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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관의 글로벌 워치] 질서가 무너진 혼종 패권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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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관의 글로벌 워치] 질서가 무너진 혼종 패권의 시대

자유주의 패권의 잔존과 현실주의 세력균형으로의 전환 실패가 만들어낸 불안정한 세계, 그리고 한국의 선택
트럼프 미 대통령을 만난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왼쪽)은 유럽, 美에 종속되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사진은 트럼프 대통령과 마크롱 대통령의 모습이다. 사진=AFP 연합뉴스이미지 확대보기
트럼프 미 대통령을 만난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왼쪽)은 "유럽, 美에 종속되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사진은 트럼프 대통령과 마크롱 대통령의 모습이다. 사진=AFP 연합뉴스

미국이 주도해 온 전후 국제질서는 지금 구조적 전환의 문턱을 넘고 있다. 문제는 전환 그 자체가 아니라, 전환이 완결되지 못한 상태로 지속되고 있다는 데 있다.

자유주의 패권의 언어와 현실주의 세력균형의 필요성이 뒤섞인 채 공존하는 이 불완전한 상태가 오늘의 세계를 가장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드러내고 있는 대전략의 혼종성(an incoherent grand strategy)은 그 모순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미 외교정책연구소(FPRI) 선임연구위원인 레온 하다르가 신년 들어 미국의 외교안보 전문 매체인 내셔널인터레스트에 기고한 '유럽의 뒤늦은 전략적 각성의 교훈'이라는 제하의 아티클에서 지적했듯,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 강화는 서방 질서의 붕괴가 아니라 성숙의 징후다.

그러나 미국은 오랫동안 요구해왔던 유럽 동맹국들의 자립을 정작 불안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 장면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미국이 아직 자유주의 패권의 사고방식에서 완전히 이탈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자유주의 패권의 잔존이 만들어낸 전략적 혼선


자유주의 패권은 도덕과 제도, 가치의 확산을 통해 안정적 질서를 구축할 수 있다는 신념에 기초해 왔다. 냉전 이후 미국은 이 신념을 바탕으로 나토의 동진을 정당화했고, 시장 개방과 민주주의 확산을 안보 전략의 일부로 통합했다. 그러나 이 전략은 러시아와 중국이라는 대륙 강대국의 구조적 반발을 과소평가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표면적으로는 이 자유주의 패권을 부정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그는 다자주의를 경멸하고, 동맹을 비용 계산의 대상으로 취급하며, 거래적 외교를 노골화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자유주의 패권의 핵심 요소들을 상당 부분 유지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나토 동진을 되돌리지 않겠다는 태도, 대중 전략에서 가치 연합을 유지하려는 시도, 동맹국을 관세와 투자 압박으로 묶어두려는 방식은 패권 유지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이처럼 자유주의 패권의 틀을 유지한 채 현실주의적 언어만 차용한 상태, 그것이 바로 트럼프 대전략의 혼종성이다. 문제는 이 혼종성이 상대에게는 일관된 억지로 작동하지 않고, 동맹에게는 신뢰 가능한 기준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현실주의 세력균형으로의 ‘완전한 이행’이 필요한 이유


현실주의 세력균형은 가치 확산이 아니라 힘의 분산과 상호 억지를 통해 안정성을 추구한다. 이 질서에서는 어느 한 국가가 도덕적 우위를 독점하지 않으며, 각국은 스스로의 안보를 책임지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하다르가 지적하듯,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 강화는 바로 이 현실주의적 전환의 자연스러운 결과다.

미국이 진정으로 미중 패권 경쟁 속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질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면, 더 이상 모든 지역 질서를 직접 관리하려 해서는 안 된다. 대신 동맹들이 자기 지역에서 책임 있는 힘의 주체로 성장하도록 허용하고, 그 결과를 수용해야 한다. 이것이 현실주의 세력균형으로의 완전한 이행이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는 이 전환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하고 있다. 유럽의 자율성을 불안하게 바라보고, 동아시아에서 동맹국의 전략적 독자성을 허용하지 않으면서도 비용 부담은 요구한다. 이 모순이 동맹 전체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미중 패권 경쟁의 본질과 역내 질서의 재편


미중 경쟁은 가치 체제의 충돌이기 이전에 권력 전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구조적 경쟁이다. 중국은 기존 질서를 전면적으로 전복하기보다는, 미국이 더 이상 모든 지역에서 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상태를 목표로 한다. 이는 부분적 현상 변경의 축적을 통해 달성된다.

이 맥락에서 대만, 남중국해, 동중국해는 단일한 전장이 아니라 연결된 시험대다. 한 지역에서의 모호함은 다른 지역에서의 계산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미국이 이 경쟁을 관리하려면, 명확한 억지 기준과 동맹 역할 분담이 필요하다. 그 기준은 자유주의적 수사보다 현실주의적 능력에서 나와야 한다.

한국의 전략적 위치: 동맹의 수동적 소비자에서 질서의 공동 설계자로


이 전환기에서 한국은 더 이상 중간지대에 머물 수 없다. 한국은 이미 세계 10위권 경제력, 첨단 산업 역량, 지정학적 요충지를 동시에 가진 국가다. 이런 국가가 여전히 “동맹의 보호를 받는 중견국”의 위치에 머무르는 것은 전략적 불일치다.

한국이 미국과의 동맹 속에서 신뢰를 축적하려면, 말이 아니라 위험 분담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 그것은 대만 문제에서의 원칙적 입장, 역내 안보 기여, 그리고 무엇보다 자국 안보를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억지력에서 드러난다.

자력 억지와 독자 핵무장: 현실주의 질서에서의 합리적 귀결


현실주의 세력균형 질서에서 핵무장은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핵을 보유한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 사이의 발언권과 억지력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한국이 장기적으로 독자 핵무장을 추구하는 것은 동맹을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동맹을 성숙시키기 위한 조건이다.

미국 역시 동맹국이 스스로의 안보를 책임질 능력을 갖추길 요구해 왔다. 그렇다면 한국이 그 요구를 가장 철저하게 이행하는 것이야말로, 동맹 신뢰를 훼손하는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강화하는 선택이다. 문제는 미국이 이 논리를 자유주의 패권의 잔존적 사고 때문에 아직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혼종성을 넘어서야 질서는 안정된다


오늘의 세계가 불안정한 이유는 힘의 이동 때문만이 아니다. 전환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전환의 언어를 사용하는 대전략의 혼종성이 불안을 증폭시키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대전략은 그 모순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미국이 미중 패권 경쟁을 관리하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질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면, 자유주의 패권의 잔존을 정리하고 현실주의 세력균형으로 완전히 이행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동맹국들이 스스로의 억지력을 갖추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한국에게 이 전환은 선택이 아니라 과제다. 한국은 동맹의 신뢰를 축적하며 역내 질서 재편의 핵심 축으로 자리 잡아야 하고, 그 신뢰 위에서 자력 억지력, 나아가 독자 핵무장이라는 최종 수단을 준비해야 한다. 이것이 회피가 아니라 책임이며, 모호함이 아니라 성숙이다.

트럼프 대전략의 혼종성이 보여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전환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으면, 질서는 더 불안정해진다.

그리고 그 대가는 항상 전환을 미룬 쪽이 아니라, 준비하지 않은 동맹이 치르게 된다는 점을 한국은 명심해야 한다.


이교관 글로벌이코노믹 대기자 yijion@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