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유럽 질서와 자유주의 패권 전략의 붕괴가 드러낸 깊은 균열
韓, 현실주의 시대에 미 확장억지가 언제든 약화할 수 있는 만큼 자체 핵무장을 서둘러야
韓, 현실주의 시대에 미 확장억지가 언제든 약화할 수 있는 만큼 자체 핵무장을 서둘러야
이미지 확대보기동결 자산 1천8백억 유로를 앞에 둔 유럽의 침묵은 무엇을 말하는가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EU 내부에서는 러시아의 동결 자산을 우크라이나 지원에 활용해야 한다는 요구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폴란드를 비롯한 동부 유럽 국가들은 이 거대한 자금을 배상금 대출 형태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EU 집행위원회와 유럽이사회에 긴급 성명을 내고 있다. 그러나 정작 브뤼셀의 핵심 국가들인 독일과 프랑스, 그리고 EU 집행부는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조심스럽게 시간을 끌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금융 신뢰도와 법적 안정성, 유럽 금융시장의 위상 훼손 등을 이유로 들지만, 실상 이 조심스러움의 깊은 곳에는 전쟁 그 자체를 낳은 서방의 전략적 오판과 그 후과가 놓여 있다.
EU가 러시아 자산 압류를 주저하는 것은 단순한 회계와 금융법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유럽 스스로가 지난 십여 년 동안 추구해온 자유주의 패권 전략의 실패를 인정해야 하는 정치적 결정이며, 전후 유럽 질서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선언해야 하는 문제다.
유럽이 직면한 두려움의 기원은 자유주의 패권 전략의 오판에 있다
EU는 러시아의 외환보유고를 몰수해 우크라이나 전쟁 비용을 보전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이유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서방의 자유주의 패권 전략이 낳은 구조적 결과임을 유럽 스스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서유럽은 지난 십여 년 동안 러시아를 서구식 자유주의 질서에 편입시키겠다는 목표 아래 나토 동진을 지속했고, 마침내 러시아와 국경을 접한 우크라이나를 나토로 끌어들이려 했다. 이는 러시아의 핵심 안보 이익을 정면으로 자극했고, 결국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파국을 불러왔다. 자유주의 패권 전략의 핵심 목표였던 러시아의 서구화는 완전히 실패했을 뿐 아니라, 유럽 전역을 재무장 국면으로 밀어넣으며 전후 질서를 흔들어놓았다.
EU의 동결 자산 압류 주저는 단지 러시아와의 관계 악화를 우려해서가 아니라, 이 전쟁을 초래한 전략이 잘못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공식 인정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독일의 재무장 부상과 프랑스의 불안은 동결 자산 논쟁의 또 다른 얼굴이다
유럽은 지금 러시아와의 충돌로 인한 안보 공백을 메우기 위해 재무장을 선택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독일이 있다. 독일은 28퍼센트에 달하는 국방비 증액과 함께 방산 산업을 본격 재건하면서 유럽 억지력의 엔진으로 부상했다. 라인메탈의 급성장은 독일이 유럽 군사 능력의 핵심 축이 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러나 이 변화는 프랑스에게 전략적 충격이다. 프랑스는 오랫동안 유럽 방위의 정치적 리더십을 유지해 왔으나, 독일이 방산 생산능력과 탄약 공급망을 장악하는 순간 유럽 안보의 중심축이 파리에서 베를린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EU가 동결 자산 압류를 주저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힘의 이동이다. 러시아 자산 압류와 같은 결정은 유럽의 전략 체계를 영구적으로 재편하는 결과를 초래하며, 그 과정에서 프랑스가 더 큰 영향력을 상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은 러시아와의 관계를 영구적으로 단절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러시아 동결 자산을 압류하는 순간 EU와 러시아의 관계는 수십 년 동안 회복 불가능한 갈등 상태로 고착될 수밖에 없다. 유럽의 다수 정치 지도자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활동적 국면이 종료된 이후 러시아와 일정 수준의 경제·외교 관계를 복원할 가능성을 여전히 열어두고 싶어 한다.
