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세대 전투기와 방공 체계를 뒤로 미루고 북극 항로와 노동력 이동을 앞세운 인도와 러시아 정상회담 결정은 군사 거래 중심 동맹에서 경제 기반 동맹으로 이동하는 대전환을 알리며 한국의 해양 전략과 국익 재설정을 요구한다
이미지 확대보기본지는 인도-캐나다 합작 군사 안보 전문 매체인 유라시안타임즈(EurAsian Times)가12월6일 모디 인도 총리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상회담 이후 방산 계약이 빠진 배경과 쇄빙선 협력, 노동력 이동, 교역 구조 개편을 자세히 보도한 내용을 바탕으로 이 같은 합의가 국제 질서에서 갖는 함의와 함께 한국의 안보와 국익 측면에서 갖는 의미를 분석했다.
무기 계약이 빠진 공동성명, 후퇴가 아니라 전환의 신호
유라시안타임즈는 이번 정상회담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러시아 고위 인사들의 발언을 인용하며 전략 무기, 항공, 우주 등에서 굵직한 합의가 나올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고 전했다. 그러나 회담을 마치고 공개된 공동성명에서 눈에 띄는 것은 없다기보다 빠져 있는 목록이었다. 차세대 스텔스 전투기, 추가 장거리 방공 체계, 러시아형 소형 원전 등 그간 거론되던 굵직한 방산 프로젝트가 한 줄도 언급되지 않았다.
동 매체는 이것을 단순한 실패나 결렬이 아니라 구조적 제약의 결과라고 읽는다. 미국의 제재로 러시아와 달러 결제가 사실상 막힌 상황에서 인도는 루피화 결제를 선호하지만, 러시아는 루피를 받아도 쓸 곳이 마땅치 않다. 인도가 러시아로부터 에너지와 자원을 대규모로 사들이면서 교역 불균형이 심화되었지만, 인도의 대러 수출은 아직 그만큼 늘지 못했다. 이 상태에서 추가적인 대형 무기 계약을 체결하면 러시아는 루피 잔고만 더 쌓이게 된다.
즉 인도와 러시아 양국은 서로 원하지만 결제와 공급망, 산업 기반이 받쳐주지 않는 상황이다. 그래서 두 나라는 당장 눈에 띄는 무기 계약 대신, 그 무기를 나중에라도 사고팔 수 있는 경제 기반을 먼저 만들겠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쇠빙선과 북극항로, 차세대 전략 회랑으로서의 의미
유라시안타임즈가 특히 비중 있게 다룬 부분은 북극항로와 쇄빙선 협력이다. 공동성명에는 인도 조선소와 러시아 조선 산업이 얼음을 뚫고 항해할 수 있는 선박을 공동 설계하고 현지 생산까지 염두에 둔 협력 틀이 담겼다. 또한 인도 선원이 북극 해역을 운항할 수 있도록 러시아가 항해 훈련과 운항 경험을 공유하는 양해 각서도 포함되었다.
이는 단순히 선박 몇 척을 함께 만든다는 수준이 아니다. 러시아는 북극해 연안 항로를 통해 극동과 유럽을 잇는 새로운 물류 축을 키우겠다는 장기 비전을 갖고 있다. 지금은 연간 화물 처리량이 제한적이지만, 러시아는 이 항로를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새로운 전략 통로로 키우겠다는 목표를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문제는 이 항로를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쇄빙선과 얼음 대응 선박이 전세계적으로 크게 부족하다는 점이다.
인도는 여기서 기회를 보았다. 자국 조선소와 철강, 기계 산업을 활용해 얼음대비 선박을 대량 생산하고, 북극항로에 진입하려는 각국 해운사에 선박과 선원을 함께 공급할 수 있는 입지를 노리는 것이다. 유라시안타임즈는 이것이 인도에게 단순한 수출 사업이 아니라, 유라시아를 잇는 새로운 교역 회랑에서 주도권을 얻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라고 해석한다.
인력 이동 협정이 보여주는 보이지 않는 전략 축
유라시안타임즈가 강조하는 또 하나의 축은 노동력 이동이다. 공동성명에는 한 나라의 시민이 상대국에서 일정 기간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제도적 틀을 마련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러시아는 전쟁과 인구 감소, 산업 재편 때문에 제조와 건설, 서비스 전반에서 노동력이 부족하고, 인도는 젊고 값싼 인구를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다.
