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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 30% 줄이자 4400조 청구서 날아왔다”… 유럽의 ‘녹색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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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 30% 줄이자 4400조 청구서 날아왔다”… 유럽의 ‘녹색 역설’

유럽, 20년간 탄소 30% 감축 성공했으나 산업 전기료 미국 대비 최대 4배 폭등
“전기료 감당 못 해”… 엑손모빌·이네오스 등 공장 폐쇄, 데이터센터 구축도 ‘올스톱’
화석 연료와 재생에너지 병행(AND)한 미·중 vs 급진적 대체(OR) 택한 유럽… 에너지 붕괴
유럽은 지난 20년 동안 추진해 온 공격적인 녹색 에너지 전환이 탄소 배출량 감축이라는 성과를 거뒀지만, 그 대가로 경제 침체와 산업 붕괴라는 혹독한 청구서를 받아 들었다. 이미지=제미나이 3 제공이미지 확대보기
유럽은 지난 20년 동안 추진해 온 공격적인 녹색 에너지 전환이 탄소 배출량 감축이라는 성과를 거뒀지만, 그 대가로 경제 침체와 산업 붕괴라는 혹독한 청구서를 받아 들었다. 이미지=제미나이 3 제공
에너지가 없으면 산업도 없고, 산업이 없으면 국방도 없다.” 이는 에바 부시 스웨덴 부총리 겸 에너지 장관이 유럽의 에너지 안보를 압축해 정리한 말이다.

유럽은 지난 20년 동안 추진해 온 공격적인 녹색 에너지 전환이 탄소 배출량 감축이라는 성과를 거뒀지만, 그 대가로 경제 침체와 산업 붕괴라는 혹독한 청구서를 받아 들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 1(현지시각) 유럽의 급진적인 기후 정책이 에너지 가격 폭등을 불러와 제조업을 마비시키고 정치적 혼란까지 야기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탄소 감축의 배신… 미국보다 4배 비싼 전기료 폭탄


유럽은 전 세계 어느 지역보다 탄소 중립에 앞장서 왔다. 2005년 이후 유럽의 탄소 배출량은 30%나 줄었다. 같은 기간 미국이 17% 감소한 것과 비교하면 괄목할 만한 성과다. 영국의 글로벌 에너지 싱크탱크 엠버(Ember)의 분석에 따르면, 유럽의 화석연료 전기 사용량은 20051525테라와트시(TWh)에서 올해 792TWh로 거의 절반이나 줄였다. 반면 세계의 공장중국은 같은 기간 2043TWh에서 6237TWh3배 이상 폭증했다.

문제는 비용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와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이 집계한 ‘2024년 국가별 전기 가격통계를 보면 유럽의 위기가 여실히 드러난다. 영국의 산업용 전기 요금은 킬로와트시(kWh)33.8센트, 이탈리아는 29.8센트, 독일은 26.7센트에 이른다. 이는 산업 경쟁국인 한국(14.0센트)이나 미국(8.1센트)보다 2~4배 높은 수준이다.

가정용 요금 역시 독일이 42.5센트로, 한국(13.0센트)3배가 넘는다. WSJ유럽연합(EU)의 중공업 평균 전기 요금은 미국의 약 두 배, 중국보다 50% 높다재생에너지 비중이 늘면서 가격 변동성 또한 커졌다고 지적했다.

공장은 멈추고 AI 혁신은 일시 정지


치솟는 에너지 비용은 기업들의 ()유럽을 부추기고 있다. 영국의 화학기업 이네오스(Ineos)는 지난 10월 높은 에너지 가격을 이유로 독일 내 공장 두 곳을 폐쇄한다고 발표했다. 엑손모빌(ExxonMobil) 역시 스코틀랜드 화학 공장을 닫고 유럽 철수를 시사했다. 디터 헬름 옥스퍼드대 경제정책 교수는 우리는 높은 전기 가격에 산업을 잃고 있다고 단언했다.

