 와인 산업은 살아남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치고 있다. 존 발레토는 와이너리에 잔디 게임과 야구장을 만들고 음악 공연, 궤도차 관광 같은 체험 행사를 열어 젊은 소비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는 "우리는 철저히 소비자 중심으로 가야 한다"며 "이것은 우리에게 긴 시간의 약속과 같다"고 강조했다.

산업 전문가들은 과잉 생산 구조를 푸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입을 모은다. 한 전문가는 2025년 수확량을 250만 톤 밑으로 낮춰야 시장 균형을 맞출 수 있다고 짚었다. 품질은 역대 최고지만 시장 수요에 보탬이 되지 못하는 엇갈림 속에서 가격 안정 없이는 농가 기반 붕괴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단기적으로는 캐나다 수출 관세가 없어지거나, 뜻밖에도 산불 같은 기후 재해에 따른 대체 수요가 생겨 숨통이 트일 수도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그러나 근본 문제를 풀려면 정부와 업계의 구조조정, 새로운 판로 개척 등 대대적인 변화가 불가피하다. 영광의 시대를 뒤로하고 혹독한 겨울을 맞이한 캘리포니아 와인 산업이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 나갈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