양국은 이미 의료, 건설, 봉제, 소규모 제조 등에서 인도 노동자를 러시아로 보내고 있지만, 이는 아직 규제와 쿼터 속에 묶여 있는 제한적 흐름이다. 이번 합의는 이러한 흐름을 체계화하고 규모를 키우기 위한 제도적 기반이다. 인도 입장에서는 일자리가 부족한 국내 청년들을 해외로 보내면서 송금을 통해 외화를 확보할 수 있고, 러시아는 산업 복구의 속도를 높일 수 있다.
이 인력 이동은 단기 프로젝트가 아니라 관계의 심층을 바꾸는 요인이다. 무기 계약은 정권이 바뀌면 수정되지만, 수만 명 단위의 노동자와 가족, 송금과 문화 교류는 오래 지속된다. 유라시안타임즈는 바로 이 점에서 두 나라의 관계가 군사 거래 중심에서 인구와 산업, 물류와 교역이 결합된 장기 구조로 옮겨가고 있다고 강조한다.
범위와 구조를 바꾸는 인도산 수출의 확대
상기 보도에 따르면 인도의 대러 수출은 이미 눈에 띄게 구조가 바뀌고 있다. 장비와 부품, 공작 도구 등 러시아 산업 현장을 떠받치는 기술 상품들이 늘어나고, 의약품과 제네릭 약품(동등 의약품)이 러시아 약국과 병원에서 점차 유럽 브랜드를 대체하고 있다. 인도산 가공식품과 조리식품, 향신료와 차, 커피, 쌀, 의류, 각종 소비재는 러시아 대형 마트와 소매점에서 흔한 풍경이 되어 가고 있다.
인도 수출업계 관계자들은 유럽 브랜드가 빠져나간 틈새를 인도 기업이 빠르게 메우고 있다고 평가한다. 이를 위해 러시아의 비관세 장벽 완화와 검역 기준 조정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요구도 커지고 있다. 특히 수산물과 농산물 분야에서는 검역과 인증 문제가 풀리면 수출이 몇 배로 뛸 수 있다는 전망이 기사에 실려 있다.
이러한 흐름은 러시아 시장이 점차 인도 상품과 인도 브랜드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의미한다. 이는 단지 수출액의 증대를 넘어, 러시아의 산업과 소비 구조에 인도라는 이름이 깊이 들어가는 과정이다.
국제 질서에서 본 인도–러시아 경제 동맹의 의미
이제 시야를 넓혀 보자. 이 모든 것은 무엇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가.
첫째, 인도와 러시아는 무기 중심의 수직적 관계에서 경제와 인구, 해상 교역을 공유하는 수평적 관계로 옮겨가고 있다.
과거에는 러시아가 무기를 공급하고 인도가 구매하는 구조였다면, 이제는 인도가 선박과 노동력을 제공하고 러시아가 항로와 자원을 제공하는 상호 의존 구조로 변하고 있다.
둘째, 이는 서방 제재 체제의 부작용이기도 하다.
미국과 유럽이 러시아를 금융과 에너지 시장에서 배제할수록 러시아는 인도와 중국, 중동 국가들과의 연계를 통해 대체 회로를 만들려 한다. 인도는 이 과정에서 러시아에게서 싸게 에너지를 들여올 뿐 아니라, 러시아 시장을 발판으로 새로운 교역 기반을 확보하는 영리한 외교를 펼치고 있다.
셋째, 이 흐름은 세계 질서를 미국과 중국의 양자 구도가 아니라, 인도와 러시아, 중동, 아프리카 등 다양한 축이 얽힌 다극 체제로 끌고 가는 힘으로 작용한다.
인도는 러시아와의 관계를 통해 서방과의 협상에서 레버리지를 얻고, 러시아는 인도와의 협력을 통해 중국 의존을 어느 정도 상쇄하려 한다. 이 다층적 구조는 어느 한 강대국이 단독으로 규칙을 밀어붙이기 어려운 환경을 만든다.
한국 안보에 주는 신호와 도전
한국의 안보와 외교는 이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우선, 러시아가 인도와의 관계를 중시할수록 동북아에서 한국과의 관계는 상대적으로 후순위로 밀릴 위험이 있다. 제재 이후 러시아는 한국과의 경제 협력이 크게 위축된 반면, 인도와는 에너지와 군사, 산업 전반에서 관계를 넓히고 있다. 한국이 러시아와의 관계를 장기적으로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에 대한 전략적 고민이 필요하다.
