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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美선 '문화 체험', 中선 '생존 식량'…K라면, 세계 Z세대 입맛 사로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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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美선 '문화 체험', 中선 '생존 식량'…K라면, 세계 Z세대 입맛 사로잡다

댈러스 '라면 라이브러리' K팝 틀고 직접 조리…서울 CU편의점, 외국인 관광 명소 '우뚝'
中 Z세대 '특공대식 여행'에 라면 소비 폭증…홍콩 관광객 늘어도 소매 매출은 '뒷걸음'
K라면이 세계 Z세대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미국 댈러스의 '라면 라이브러리'에서 방문객들이 K팝 음악을 들으며 직접 한국 라면을 조리하는가 하면, 서울 CU편의점 '라면 라이브러리'는 외국인 관광객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K라면이 세계 Z세대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미국 댈러스의 '라면 라이브러리'에서 방문객들이 K팝 음악을 들으며 직접 한국 라면을 조리하는가 하면, 서울 CU편의점 '라면 라이브러리'는 외국인 관광객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사진=로이터
K라면이 단순한 한 끼 식사를 넘어 세계적인 문화 현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미국 텍사스에서 시작된 이색 전문점에서부터 중국 Z세대의 초저가 '특공대식 여행'에 이르기까지, 인스턴트 라면은 국경을 넘어 음식 문화, 관광 유행, 나아가 국제 사업 지형도까지 새롭게 그리고 있다고 그랜드 피너클 트리뷴이 26일(현지시각) 보도했다.

이 '라면 르네상스'의 진원지 중 하나는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에 있는 '라면 라이브러리(Ramyun Library)'다. 2023년 12월 문을 연 이곳은 이름과 달리, 벽면 가득 형형색색의 한국 라면 봉지가 채워진 이색 매장이다. 이곳은 일본식 '라멘(ramen)'과 구별되는 한국식 '라면(ramyun)' 표기를 내세우며 문화적 정체성을 분명히 한다. 고객은 신라면, 불닭볶음면, 너구리 등 다양한 라면을 직접 고른 뒤, 계란, 파, 버섯, 치즈, 만두, 소시지 등 원하는 토핑을 추가해 즉석에서 조리해 먹는 경험을 즐긴다. 이러한 '직접 만드는(DIY) 음식 문화'는 자신의 취향대로 조합하길 즐기는 Z세대의 소비 성향과 맞물려 폭발적인 호응을 얻고 있다.

이러한 매력은 단순한 '식사'를 넘어 '체험'에 방점을 찍는다. 매장 내부는 팝아트 풍의 밝은 색감으로 꾸몄으며, 조리 및 사진 촬영 공간은 SNS 콘텐츠 제작에 알맞다.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의 윤미정 미주 본부장은 "미국에서 한국식 인스턴트 라면 전문점이 인기를 얻으며 점차 그 수가 늘어나고 있다"며 "매장 벽면을 다채로운 라면 봉지로 채워 팝아트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K팝 음악이 흘러나온다"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자신만의 라면을 직접 만들어 먹는 재미, 한국식 토핑을 자유롭게 조합하는 즐거움, 그리고 한국 편의점 문화를 경험할 기회가 외국인들에게 신선하고 흥미롭게 다가가고 있다"고 분석했다.

K라면 전문점은 댈러스뿐만 아니라 루이지애나와 캘리포니아의 '슬러프 앤 십(Slurp & Sip)', 버지니아의 '더 라면 집(The Ramyun Zip)' 등으로 확산하는 추세다. 미국 요리 전문 매체 '이터(Eater)'에 따르면, '슬러프 앤 십'은 고객 취향에 맞춰 육수와 면을 조리하는 특수 기계까지 갖췄다. 이곳의 인기 메뉴는 신라면 블랙에 계란과 파를 추가한 조합이며, 가격대는 6~7달러(약 8,600원~10,000원) 선이다. 버지니아의 '더 라면 집'은 한글 네온사인과 아이돌 포스터를 활용하고 식혜, 밀키스 등 한국 음료를 함께 판매하는 등, K라면 전문점은 단순 식당을 넘어 K팝, 한글 디자인, '직접 찍기(셀피)' 문화를 융합한 '복합 문화공간'으로 진화하고 있다.
미국 시장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서울에서는 편의점 CU가 '라면 라이브러리'를 핵심 관광 상품으로 탈바꿈시켰다. 2023년 홍대에서 시작한 이 특화 매장은 현재 전국 55개 지점으로 늘어났다. BGF리테일에 따르면, 2025년 1~9월 이들 매장의 면류 제품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무려 153.8% 급증했다. K드라마 등을 통해 '한강 라면' 문화를 접한 외국인 관광객들이 한국 방문 시 '꼭 해볼 일(버킷 리스트)'로 K편의점 라면을 꼽고 있기 때문이다. 라면 한 그릇이 MZ세대 관광객의 '현지 체험형 먹을거리'이자 그 자체로 '한류 관광상품'으로 진화한 셈이다.

