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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 디코드] '석유 자본'까지 투입…中, '칩렛 우회로'로 美 제재 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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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 디코드] '석유 자본'까지 투입…中, '칩렛 우회로'로 美 제재 뚫는다

헤순 페트롤리엄, 2억 달러에 '칩렛 접착제' 엠스퀘어 전격 인수
첨단공정 막히자 '구형칩 조합' 묘수…AI 반도체 자립 사활
사진=오픈AI의 챗GPT-5가 생성한 이미지이미지 확대보기
사진=오픈AI의 챗GPT-5가 생성한 이미지
미국의 숨 막히는 반도체 제재 속에서 중국이 정유(石油) 자본을 동원하는 '자본의 우회' 전략을 통해 첨단 AI 반도체 자립의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다. 중국 후난성의 민간 정유사 헤순 페트롤리엄(Hunan Heshun Petroleum)이 상하이의 반도체 IP(지식재산) 및 칩렛 인터커넥트 전문 팹리스 '엠스퀘어 테크놀로지(MSquare Technology)'를 전격 인수했다고 IT전문 매체 디지타임스가 지난 17일(현지시각) 보도했다.

반도체 경험이 전무한 석유 유통 기업이 AI 반도체의 핵심 기술 기업을 인수하는 이례적인 이번 딜은, 미국의 첨단 공정 및 AI 칩 접근을 원천 차단당한 중국이 '칩렛(Chiplet)' 기술을 유일한 우회로로 삼고, 이를 위해 내수 산업의 거대 자본까지 총동원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헤순 페트롤리엄은 엠스퀘어의 지분 34%를 매입하고, 창업자 웬디 첸(Wendy Chen) CEO의 의결권 17%를 위임받아 총 51%의 의결권을 확보하는 계약을 지난 14일 체결했다고 공시했다. 투자 후 엠스퀘어의 기업가치는 최대 15억8800만 위안(약 2억 2340만 달러)으로 평가되며, 헤순은 약 5억4000만 위안(약 7600만 달러)을 투입할 예정이다.

美 제재 속 유일한 카드, '칩렛'


이번 인수의 핵심 배경에는 미국의 고강도 제재가 자리하고 있다. 미국은 중국이 5나노미터(nm) 이하 첨단 공정 기술과 엔비디아의 A100·H100 같은 고성능 AI 가속기에 접근하는 것을 철저히 차단했다. 첨단 AI 칩 개발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중국이 선택한 유일한 돌파구가 바로 '칩렛' 기술이다.

칩렛은 단일 칩(Monolithic Die)에 모든 기능을 구현하는 대신, 각기 다른 기능(CPU, GPU, I/O 등)을 가진 작은 칩(칩렛)들을 별도로 생산한 뒤, 이를 인터포저나 기판 위에서 레고처럼 연결해 하나의 고성능 칩으로 패키징하는 방식이다.

이 기술은 중국에게 '신의 한 수'로 통한다. 미국의 제재로 막힌 5나노 대신, 제재 영향이 덜한 14나노, 28나노 등 구형(Legacy) 공정에서 생산한 칩렛들을 묶어 5나노급 성능을 내는 AI 반도체를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칩렛은 중국이 미국의 '첨단 공정' 제재를 무력화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우회로'인 셈이다.

칩렛 생태계의 '핵심 접착제'


헤순이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인수한 엠스퀘어는 바로 이 칩렛 전략의 '심장'과도 같은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엠스퀘어는 칩렛과 칩렛을 초고속으로 연결하는 '인터커넥트(Interconnect) IP'와 '고속 인터페이스 IP' 분야에서 중국 내 독보적인 기술을 가진 팹리스다.

엠스퀘어는 업계 표준인 UCIe(Universal Chiplet Interconnect Express)를 비롯해 HBM, LPDDR, PCIe 등 칩렛 기반 AI 가속기 개발에 필수적인 모든 고속 인터페이스 IP 포트폴리오를 제공한다. 이들의 IP는 칩렛들을 연결하는 '핵심 접착제' 역할을 한다. 아무리 좋은 칩렛을 만들어도 이를 초고속·저지연으로 묶어줄 인터커넥트 기술이 없다면 고성능 AI 칩은 완성될 수 없다.
2021년 설립된 엠스퀘어는 이미 TSMC, 삼성전자 등 주요 파운드리와 5나노에서 55나노 공정에 이르는 파트너십을 맺고 있으며, 글로벌 메모리 기업과 AI 유니콘 등 60개 이상 고객사를 확보했다. 이들의 최신 UCIe IP는 이미 중국 내 고성능 AI 프로세서에 탑재돼 수만 개의 가속기 클러스터를 구현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중국 입장에선 해외 기술에 의존하지 않고 칩렛 생태계를 완성할 마지막 퍼즐 조각을 엠스퀘어가 쥐고 있는 것이다.

'국가적 과제'와 자본의 결합


반도체 '문외한'인 헤순 페트롤리엄의 참전은 이번 딜이 단순한 사업 다각화를 넘어선 '국가적 프로젝트'의 일환임을 시사한다.

2005년 설립된 헤순은 후난성의 민간 정유 유통사다. 이들이 반도체 경험 없이 막대한 자본이 필요한 팹리스 인수에 나선 것은, 반도체 자립을 최우선 국가 과제로 삼은 중국 정부의 정책적 방향성과 일치한다. 미국의 제재로 전통적인 IT 자본의 해외 투자가 막히자, 석유와 같은 내수 기반 산업의 거대 자본을 첨단 기술 분야로 이동시켜 자립 생태계를 구축하려는 시도다.

엠스퀘어 역시 거대 자본의 수혈이 절실했다. 2023년 7487만 위안의 순손실을 낸 엠스퀘어는 2024년 53만 위안의 소규모 흑자 전환에 성공했으나, 2025년 상반기 다시 975만 위안의 순손실을 기록했다. 기술력은 있으나 막대한 R&D 비용과 자본이 필요한 IP 및 칩렛 개발을 위해선 '석유 자본'의 든든한 뒷받침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번 인수는 엠스퀘어에 2028년까지 7억5000만 위안의 매출 달성 등 강력한 성과 목표를 내걸었다. 이는 헤순의 주주들에게 단순한 주가 부양용 인수가 아님을 증명하는 동시에, 엠스퀘어 창업자 웬디 첸(23년 경력의 대만 출신 전문가)에게도 확실한 성과를 요구하는 이중 포석이다.

결국 이번 딜은 미국의 제재를 넘어서려는 중국의 '칩렛 굴기', 안정적 자본이 필요한 '팹리스', 그리고 국가 정책에 부응하며 신성장 동력을 찾으려는 '전통 산업 자본'의 이해관계가 완벽하게 일치한 결과물이다. 석유에서 흘러나온 자본이 중국의 AI 반도체 심장을 다시 뛰게 할 수 있을지, 미·중 기술 패권 전쟁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가 될 전망이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