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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진단] 엔캐리 청산 "0.5%의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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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진단] 엔캐리 청산 "0.5%의 벽"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일본의 금리인상 전망에 엔화 가치가 오르면서 엔캐리 청산 공포가 거세다. 사진은 일본 엔화 지폐. 사진=연합뉴스/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일본의 금리인상 전망에 엔화 가치가 오르면서 엔캐리 청산 공포가 거세다. 사진은 일본 엔화 지폐. 사진=연합뉴스/로이터
[김대호 진단] 엔캐리 청산 "0.5%의 벽"

일본에는 ‘0.5%의 벽’이라는 말이 있다. 기준금리가 연율 0.5% 선을 넘어가기가 좀체 어렵다는 뜻이다.

일본은행은 1995년 9월 8일 기준금리를 0.5%로 낮추었다. 일본 역사상 금리가 0.5%로 떨어진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일본은 2차 대전 후 고도성장을 이어가면서 줄곧 고금리 체제를 유지해 왔다. 1973년 12월부터 1974년 4월까지, 1980년 3월부터 11월까지 두 차례의 오일쇼크 기간에 금리가 무려 9.0%까지 올라갔다. 버블 붕괴 이전 거품경제 시대 평균금리도 6%로 다른 나라보다 매우 높았다.
거품 붕괴가 시작된 것은 1990년 1월 4일이다. 새해 첫 거래일 닛케이 225 지수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닛케이 지수는 바로 전인 1989년 12월 29일 역대 최고치인 3만8915.87엔을 기록하며 정점에 도달했다. 그러던 것이 1990년 첫 거래일부터 하락세로 반전하며 거품 붕괴가 본격화됐다. 그해 한 해 동안 주가는 약 35% 이상 폭락했다. 급기야 10월에는 2만 엔대 아래로 떨어졌다.

일본의 부동산 가격은 1991년 4월 정점을 찍었다. 일본 정부가 부동산 대출 총량 규제를 도입한 것이 결정적 기폭제가 됐다. 이때부터 일본은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으로 진입하게 된다. 잃어버린 10년은 시간이 흐르면서 '잃어버린 20년'과 '잃어버린 30년'으로 이어진다. 내전이나 타국과의 전쟁 등 대규모 혼란을 겪는 국가를 제외하고 보통의 국가에서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초장기간 초저성장이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경기는 일반적으로 자율 조정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경기가 정도 이상으로 침체하면 특별한 조치를 하지 않아도 인건비와 임대료가 떨어지면서 저절로 다시 살아난다. 일본 경제에서는 그러나 이 자율 반등의 메커니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그만큼 침체 정도가 심했던 것이다.

일본은 국가별 명목 국내총생산(GDP) 순위에서 2011년 결국 중국에 추월당했다. 2023년에는 독일에 54년 만에 역전돼 4위로 밀려났다. 2025년에는 인도에도 뒤져 5위로 내려앉았다. 1인당 GDP에서는 2022년 한국에 추월당했다. 2024년에는 대만과 슬로베니아에 밀렸다. 경제생활 수준을 측정하는 지표인 OECD 중위 가처분소득에서도 냉전시대 공산 진영에 속했던 에스토니아와 폴란드에도 밀렸다.

일본은 버블 붕괴 초기만 해도 기준금리만 내리면 곧바로 불황에서 탈출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일본은행은 그 믿음 속에 1995년 9월 8일 기준금리를 역사상 가장 낮은 수준인 0.5%로 낮추었다. 현실은 딴판이었다. 경기는 좀처럼 살아나지 않았다. 다급해진 일본은 금리를 더 낮추었다. 0.5%에서 0.25%, 0.25%에서 0.1% 그리고 0.1%에서 0%로 계속 하향 조정해 나갔다. 급기야 –0.1%로까지 떨어뜨렸다. 그래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에는 일본은행이 직접 금융시장의 국채와 채권을 마구 사들이는 방식으로 무제한 돈을 푸는 이른바 양적완화(QE)를 단행하기도 했다.

일본은행이 2025년 12월 18일 모처럼 기준금리 인상을 단행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뉴욕증시와 일본 도쿄 금융시장의 예측 컨센서스상으로 0.5%에서 0.75%로 올릴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이 예상이 들어맞는다면 1995년 0.5%로 떨어졌던 일본의 기준금리는 무려 30년 만에 처음으로 0.5%의 벽을 뚫고 그 위로 올라가게 되는 셈이다. 0.5%를 넘어서는 것은 일본이 수십 년간 지속해온 초저금리와 디플레이션 환경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금리 정상화 궤도에 진입했음을 상징한다. 일본 경제에서 0.5%는 '잃어버린 30년'을 상징하는 금리의 0 상한선이었다. 이를 넘어서는 것은 일본 경제 구조가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뜻한다.