소셜 미디어는 이 열풍의 기폭제 역할을 하고 있다. 유명 인플루언서 '켈리심플리잇츠(kellysimplyeats)'가 '라면 라이브러리' 방문 영상을 올리자, 해외 팬들 사이에서는 "맥도날드처럼 전 세계로 퍼져나갈 것 같다", "여기서 한강 라면을 맛볼 수 있다니", "왜 독일에만 이런 게 없나" 등 폭발적인 반응이 쏟아졌다.

美 '문화 체험' K라면, 韓 관광상품으로 진화


이와 대조적으로, 중국에서는 K라면이 전혀 다른 양상으로 소비되고 있다. 중국 Z세대 사이에서 유행하는 '특공대식 여행(special forces travel)'은 군사 작전처럼 빠듯한 예산과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하려는 초저가 여행 방식이다. 이들은 교통비를 아끼기 위해 명소 사이를 걷고, 비싼 호텔 대신 24시간 맥도날드 매장에서 쪽잠을 자며, 식사는 편의점 인스턴트 라면으로 해결한다. 중국판 인스타그램인 '샤오훙슈(小红书)'에는 관련 여행 비결과 인증 사진이 확산하고 있다.

중국인 관광객 클로이 카이(Chloe Kai)는 3일간의 홍콩 여행에서 단돈 10만 원(약 75달러)만 지출한 비결로 맥도날드 노숙과 편의점 식사를 꼽았다. 일부 여행객은 24시간 혹은 48시간 동안 라면에만 34만 원을 지출하는 등, 인스턴트 라면이 이들의 주식이 되고 있다. 인스턴트 라면이 이들에게는 '저비용 여행의 생존식'이자, 치열한 사회 경쟁 속 '스트레스 방출 수단'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이같은 초저가 여행 붐은 홍콩 현지에서 복잡한 반응을 낳고 있다. 패스트푸드점 노숙 등이 도시 이미지를 훼손하고 실질적인 지역 경제 기여도는 낮다는 비판이다. 실제 통계도 이를 뒷받침한다. 홍콩 관광청 등에 따르면 2025년 첫 8개월간 홍콩을 방문한 중국 본토 관광객은 2,550만 명으로 지난해보다 11% 늘었지만, 같은 기간 총 소매 판매액은 오히려 1.9% 감소했다.

中 '생존 식량' 된 라면…엇갈린 경제 효과


전문가들의 진단은 엇갈린다. 홍콩 폴리테크닉 대학의 미미 리 교수는 "관광객은 늘었지만 과잉 관광과 혼잡 문제가 발생했다"며 "많은 저가 여행객이 숙박이나 쇼핑을 거의 하지 않아 경제 기여도가 미미하다"고 지적했다. 다만 "이들의 구매력이 미래에 증가한다면 멀리 보아 이익이 될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남겼다. 커틴 대학의 밍밍 청 소셜 미디어 연구소장은 "'특공대식 여행'은 제한된 시간과 예산 안에 많은 경험을 압축하려는 젊은 세대의 '시간 불안'을 반영한다"고 분석했다.

한국 정부 역시 이같은 세계적 유행을 주시하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와 aT는 K라면의 해외 홍보를 적극 지원하는 한편, 미국 시장 내 '한국 라면 가맹점(프랜차이즈) 진출 지원'을 확대하고 해외 편의점과 연계한 'K-라면 직접 조리대(셀프 스테이션)' 설치도 검토 중이다. 이와 동시에 중국인 단체들의 '특대형 인스턴트 라면' 대량 소비에 대응한 규제 조치를 검토하는 등 복합적인 대응에 나섰다. 국내 주요 업체인 삼양과 농심 등도 현지화 메뉴 개발 및 ESG 포장재 개선에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댈러스의 '체험형 K라면'이든 홍콩의 '생존형 K라면'이든, 인스턴트 라면은 한 끼 식사를 넘어 문화 교류와 경제적 기회, 그리고 신세대의 변화하는 취향을 드러내는 시대의 상징이 되고 있다. 단순한 간편식을 넘어 '감정 공유 매체'이자 '세계적인 놀이문화 상징(아이콘)'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SNS를 통해 끓이는 과정을 공유하는 행위 자체가 '음식 오락(푸드테인먼트)'이자 '음식 관광(푸드 투어리즘)'의 새로운 형태로 자리 잡았다. K라면이 세계 청년 세대의 문화 감수성을 반영하며 '한류 4.0' 시대를 이끄는 핵심 상품으로 부상한 것이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