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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 디코드] 'AI 폰' 환상 깨졌다…대만 팹리스, 생존 위해 '드론·로봇'으로 대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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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 디코드] 'AI 폰' 환상 깨졌다…대만 팹리스, 생존 위해 '드론·로봇'으로 대탈출

2026년 팹리스 매출 2위 자리 中에 뺏길 위기…'클라우드 독주'에 소비자 시장 정체
'탈중국' 기조 업고 드론·스마트 콕핏 등 산업용 틈새시장서 활로 모색
대만 팹리스 기업들이 클라우드 AI의 독주와 중국의 추격에 맞서 소비자 가전 시장을 넘어 드론, 산업용 로봇 등 비소비자용 엣지 AI 시장으로 전략을 수정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오픈AI의 챗GPT-5.1이 생성한 이미지이미지 확대보기
대만 팹리스 기업들이 클라우드 AI의 독주와 중국의 추격에 맞서 소비자 가전 시장을 넘어 드론, 산업용 로봇 등 비소비자용 엣지 AI 시장으로 전략을 수정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오픈AI의 챗GPT-5.1이 생성한 이미지

2025년 반도체 시장이 기대했던 '엣지(Edge) AI'의 폭발적인 수요 증가는 나타나지 않았다. 여기에 중국의 거센 반도체 국산화 드라이브까지 겹치며 글로벌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시장의 전통적 강자인 대만 기업들이 벼랑 끝 전술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PC와 스마트폰 등 주력해 온 소비자 가전 시장의 성장 정체를 인정하고, 자율주행·드론·로봇 등 비(非)소비자용 틈새시장(Niche Market)으로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10일(현지시각) 대만 IT 전문 매체 디지타임스에 따르면, 대만 IC(집적회로) 설계 업계는 현재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소비자 가전의 울타리를 넘어 더 넓은 'AIoT(사물지능융합기술)' 영역으로 확장을 서두르고 있다. 디지타임스는 주요 조사기관들의 예측을 인용해, 2026년이면 대만 팹리스 기업들이 지켜온 국가별 매출 순위 2위 자리를 중국 기업들에 내줄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中 맹추격에 흔들리는 '팹리스 2위' 대만


대만 반도체 설계 업계에 켜진 경고등은 단순한 순위 하락을 넘어선 구조적 위기다.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그동안 대만 팹리스들이 PC와 스마트폰이라는 거대 시장에만 안주해 왔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온다. 현재의 인공지능(AI) 붐 속에서도 이들 주요 소비자 가전제품의 성장은 완만할 뿐, 시장의 판도를 바꿀만한 폭발적인 모멘텀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디지타임스는 대만 기업들이 엣지 AI 시장의 기회를 더 빠르고 광범위하게 포착하기 위해 전통적인 소비자 가전 영역을 벗어나야 한다는 절박함을 느끼고 있다고 전했다. 이는 중국의 반도체 자립 정책으로 인해 기존 시장에서의 입지가 좁아지는 상황에서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분석된다.

클라우드 속도전 못 쫓아가는 엣지 AI


전 구글 대만 총괄대표인 리펑 첸(Lee-Feng Chien)은 디지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엣지 AI 개발이 당초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으로 '클라우드 AI의 압도적인 발전 속도'를 지목했다. 그는 "거의 모든 자원과 기술적 돌파구가 클라우드에 집중되다 보니, 일반 소비자들이 엣지 AI의 진보를 체감하거나 관련 애플리케이션을 효과적으로 구동하기 어려운 환경이 조성됐다"고 진단했다.

