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맹 안보의 자동 보증을 중단한 미 확장억제의 변화에 대응해 한국은 핵무장 중심의 대전략으로 안보를 설계하는 국가가 되어야 한다
이미지 확대보기세계 질서의 조용한 재편이 시작되다
미 의회에서 상하원 단일안으로 지난 12월11일 하원에서 통과된 뒤 15일 전후 상원 표결을 앞두고 있는 국방수권법안(NDAA)은 단순한 국방 예산 승인 문서가 아니다. 이 법안은 트럼프 2기 행정부 하에서 미국이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으며, 동맹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무엇을 더 이상 보장하지 않겠다는 것인지를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낸 전략 문서다. 이 문서에는 더 이상 미국이 세계 질서의 자동 조정자이자 무조건적 보호자로 남아 있지 않겠다는 인식이 분명히 새겨져 있다.
겉으로 보기에 이 법안은 무기 도입과 병력 배치, 예산 증액과 같은 전통적 국방 의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미국 전략의 중심축이 이동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은 이제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비용을 감내하는 국가가 아니라, 경쟁자 억제를 위해 동맹을 선별적으로 활용하는 강대국으로 이동하고 있다.
동맹 안보에 대한 자동 보증의 시대가 끝나고 있다
냉전 이후 유지돼 온 확장억제 체제는 기본적으로 자동성과 신뢰성에 기초해 있었다. 동맹국이 공격을 받으면 미국은 개입한다는 전제가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작동해 왔다. 그러나 이번 국방수권법안에는 그러한 자동 개입의 논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법안 전반에 흐르는 핵심 메시지는 명확하다. 미국은 여전히 군사력을 유지하고, 기술을 공유하며, 초기 억제를 지원할 수 있다. 그러나 최종적인 방어 의지와 전쟁 수행 능력은 각 동맹국이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 보호는 조건부가 되었고, 선택은 미국의 몫으로 남겨졌다.
이는 확장억제가 사라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확장억제는 유지되지만 성격이 바뀌었다. 그것은 자동 장치가 아니라 협상 가능한 도구가 되었고, 비용과 책임을 수반하는 계약적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유럽을 관리하고 아시아를 준비하는 미국
이번 법안은 유럽과 인도태평양을 동시에 다루고 있지만, 접근 방식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유럽에서는 미군 병력의 하한선을 설정하며 급격한 후퇴를 막았다. 이는 러시아에 대한 억제를 유지하겠다는 신호다. 그러나 동시에 유럽이 더 많은 방위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는 메시지도 분명히 전달됐다.
우크라이나 지원 역시 지속되지만, 이는 가치 연대의 차원이 아니라 러시아를 전략적으로 묶어두기 위한 관리 전략에 가깝다. 미국은 유럽 전장에서 주도적 희생을 감수할 의지가 없으며, 전쟁의 비용과 위험을 분산시키려 하고 있다.
전쟁의 형태가 바뀌고 있다
이번 국방수권법안이 군사력뿐 아니라 산업과 기술, 투자와 공급망을 안보의 핵심 요소로 포함시킨 점은 매우 중요하다. 중국을 포함한 특정 국가에 대한 해외 투자 제한, 핵심 소재의 탈중국화, 외국산 부품 배제 조항은 전쟁의 개념이 전통적 전장을 넘어 확장되었음을 보여준다.
미국은 더 이상 총과 미사일만으로 전쟁을 정의하지 않는다. 기술과 자본, 공급망과 표준이 모두 전쟁의 일부로 간주된다. 이는 동맹국들에게도 동일한 선택을 요구한다. 안보 동맹은 곧 산업 동맹이며, 기술 동맹이다. 이 구조 속에서 전략적 중립이나 모호성은 허용되지 않는다.
동아시아 핵 질서의 불안정한 균형
이러한 변화는 동아시아 핵 질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중국은 핵 전력을 빠르게 증강하고 있으며, 북한은 이미 실전 운용을 전제로 한 핵보유 국가가 되었다. 일본은 공식적으로 비핵을 유지하지만, 잠재적 핵 역량을 보유한 국가로 분류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최근 미국이 동맹국에 대한 안보 제공을 자동적으로 하지 않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국가안보전략을 발표한 뒤 일본 정부 안팎에서 핵 보유 관련 담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대만은 핵을 보유하지 않았지만, 미국 전략 계산에서 핵 위기의 변수로 고려된다.
이 복합적인 구조 속에서 한국의 위치는 점점 더 위험해지고 있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재래식 전력을 갖추고 있지만, 핵 억제는 전적으로 외부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그 외부, 즉 미국의 확장억제는 점점 조건부로 바뀌고 있다. 따라서 한국은 미국과의 강력한 동맹을 유지함과 동시에 자체 핵무장을 통해 확장억제에 대한 미국의 전략 변화에 대응해야 할 시기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이번 국방수권법안이 동아시아에서의 군사 준비를 법제화하면서도 핵 사용에 대한 자동 개입을 명시하지 않은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는 미국이 핵 억제의 최종 책임을 점점 동맹과 공유하려는 신호다.
한국이 직면한 구조적 선택
이제 한국 앞에 놓인 선택지는 점점 명확해지고 있다. 확장억제에만 의존하는 기존 구조를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확장억제를 유지하되 그 토대를 스스로의 억제력으로 보강할 것인지의 문제다. 후자는 필연적으로 자체 핵무장 논의를 포함하게 된다. 이 논의는 감정이나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구조적 대응의 문제다. 확장억제가 조건부로 전환되는 세계에서, 핵무장을 중심으로 한 억제력을 자체적으로 갖추지 못한 국가는 전략적 공백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자체 핵무장은 동맹 파기의 선언이 아니라 동맹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 분담의 극단적 형태가 될 수 있다. 미국이 요구하는 것은 종속이 아니라 기여다. 전쟁 억제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동맹은 미국에게 부담이 아니라 자산이 된다.
대전략의 부재가 가장 큰 위험이다
문제는 한국이 아직 이 변화에 상응하는 대전략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이다. 국방과 산업, 에너지와 기술, 외교를 하나의 설계도로 통합한 국가 전략이 부재하다. 안보는 안보대로, 경제는 경제대로 분절된 사고가 여전히 지배적이다.
그러나 미국의 국방수권법안이 보여주듯, 강대국의 전략은 분절이 아니라 통합이다. 전쟁과 경제, 기술과 외교는 하나의 연속선 위에 놓여 있다. 한국이 이 사고 전환에 실패한다면, 전략 환경의 변화에 끌려다니는 위치에 머물 수밖에 없다.
보호받는 국가에서 설계하는 국가로
이번 국방수권법안은 미국이 세계 질서의 관리자 역할에서 점차 조정자이자 선택자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선택의 기준은 분명하다. 함께 부담을 지는가, 아니면 보호만 요구하는가의 문제다.
한국이 2035년을 목표로 세계 3~5위권 선진 강국으로 도약하겠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미국과의 강력한 동맹 유지를 전제로 자체 핵무장 등 대전략을 준비해야 한다. 이제는 보호받는 국가의 언어가 아닌 질서를 함께 설계하는 국가의 언어로 전환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군사력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전략 전반의 문제다.
확장억제 이후의 세계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아니다. 이미 시작된 현실이다. 문제는 한국이 이를 인식하고 대전략으로 응답하느냐, 아니면 과거의 안전장치에 기대어 시간을 허비하느냐다. 이번 미 국방수권법안은 그 선택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신호를 분명히 보내고 있다.
이교관 글로벌이코노믹 대기자 yijion@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