자산 압류는 이 가능성을 완전히 차단하는 선택이 된다. 이는 단순한 경제 조치가 아니라 유럽 외교정책의 전환점이자, 전후 유럽 질서의 종언을 공식화하는 상징적 행위다. 유럽이 이 결정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러시아와의 영구적 적대관계를 감당할 정치적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전략 변화는 본지가 제기해 온 질문을 다시 유럽으로 돌려놓는다
본지 글로벌이코노믹은 지난 11월 하순부터 워싱턴과 브뤼셀(EU 본부 소재)을 향해 자유주의 패권 전략의 폐기를 요구하고 현실주의적 세력균형 체제로 복귀해야 한다고 촉구해 왔다. 미국의 동맹국 중에서 이 같은 의제를 제기한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다. 이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단순한 지역 분쟁이 아니라, 미국이 선택한 잘못된 대전략이 초래한 구조적 충돌이라는 분석을 기반으로 제기한 것이다.
그리고 최근 레이건 국방포럼에서 미 국방장관 헤그세스는 자유주의 패권 전략의 폐기를 공식 선언하며 미국의 안보 전략을 현실주의적 억지와 세력균형 중심의 체제로 재편하겠다고 밝혔다. 미국의 전략 변화는 서방이 이제야 본지가 제기해온 자유주의 패권이라는 대전략이 모든 문제의 중심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이 변화는 동결 자산 압류 논쟁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자유주의 패권 전략의 실패를 인정한 미국과 달리 유럽은 여전히 그 전략의 잔재 속에서 방향을 잃고 있기 때문이다.
EU는 지금 전략적 선택을 미루고 있을 뿐, 결정을 피할 수는 없다
EU는 동결 자산 압류라는 급진적 조치를 취할 경우 유럽 금융시장의 신뢰도 하락, 제3국 자산의 유럽 이탈, 러시아와의 전면적 대립 등을 우려하며 신중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장기전으로 접어든 우크라이나 전쟁의 현실 속에서 유럽이 감당해야 하는 비용은 커지고 있다. 미국은 더 이상 전쟁 비용을 주도적으로 부담하지 않으며, 유럽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는 시대가 이미 도래했다.
EU는 결국 선택해야 한다. 러시아와의 갈등을 장기적으로 감수하면서 자유주의 패권 전략의 잔재를 이어갈 것인지, 아니면 현실주의적 세력균형 체제 속에서 유럽 안보를 재설계할 것인지라는 질문이 지금 유럽의 앞에 놓여 있다.
한국이 읽어야 할 전략적 메시지는 명확하다
EU의 동결 자산 압류 주저는 단순한 법적·재정적 갈등이 아니라 하나의 시대가 끝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이다. 자유주의 패권 전략은 이미 기능을 상실했고, 미국은 이를 공식적으로 폐기했으며, 유럽은 그 잔재를 붙들고 흔들리고 있다. 한국은 이 전환 속에서 스스로의 전략 체계를 다시 설계해야 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보여주는 교훈은 비현실적 목표 설정이 언제든 지정학적 충돌로 이어진다는 점이며, 한국 역시 현실적 억지력과 자율적 안보 능력을 갖추지 않으면 외부 전략 변화의 직접적인 영향을 피할 수 없다.
서유럽이 주저하고 있는 현 상황은 한국에게 질문한다. 국제 질서가 다시 현실주의 세력균형의 시대로 돌아가는 이 순간, 한국은 어떤 전략적 선택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미국의 확장억지가 언제 어떻게 북한과 더 나아가 중국에 의한 핵 위협 고조 시 무너질지 모르는 만큼 워싱턴을 상대로 자체 핵무장 의제를 발전시켜나감으로써 빠른 시일 내 현실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으로 모아진다.
이교관 글로벌이코노믹 대기자 yijion@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