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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 디코드] 반도체·배터리 '기회의 땅' 아세안?…미·중 패권 전쟁엔 '속 빈 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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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 디코드] 반도체·배터리 '기회의 땅' 아세안?…미·중 패권 전쟁엔 '속 빈 강정'

말레이 '규제'·인니 '기술 종속'·태국 '낙후 인프라'…3중고에 신음
첨단 장비·소재 韓·中·日에 절대 의존…"지정학 위기 땐 공장 멈출 판"
사진=오픈AI의 챗GPT-5.1이 생성한 이미지이미지 확대보기
사진=오픈AI의 챗GPT-5.1이 생성한 이미지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이 글로벌 반도체와 전기차(EV) 배터리 공급망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은 저마다 '포스트 차이나'를 외치며 수십조 원 단위의 투자를 유치하고 있다. 하지만 화려한 청사진 뒤에는 냉혹한 현실이 도사리고 있다. 미·중 기술 패권 전쟁의 유탄을 그대로 맞는 지정학적 취약성, 그리고 선진국에 철저히 종속된 기술·장비 의존도가 아세안 제조업 굴기의 '아킬레스건'으로 지목된다.

29일(현지 시각) 외신 디지타임스 및 아푸르바 바네르지(Apoorba Banerjee)의 분석에 따르면, 아세안의 산업 고도화 전략은 '사상누각(沙上樓閣)'이 될 위기에 처해 있다. 겉으로는 공장이 들어서고 있지만, 핵심 소재인 희토류는 중국이 목줄을 쥐고 있고, 제조 장비는 미국의 수출 통제에 막혀 반입조차 쉽지 않은 '샌드위치' 신세이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 '실리콘 아일랜드'의 역설…美 규제에 발목


말레이시아는 페낭을 중심으로 '실리콘 아일랜드'를 꿈꾸며 가장 공격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2024년 초부터 2025년 6월까지 승인된 반도체 투자만 700억 링깃(약 24조 원)이 넘는다. 인피니언의 전력반도체 확장과 카셈(Carsem)의 AI 칩 패키징 시설이 대표적이다.

문제는 '장비'다. 첨단 패키징 라인을 돌리려면 특수 노광 장비와 정밀 계측기가 필수적인데, 이것들이 미국의 대중(對中) 수출 통제 그물망에 걸려 있다. 말레이시아 당국은 미국의 눈치를 보느라 2025년 7월부터 미국산 고성능 칩과 장비 선적 시 '최소 30일 사전 통보'라는 까다로운 규제를 신설했다.

이는 곧바로 현장의 병목현상으로 이어졌다. 패스트트랙 없는 통관 지연은 공장 가동 시점을 늦추고, 막대한 금융 비용 손실을 초래한다. 투자 유치에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정작 공장을 돌릴 '엔진(장비)'을 제때 들여오지 못하는 '규제의 덫'에 걸린 셈이다.

인도네시아, 니켈은 내 것, 기술은 남의 것…'무늬만 국산화'


인도네시아의 상황은 더욱 복잡하다. 전 세계 니켈 매장량 1위를 앞세워 CATL 등 글로벌 배터리 기업들을 불러들였지만, 실상은 '원자재 하청 기지'에 머물고 있다. 서자바주에 건설 중인 60억 달러 규모의 배터리 공장이 2026년 가동을 앞두고 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핵심 역량의 공백이 심각하다.

로이터 분석에 따르면, 인도네시아는 배터리 셀 제조의 핵심인 전구체, 양극재, 정밀 장비를 전적으로 중국, 한국, 일본에 의존하고 있다. 니켈만 캘 줄 알았지, 이를 고부가가치 소재로 가공하는 중간 단계 기술이 전무하다는 뜻이다.

특히 중국 의존도는 위협적이다. 중국 기업이 인도네시아 니켈 제련 용량의 75%를 장악하고 있다. 공장은 인도네시아 땅에 있지만, 수도꼭지(기술·자본 통제권)는 베이징이 쥐고 있는 형국이다. 중국의 정책 변화 한 번이면 인도네시아의 배터리 라인이 멈춰 설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오는 이유다. 한국 소재·장비 기업들이 이 틈새를 파고들 여지는 있지만, 인도네시아 입장에서는 심각한 전략적 리스크다.

태국. 전기차는 쏟아지는데 항구는 '70년대'


'아시아의 디트로이트'를 꿈꾸는 태국은 하드웨어 인프라의 한계에 봉착했다. BYD 등 중국 전기차 기업들이 라용 지역에 대거 진출해 연산 15만 대 규모의 공장을 돌리고 있지만, 이를 수출할 물류망이 구시대적이다.

주요 수출항인 람차방 항구는 대량의 기계 부품 처리에만 최적화돼 있다. 온도와 충격에 민감한 고부가가치 배터리 셀을 처리할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았다. 실제로 2025년 수출 성수기 당시 수작업 통관과 항만 적체로 부품 공급이 끊기는 사태가 발생했다. '저스트 인 타임(Just-in-Time)' 생산 방식이 생명인 자동차 산업에서 이 같은 물류 후진성은 치명타다.

"인프라·기술 없는 투자는 모래성"


아세안의 도전은 분명 기회다. 하지만 현재의 구조는 외부 충격에 너무나 취약하다. 중국의 희토류 보복, 미국의 장비 통제, 낙후된 자체 인프라라는 '3중 파고'가 덮치고 있다.

전문가들은 "아세안이 단순 조립 기지를 넘어 진정한 제조 강국이 되려면 예비 부품 공동 조달, 신뢰할 수 있는 무역 회랑 구축, 엔지니어 육성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화려한 투자 발표 뒤에 가려진 이 구조적 결함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아세안의 '반도체·배터리 굴기'는 지정학적 위기 시 가장 먼저 무너지는 모래성이 될 수 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