또한 인도는 이미 미국과 안보 협력을 강화하면서도 러시아와의 방산 협력을 끊지 않는 이중 전략을 구사해 왔다. 이번 회담은 방산 협력을 잠시 멈춘 것이 아니라 좀 더 넓은 기반 위에 다시 얹기 위한 준비 단계로 볼 수 있다. 장차 러시아의 차세대 전투기와 방공 시스템, 신형 원전이 인도 시장에 다시 등장한다면, 그것은 미국과 러시아 양쪽으로부터 전략 자율성을 유지하려는 인도의 장기 선택이 될 것이다.
이때 한국이 미국, 일본과 함께 인도 태평양 전략의 한 축으로 인도와 협력할 때, 인도가 러시아와의 협력을 근거로 어느 지점에서 거리를 두려 할지, 또는 또 다른 형태의 균형 전략을 구사할지 면밀한 관찰과 대응이 필요하다.
한국 경제와 국익에 대한 함의와 대응 전략
경제와 산업 측면에서 인도–러시아의 움직임은 한국에게 도전이자 기회다.
한국 조선업은 오래전부터 쇄빙선과 극지 대응 선박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인정받아 왔다. 그러나 인도가 러시아와 손잡고 얼음 대비 선박 분야(얼음을 부수며 항로를 개척하는 쇄빙선과 쇄빙 능력은 없으나 빙산이 산재한 해역을 독자적으로 항해할 수 있도록 철판을 강화한 내빙 선박 등 두 유형의 선박이 있음)에서 새로운 공급 중심지로 떠오른다면, 이는 한국 조선업에 장기적인 경쟁 요인이 될 수 있다. 특히 북극항로가 본격적으로 상업화될 경우, 한국은 단순히 선박을 건조하는 수준을 넘어 항로 설계와 운항, 화물 보험과 금융, 항만 인프라까지 포괄하는 종합 전략이 필요하다.
동시에, 인도가 북극항로와 러시아 시장에 깊이 들어갈수록 한국에게도 새로운 파트너십의 공간이 열릴 수 있다. 한국의 조선 기술과 인도의 인력, 러시아의 항로와 자원을 결합하는 삼각 협력 모델은 아직 본격적으로 논의된 적이 없다. 제재라는 현실적 제약을 감안하더라도, 중장기적으로는 이런 구도가 한국에게도 중요한 선택지가 될 수 있다.
또한 인도 의약품과 소비재가 러시아에서 유럽 브랜드를 대체하는 사이, 한국 브랜드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이 공백을 단순히 제재 탓으로만 돌릴 것이 아니라, 제재 환경 속에서도 합법적인 범위 내에서 기술, 부품, 서비스 분야의 협력 여지를 꾸준히 탐색해야 한다. 러시아와 인도, 중동, 아프리카를 잇는 새로운 물류와 에너지 네트워크가 형성될 때, 한국이 완전히 바깥에 서 있을 것인지, 아니면 특정 분야에서라도 교차점을 만들어 갈 것인지가 중장기 국익을 가를 수 있다.
인도와 러시아의 이번 선택은 하나의 시대가 끝나고 다른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말해 준다. 과거의 전략 동맹은 무기를 중심으로 맺어졌지만, 새로운 전략 동맹은 해상 교역과 에너지, 인력과 산업을 함께 묶는 경제 기반 위에서 구축된다. 무기 계약이 빠진 공동성명은 그런 의미에서 공백이 아니라 전환의 선언문에 가깝다.
한국은 이 같은 전환을 단순히 관찰하는 것으로만 그쳐서는 안 된다. 북극항로와 인도–러시아 축, 신냉전과 다극 질서라는 큰 그림 속에서, 한국이 어떤 해양 전략과 에너지 전략, 산업 전략을 선택할 것인지가 앞으로의 10여년을 결정할 것이다. 무기가 아니라 경제 기반이 전략을 규정하는 시대에, 한국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이 구조적 변화를 읽고 선제적으로 움직이는 능력이다.
이교관 글로벌이코노믹 대기자 yijion@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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