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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TI·인텔·AMD, "러시아 미사일 부품 불법 공급" 피소… 텍사스서 집단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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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TI·인텔·AMD, "러시아 미사일 부품 불법 공급" 피소… 텍사스서 집단소송

우크라 유족 20명, 1인당 100만 달러 배상 청구… "수출통제 고의 회피"
키이우 어린이병원 피격 의사도 원고 참여… "반도체 공급망 책임론" 쟁점 부상
'제3국 세탁' 뚫린 공급망 책임론 부상… 삼성·SK 등 K-반도체도 '소송 불똥' 우려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를 포함한 미국의 주요 반도체 기업들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사용된 미사일과 드론에 핵심 부품을 공급했다는 혐의로 집단 소송을 당했다. 이미지=제미나이3이미지 확대보기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를 포함한 미국의 주요 반도체 기업들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사용된 미사일과 드론에 핵심 부품을 공급했다는 혐의로 집단 소송을 당했다. 이미지=제미나이3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를 포함한 미국의 주요 반도체 기업들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사용된 미사일과 드론에 핵심 부품을 공급했다는 혐의로 집단 소송을 당했다. 미국의 첨단 기술이 제재망을 뚫고 적성국 무기 체계에 악용되는 현실에 대해 제조사의 책임을 묻는 첫 대규모 법적 대응이다.

미국 댈러스모닝뉴스는 지난 10(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가족을 잃거나 부상을 입은 피해자 20명이 텍사스 댈러스 지방법원에 TI, 인텔(Intel), AMD, 그리고 유통업체 마우저 일렉트로닉스(Mouser Electronics)를 상대로 소장을 제출했다고 보도했다.

"이익 우선, 고의적 눈감기"... 징벌적 손해배상 청구


이번 소송을 이끄는 미칼 왓츠(Mikal Watts) 변호사는 기자회견에서 "미국 기업들이 제품이 엉뚱한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아야 할 의무보다 이익 극대화를 선택했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소장에 따르면 원고들은 이들 기업이 중대한 과실, 사기적 은폐, 그리고 러시아와 이란으로의 수출 제한을 회피하기 위한 공모 혐의가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러시아군이 사용하는 미사일과 이란제 드론의 잔해를 법의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TIAMD, 인텔 등이 제조한 마이크로칩이 반복적으로 발견됐다는 점을 핵심 증거로 제시했다.

미국 정부는 법적으로 자국 기업이 러시아와 이란에 기술을 직접 판매하는 것은 물론, 중개상을 통한 간접 판매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왓츠 변호사는 "기업들이 '푸틴에게 직접 팔지 않는다'는 식의 형식적인 확인 절차에만 의존하며, 실제로는 제품이 우회 경로로 유출되는 것을 묵인해 왔다"고 지적했다.

원고 측은 사망자 14명과 부상자 6명을 대리해 각 청구당 100만 달러(146000만 원) 이상의 손해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원고 측은 이들 기업이 제3국을 통한 우회 수출을 묵인하며 러시아와 이란의 무기 제조에 기여했다고 주장한다.

"아이들을 향한 전쟁"... 어린이 병원 피격 피해자도 원고 참여


이번 소송에는 지난해 7월 발생한 키이우 '오흐마디트(Okhmatdyt) 어린이 병원' 미사일 폭격 피해자들도 원고로 참여해 충격을 주고 있다.

당시 병원에서 근무하다 중상을 입은 의사 올하 바비체바는 소송 자료를 통해 참혹했던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그녀는 "아이들의 혈액투석 절차를 마무리하기 위해 지하실로 대피하던 중 폭발이 일어났다""두개골과 안와 골절상을 입었고, 신경 손상으로 오른팔의 감각을 잃어 더 이상 의료 행위를 할 수 없게 됐다"고 밝혔다.
왓츠 변호사는 최근 우크라이나 현지 조사를 마치고 돌아왔다며, 러시아 미사일이 주거 지역 놀이터를 타격한 사례를 언급했다. 그는 "우리는 지금 아이들을 목표로 하는 전쟁 전략을 목격하고 있다""미국 기술이 아이들을 살해하는 무기에 쓰이는 것을 막는 것이 의뢰인들의 주된 목표"라고 강조했다.

