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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관의 글로벌 워치] 미국, '승리' 대신 '위험 관리' 택했다...동맹국에 떠넘겨진 안보 청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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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관의 글로벌 워치] 미국, '승리' 대신 '위험 관리' 택했다...동맹국에 떠넘겨진 안보 청구서

제프리 맨코프 "러시아, 장기 소모전 늪 빠져…휴전은 체제 정비 위한 시간 벌기용"
워싱턴, 유럽 전선 부담 줄이고 對中 견제 집중…한국 '확장억제' 불확실성 고조
동맹 의존도 낮추고 '자립 억지력' 키워야…방산·에너지망 등 '국가 복원력' 확보 시급
美 해군이 '재래식 잠수함'으로 인도-태평양 전력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고속 공격 잠수함 USS 미네소타(SSN-783)가 2025년 3월 16일 목격되고 있다.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美 해군이 '재래식 잠수함'으로 인도-태평양 전력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고속 공격 잠수함 USS 미네소타(SSN-783)가 2025년 3월 16일 목격되고 있다. 사진=로이터

휴전이 다가온다는 말이 커질수록, 전쟁은 ‘질서’의 언어로 바뀐다


미국의 군사안보 전문 매체인 '암초에 걸린 전쟁(War on the Rocks)'는 지난 12월16일 미국의 저명한 외교안보 전문가인 제프리 맨코프의 분석을 싣고 2025년 11월 말 공개된 미국의 ‘28개 항 평화안’ 이후 “휴전이 지평선에 있다”는 관측이 확산됐지만, 그 근거로 제시되는 ‘우크라이나 패색론’만으로는 전쟁의 다음 단계를 설명할 수 없다고 진단한다.

맨코프는 동 분석을 통해 우크라이나의 영토 상실, 인프라 타격, 병력 충원 난제, 정국의 부담이 휴전 협상의 배경을 만들고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이와 동시에 그는 러시아 역시 2022년 봄 이후 처음으로 ‘실질 협상’에 관심을 나타내는 듯한 변화를 보이는 것에 주목한다. 이는 전장이 아니라 체제의 비용, 즉 러시아 내부의 정치·사회·경제적 압력이 누적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핵심은 이것이다. 협상 국면은 승리의 신호가 아니라, “누가 더 오래 버틸 수 있는가”라는 장기전의 본질이 ‘전선’에서 ‘국가 시스템’으로 이동했음을 뜻한다. 휴전 담론은 그 자체로 전쟁의 끝이 아니라, 전쟁이 국제질서 재편의 도구로 전환되는 과정의 언어다.

러시아의 ‘제국전쟁’은 왜 반복적으로 체제를 흔들었나

러시아와 유라시아 안보에 특히 전문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 받는 맨코프가 제시하는 프레임은 역사적 유추다. 크림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소련의 아프간 전쟁은 모두 “상대를 과소평가하고, 국제개입을 과소평가하며, 경제·정치 체제의 취약성을 과소평가한” 선택전쟁이었다. 그리고 전쟁이 길어질수록 러시아는 점점 불리해졌고, 전쟁은 종종 정권의 위기와 개혁 또는 붕괴를 불러왔다.

이 같은 유추의 전략적 의미는 단순한 ‘러시아도 언젠가 무너진다’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전쟁이 길어지면, 러시아는 체제 부담을 줄이기 위해 외교를 ‘전선의 연장’으로 사용하려 한다는 것이다. 협상은 양보가 아니라, 유리한 시점에 이익을 고정(lock-in)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휴전이 성사되더라도 러시아가 그것을 ‘재충전의 시간’으로 쓰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고, 반대로 휴전이 실패할 경우에도 러시아는 ‘포기할 수 없는 전쟁’을 떠안은 채 더 가혹한 동원·억압·경제 재편으로 이동할 수 있다. 이 양쪽 모두가 유럽 안보를 장기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든다.

미중 패권 경쟁의 관점에서 본 우크라이나: 유럽 전쟁은 인도태평양을 재배치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미중 경쟁의 “부차적 전장”이 아니다. 세 가지 경로로 인도태평양의 힘의 균형을 직접 바꾼다.

첫째, 미국의 전략 우선순위가 ‘유럽 관리’와 ‘중국 억지’ 사이에서 끊임없이 재조정된다. 28개 항 평화안 같은 구상은 전쟁의 종결이라기보다, 미국이 유럽 부담을 일정 부분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 낮춘 뒤 인도태평양으로 전략 자원을 돌리려는 충동과 연결돼 있다.