미래 산업의 핵심인 인공지능(AI)과 데이터 센터 구축도 차질을 빚고 있다. 아일랜드 국영 전력망 운영사는 전력 부족을 우려해 2028년까지 신규 데이터 센터 승인을 사실상 유예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는 데이터 센터 확장을 하려던 기업이 전력 공급을 받으려면 2035년까지 10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통보를 받기도 했다.
제롬 에반스 독일 데이터 센터 운영업체 최고경영자(CEO)저렴하고 풍부한 전기가 필수적인 AI 산업 유치 경쟁에서 유럽이 뒤처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공짜태양광의 함정… 숨겨진 시스템 비용


정책 입안자들은 태양광과 풍력이 무료 연료라며 경제적이라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간헐적인 발전 특성을 보완하기 위한 인프라 투자 비용이 막대하다고 지적한다. 해가 뜨지 않거나 바람이 불지 않을 때를 대비한 배터리 저장 장치와 예비 전력망 구축 비용이 전기료에 전가되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스코틀랜드의 시그린(Seagreen)’ 해상 풍력 발전소다. 영국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이 발전소는 아이러니하게도 전기를 생산하지 않는 대가로 매년 수천만 파운드를 보상받는다. 발전소를 풀가동할 경우 노후화된 전력망이 과부하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신 전력 공백을 메우기 위해 남부의 가스 발전소를 돌려야 한다.

고든 휴즈 전 세계은행 에너지 자문위원(에든버러대 교수)전환 비용은 결코 제대로 인정되거나 인식되지 않았다엄청난 부정직함이 얽혀 있다고 비판했다. 골드만삭스는 유럽이 향후 10년간 전력 인프라에 최대 3조 유로(5114조 원)를 쏟아부어야 할 것으로 추산했다.

‘AND’ 전략 버리고 ‘OR’ 택한 대가


유럽의 실패는 에너지 전환 방식에서 기인한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미국, 중국, 인도 등은 재생에너지를 늘리면서도 화석연료 발전소를 유지하거나 확대하는 그리고(AND)’ 전략을 채택했다. 반면 유럽은 화석연료를 퇴출하고 그 자리를 재생에너지로 채우려는 또는(OR)’ 전략을 고수했다.

영국은 주요 7개국(G7) 중 최초로 석탄 화력 발전소를 완전히 폐쇄했고, 신규 해상 석유·가스 시추도 금지했다. 독일 역시 원전을 폐쇄하고 가스망 축소를 계획 중이다. 그 결과, 대체 에너지가 충분히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존 에너지원을 없애버리는 에너지 절벽에 직면했다.

에바 부시 스웨덴 장관은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 속에서 에너지 시스템을 결정할 때 이념적 동조를 해서는 안 된다며 독일의 탈원전 및 재생에너지 일변도 정책을 꼬집었다.

무너진 가치 사슬… 정치 지형도 흔든다


비싼 청구서는 정치 지형까지 흔들고 있다. 프랑스, 독일, 영국 등에서는 녹색 전환 비용에 반발하는 우익 포퓰리즘 정당의 지지율이 상승세다. 노르웨이에서는 재생에너지 관련 EU 규정 도입을 놓고 연립 정부가 붕괴하기도 했다.

영국 정부는 최근 여론 악화를 의식해 재생에너지 보조금을 전기 요금에서 분리해 세금으로 충당하겠다고 발표했다. 또 소형 모듈 원자로(SMR) 건설 계획을 내놓는 등 정책 수정에 나섰다.

피터 헌츠먼 헌츠먼(Huntsman)CEO는 지난 10년간 영국 내 직원 수를 2000명에서 70명으로 줄였다며 이렇게 토로했다. “20년 전만 해도 영국은 저렴한 북해 에너지 덕분에 가장 경쟁력 있는 지역이었다. 하지만 이제 가치 사슬 전체가 사라졌다.”라고 높은 전기 요금이 산업 기반 전체를 뒤흔들었다고 말한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