기업들 "법적 절차 준수" 해명... 텍사스 주법 적용이 관건


피소된 기업 중 마우저 일렉트로닉스의 케빈 헤스 마케팅 수석 부사장은 이메일 성명을 통해 "우리는 법적 절차를 깊이 존중하며, 언론이 아닌 법정에서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TIAMD, 인텔 측은 즉각적인 논평을 내놓지 않았다.

주목할 점은 원고 측이 연방법이나 국제법이 아닌 '텍사스 주법'을 근거로 소송을 제기했다는 것이다. 왓츠 변호사 팀은 미국 기업들이 텍사스 법에 따라 우크라이나 시민들에게 '관습법상 주의 의무(Common law duty of care)'를 지닌다고 주장했다. 이는 전쟁 지역인 우크라이나 현지에서 소송을 진행하기 어렵고, 미국 내에서 기업의 직접적인 과실 책임을 묻기 위한 전략으로 풀이된다.

왓츠 변호사는 과거 캘리포니아 산불 피해자를 대리해 PG&E로부터 135억 달러(197900억 원)의 합의금을 이끌어내는 등 대규모 집단 소송에서 승소한 이력이 있어, 이번 소송이 미칠 파장에 업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회색지대' 뚫린 K-반도체... 삼성·SK'공급망 책임론' 긴장


미국 법원이 이번 집단소송에서 원고 측이 주장하는 '관습법상 주의 의무(Duty of Care)'를 인정할 경우, 그 파장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한국 반도체 기업으로 번질 수 있다.

영국 왕립합동군사연구소(RUSI)와 분쟁군비연구소(CAR) 등 국제 조사기관이 우크라이나 전장에서 수거한 러시아 무기 잔해를 분석한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산 부품 다음으로 자주 발견되는 것이 한국산 메모리 반도체다. 실제로 러시아의 주력 순항미사일인 Kh-101과 이란제 샤헤드-136 드론의 유도 장치 등에서 한국 기업의 범용 칩이 다수 식별되었다.

국내 반도체 업계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인 2022년부터 러시아에 대한 직접 수출을 전면 중단했다. 그러나 이번 소송의 핵심은 '직접 판매 여부'가 아니라, 3국을 통해 우회 유입되는 경로를 제조사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차단하고 통제했느냐에 있다.

홍콩이나 튀르키예, 카자흐스탄 등의 중개상을 거쳐 세탁기나 냉장고 등 가전용으로 위장된 반도체가 러시아 방산 공장으로 흘러들어가는 일명 '세탁 수출'이 문제다. 원고 측 논리대로라면, 제조사가 이러한 우회 유출 가능성을 인지하고도 유통망 관리를 소홀히 했다면 법적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

특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미국 텍사스와 인디애나 등지에 대규모 생산 시설과 법인을 두고 있어, 미국 법원의 사법 관할권 내에 있다. 만약 이번 TI와 인텔 등의 소송에서 원고가 승소하거나 유의미한 합의를 이끌어낼 경우, 동일한 논리로 한국 기업을 겨냥한 우크라이나 피해자들의 2, 3차 소송이 제기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통상 전문 변호사들은 "미국 법원이 제조물 책임 범위를 공급망 관리 부실로까지 확대 해석한다면, 한국 기업들도 기존의 '수출통제 준수'를 넘어 유통 파트너사에 대한 실사를 대폭 강화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고 지적한다. 단순히 규정을 지키는 소극적 대응에서 벗어나, 제품의 최종 도달지를 추적하고 차단하는 적극적인 시스템 구축이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이번 소송은 기술 기업이 지정학적 분쟁에서 제품의 최종 사용처(End-user)에 대해 어디까지 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가리는 중요한 선례가 될 것으로 보인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