둘째, 러시아는 중국에 대한 구조적 의존을 심화시키면서도, 동시에 중국의 인도태평양 구상에 자신을 ‘연결 자산’으로 제공한다. 서방의 제재·통제 아래에서 러시아가 버티는 방식은 결국 중국의 공급·금융·수요에 더 깊게 묶이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이 변화는 전쟁이 끝나도 쉽게 되돌릴 수 없다.

셋째, 유럽의 군사·산업 정책이 ‘상시 전시체제’로 이동할수록, 방산·원자재·에너지·기술 통제는 글로벌 블록화를 가속한다. 이는 한국 같은 수출·제조 기반 국가에 “성장 비용”이 아니라 “생존 비용”으로 돌아온다.

한국의 안보·국익 관점: 가장 위험한 지점은 ‘확장억지의 자동성 저하’다


한국의 핵심 위험은 전쟁의 승패가 아니라, 전쟁이 만든 미국의 전략 언어 변화다. 미국이 동맹을 운용하는 방식이 ‘완전한 승리’에서 ‘위험 감소(risk reduction)’로 이동할수록, 확장억지의 작동은 더 거래적이고 더 조건부가 될 수 있다. 우크라이나 협상 과정에서 “영토·군사력·동맹지위”가 패키지로 다뤄지는 방식은, 동맹 방위가 ‘원칙’이 아니라 ‘협상 항목’으로 이동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 입장에서 이는 다음의 구조를 뜻한다. 중국·북한·러시아라는 핵보유 국가들과, 잠재적 역량을 가진 일본이 공존하는 동북아에서, 미국의 개입 의지와 속도가 조금만 흔들려도 억지의 균형은 급격히 불안정해질 수 있다. 따라서 서울은 동맹에 의존하되 동맹만으로 설계하지 않는, ‘억지의 자립성’을 높이는 대전략이 필요하다.

대응 대전략: “억지·동맹·산업”을 한 문장으로 묶어라


한국이 취할 수 있는 현실적 해법은 세 층위로 설계돼야 한다.

첫째, 억지의 층위다. 핵·미사일 위협이 다층화된 환경에서 한국은 확장억지의 신뢰성을 제고하는 제도적 장치(공동기획·공동운용·위기시 자동개입 절차의 명문화)를 요구해야 한다. 동시에 최악의 경우를 상정한 ‘자기 억지력’의 옵션을 전략문서로 공개·비공개 트랙에서 분리 운용해야 한다. 핵심은 선언의 과잉이 아니라, 상대가 계산할 때 “한국의 대응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확신을 주는 구조다.

둘째, 동맹·다자 질서의 층위다. 우크라이나는 유럽이 결국 ‘자기 방위 능력’을 강화하지 않으면 협상 테이블에서 발언권이 약해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한미동맹은 유지돼야 하지만, 동맹은 “보장”이 아니라 “설계”로 강화되어야 한다. 한미일 협력은 대중 억지의 도구이면서 동시에 대북 위기관리 체계로 재구성돼야 하고, 동남아·호주·인도와의 연계는 공급망·기술안보와 결합된 ‘후방 동맹’으로 확장돼야 한다.

셋째, 산업·기술의 층위다. 장기 소모전의 승패는 탄약·드론·정찰·지휘통제·전력망 복원력에서 갈린다. 우크라이나 에너지 인프라가 반복 타격과 복구의 악순환에 들어간 사례는, 전력망과 산업기반이 곧 전쟁지속능력임을 보여준다. 한국은 방공·대드론·전자전·우주기반 ISR, 그리고 전력망 방호와 분산형 에너지의 ‘국가 복원력 산업화’를 국가 전략사업으로 올려야 한다. 이는 안보 투자이면서 동시에 수출 산업이 될 수 있다.

제국의 함정은 러시아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 국방대 산하 국립전략연구소의 연구원 겸 싱크탱크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선임연구원인 맨코프의 글이 던지는 가장 큰 경고는 “제국의 전쟁은 전장에서만 패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쟁은 체제의 비용을 폭발시키고, 외교를 전선의 연장으로 만들며, 국제질서의 규칙을 ‘힘의 거래’로 바꾼다.

따라서 한국의 과제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결 여부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 만든 세계의 작동 방식을 읽고 그 위에 한국의 안전과 번영을 다시 설계하는 일임을 맨코프가 일깨워준다. 미국이 위험 감소 프레임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커질수록, 서울은 확장억지의 불확실성에 대비해 독자 핵무장의 실현을 위한 대전략 수립을 통해 억지의 자립성을 강화하고, 동맹국들과 함께 역내 평화와 안정이 유지될 수 있는 질서를 ‘요구’가 아니라 ‘구축’의 방식으로 설계해 만들어가야 한다.


이교관 글로벌이코노믹 대기자 yijion@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