일본은 1950년대 이후 눈부신 경제성장을 거듭했다. 한국에서 터진 6·25전쟁 특수와 효율적인 경제 전략·투자, 일본인 특유의 근면성과 높은 저축률 등이 빛을 발했다. 그러다가 1985년 플라자 합의로 인해 엔화 가치가 올라가면서 경기가 갑작스럽게 침체되자 경기부양을 하고자 대출 규제를 완화해 금리를 끌어내렸다.
이런 가운데 기업과 개인투자자들이 대출규제 완화를 기회 삼아 부동산과 주식을 대량으로 구매했다. 이는 부동산 가격과 주식 가격의 폭등으로 이어졌다. '일본을 팔면 미국을 산다'는 말이 나오고 한술 더 떠서 '도쿄를 팔면 미국을 산다'는 말도 이때 나왔다. 거품은 오래가지 못했다. 1990년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헬게이트가 열렸다. 이후 10년간 주가 지수(닛케이 지수)는 반토막 났다. 부동산 가격은 평균 33%, 최대 10% 수준으로 추락했다. 담보를 팔아도 대출금을 못 갚는 사례가 속출하면서 다량의 부실채권이 발생했다. 이를 견디지 못해 은행이 도산하는 과정이 반복됐다. 당시 대출의 약 90%가 휴지 조각이 되어버렸다. 일본 정부가 채권 회수에 허술하게 대응하면서 경기침체는 장기화됐다.

그 일본이 이제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0.5% 벽 탈출은 30년 불황을 넘어 새로운 일본을 예고하는 전환점이다. 일본은행은 중립금리를 연 1.0~2.5%로 잡고 있다. 이번에 기준금리를 인상해도 중립금리 하한인 연 1%를 밑도는 만큼 내년에 0.25%포인트 추가 인상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다. 0.75%를 넘어 1% 이상의 고금리로 갈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일본의 거시경제 지표는 몰라보게 좋아지고 있다. 그렇다고 한꺼번에 세계의 선두 주자로 부상할 것 같지는 않다. 잃어버린 30년 동안 풀어 젖힌 통화와 늘어난 국가부채는 앞으로도 일본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갈 길이 멀다. 그럼에도 초장기 저성장의 늪에서 빠져나왔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글로벌 무대에서 일본의 역할도 점차 커질 것으로 보인다. 30년 만에 다시 돌아온 일본은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가 될 수도, 또 경우에 따라선 위험이 될 수도 있다.

당장 눈앞에 떨어진 것이 엔캐리 청산의 폭풍이다. 저금리 시대 엔화를 빌려 해외 고수익 자산에 투자했던 '엔캐리 트레이드' 자금이 대거 회수 또는 청산되면서 글로벌 금융시장에 변동성을 줄 수 있다. 이른바 엔캐리 트레이드 청산에 따른 발작 공포가 뉴욕증시는 물론 전 세계 금융시장을 엄습하고 있다. 비트코인·이더리움·리플 등 가상 암호화폐는 벌써 엔캐리 청산의 폭풍에 휘말리고 있다. 2024년 7월 일본은행의 기준금리 인상과 미국의 경기침체 우려가 맞물리자 8월 들어 대규모 엔캐리 트레이드 청산이 이뤄진 바 있다. 엔캐리 청산은 글로벌 시장에 ‘블랙 먼데이’ 쇼크를 부르기도 했다.

한국에도 엔캐리 자금이 많이 들어와 있다. 엔캐리 청산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고된 것인 만큼 당장의 충격은 크지 않을 수 있다. 일본이 지속적으로 금리를 인상하면 시간을 두고 글로벌 금융시장의 판도를 바꿀 수는 있다. 일본의 등장으로 새로운 변화를 맞을 글로벌 환경에 선제 대응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은 우리에게도 반면교사의 교훈이 되고 있다. 방만한 경영이 야기할 수 있는 국가적 재앙에 대한 경계가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시점이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겸 주필  전 고려대 교수이미지 확대보기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겸 주필 전 고려대 교수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