실제로 2025년 시장에 출시된 'AI 탑재' 스마트폰과 PC들은 성능 면에서 소비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데 실패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클라우드 기반의 AI 모델들이 하루가 다르게 고도화되는 동안, 기기 자체에서 연산을 수행하는 온디바이스(On-device) 형태의 엣지 AI는 하드웨어의 제약 등으로 인해 그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하지만 엣지 AI 시장이 완전히 정체된 것은 아니다. 리펑 첸 전 대표는 "엣지 AI의 진보는 자율주행, 의료 기술, 공장 자동화, 그리고 다양한 AIoT 기기 등 눈에 잘 띄지 않는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강조했다. 대중의 이목이 쏠린 스마트폰이 아닌, 분산된 틈새시장에서 AI 역량의 실질적인 개선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의미다.

스마트 콕핏·로봇…'보이지 않는' 시장을 잡아라

디지타임스가 분석한 2025년 대만 IC 설계 기업들의 동향을 살펴보면, 예년과 달리 비소비자용 애플리케이션 육성에 대한 관심이 뚜렷하게 증가했다. 대표적인 분야가 전장(자동차 전자장비) 시장이다. 전체적인 자동차 전자 시장의 수요는 완만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만, 대만 칩 제조사들은 '스마트 콕핏(Smart Cockpit)' 시스템을 중심으로 시장 침투를 가속화하고 있다. 차량용 컴퓨팅 칩부터 주변 부품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성능을 앞세워 성과를 내고 있다.

AI 가전과 상업용 로봇을 겨냥한 AIoT 컴퓨팅 칩 개발 열기도 뜨겁다. 산업 등급의 기술 전문성을 보유한 기업들은 공장 제어 및 자동화 애플리케이션 분야에서 입지를 강화하고 있다. 이는 대량 생산·대량 소비의 B2C(기업-소비자 간 거래) 시장에서 벗어나, 고부가가치 창출이 가능한 B2B(기업 간 거래) 및 특수 목적 시장으로 무게 중심을 옮기려는 전략적 판단이다.

미·중 갈등의 반사이익…'드론'이 뜬다


지정학적 긴장 관계 속에서 대만 팹리스들이 발견한 새로운 기회의 땅은 '드론'이다. 디지타임스는 올해 대만에서 가장 주목받는 산업 중 하나로 드론 섹터를 꼽으며, 주요 제조업체들의 사업 확장이 눈에 띈다고 보도했다.

과거 대만 공급업체들은 소량의 기본 영상 처리 및 컴퓨팅 칩을 조용히 공급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나 유럽, 미국, 일본 등 서방 세계를 중심으로 '탈중국(De-China)' 공급망 구축 요구가 거세지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중국산 드론과 부품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이 대만 기업들에는 절호의 기회로 작용한 것이다.

대만 기업들은 투자를 늘리고 사업 확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들의 전략은 명확하다. 진입 장벽이 높은 군사 및 산업용 하이엔드 시장을 먼저 공략한 뒤, 그 기술력과 레퍼런스를 바탕으로 주류 상업용 드론 시장에 진입해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겠다는 구상이다. 일부 IC 설계 업체들은 현재의 미·중 갈등 구도를 고려할 때, 드론이야말로 가장 유망한 엣지 AI 디바이스 분야라고 평가하고 있다.

'대박' 없는 폰·PC…장기전 대비해야


대만 IC 설계 업계는 AI 스마트폰과 AI PC의 중장기적 전망에 대해서는 여전히 긍정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지속적인 기술 업그레이드가 결국 소비자들의 기기 교체 주기를 자극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볼 때 이들 기기가 이미 '성장 정체기(Growth Plateau)'에 도달했다는 점은 부인하지 않는다. 출하량 규모 자체는 크지만, 폭발적인 성장 잠재력은 제한적이라는 의미다.

오히려 새로운 기술을 더 빠르게 수용하는 신흥 AI 애플리케이션들이 단기적으로는 매출 기여도가 낮을지라도, 일단 성장 잠재력이 현실화하면 즉각적인 운영 지원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 사이에 낀 대만 팹리스 기업들에게, 주류 소비자 시장이 아닌 틈새 엣지 AI 시장은 단순한 대안이 아닌 생존을 위한 돌파구가 되고 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