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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수출 우회로’ 차단에 3630억 벌금 폭탄… 반도체 공급망 인도·동남아 ‘엑소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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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수출 우회로’ 차단에 3630억 벌금 폭탄… 반도체 공급망 인도·동남아 ‘엑소더스’

미 산업안보국(BIS), 중국 수출통제 위반한 AMAT에 2억 5200만 달러 벌금 부과
한국 법인 거친 ‘공급망 세탁’에 강력한 제동… 한국 장비 업계에도 감시망 확대 경고
애플·삼성전자 등 인도·말레이시아·베트남으로 생산기지 대이동, 글로벌 후공정 지도 바뀐다
세계 최대 반도체 장비 기업인 미국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AMAT)가 한국 법인을 거점으로 활용해 중국에 장비를 불법 수출했다가 역대급 벌금을 물게 되면서, 한국 장비 업계에도 비상이 걸렸다. 이미지=제미나이3이미지 확대보기
세계 최대 반도체 장비 기업인 미국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AMAT)가 한국 법인을 거점으로 활용해 중국에 장비를 불법 수출했다가 역대급 벌금을 물게 되면서, 한국 장비 업계에도 비상이 걸렸다. 이미지=제미나이3
2026년 초 글로벌 반도체 장비 업계에는 한국 경계령이 내려졌다.

세계 최대 반도체 장비 기업인 미국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AMAT)가 한국 법인을 거점으로 활용해 중국에 장비를 불법 수출했다가 역대급 벌금을 물게 되면서, 한국 장비 업계에도 비상이 걸렸다. ·중 갈등의 틈바구니에서 인도와 동남아시아가 반도체 특수를 누리는 사이, 기존 공급망의 한 축이었던 한국과 중국 중심의 생산 체제는 거대한 변화의 기로에 섰다.

AMAT, 한국 법인 이용한 꼼수수출 덜미… BIS 역대급 제재


미국 상무부 산하 산업안보국(BIS)12(현지시간) 반도체 제조 장비를 중국에 불법 수출한 혐의로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AMAT)25200만 달러(3630억 원)의 벌금을 부과했다. 이는 BIS가 지금까지 부과한 벌금 중 두 번째로 큰 규모이며, 위반 품목인 이온 주입기 배송 가치의 두 배에 달하는 징벌적 조치다

BIS 조사에 따르면 AMAT2021년과 2022년 사이 미국의 수출통제 대상인 중국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 SMIC에 이온 주입기를 공급하며 규제를 회피했다. 미국 본사에서 중국으로 직접 보내는 대신, 한국 내 조립 시설을 거쳐 최종 목적지를 중국으로 설정하는 우회 방식을 썼다. 미국 정부는 이를 첨단 기술 유입을 차단하는 수출 관리 규정(EAR)의 정면 위반으로 판단했다.

이 사건은 국내 반도체 장비 및 부품 업계에도 강력한 경고를 던진다. 글로벌 장비사의 한국 법인이 공급망의 우회 통로로 지목되면서, 앞으로 미국 정부가 한국 내 생산 및 물류 거점에 대한 감시망을 더욱 촘촘하게 운영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공급망의 종착역은 인도… 애플·삼성 이끄는 동남아 벨트


미국의 강력한 압박과 관세 정책은 글로벌 기업들의 제조 거점을 중국에서 인도와 동남아시아로 밀어내고 있다. 가장 앞장선 곳은 애플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 보도에 따르면,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는 미국 정부의 관세 정책에 대응해 생산 체제 재편에 속도를 내고 있다.

실제로 애플은 지난해 봄부터 미국 시장용 아이폰 물량을 중국에서 인도로 전환했다. 조사기관 카나리스에 따르면 지난해 4월 기준 인도발 미국행 아이폰 출하량은 약 300만 대로 전년보다 80% 늘어난 반면, 중국발 물량은 90만 대로 80% 급감했다. 인도 정부는 이에 맞춰 7,600억 루피(12조 원) 규모의 보조금을 투입해 타타, 아다니 등 자국 재벌 기업과 함께 반도체 자립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동남아시아의 약진도 눈부시다. ‘2의 대만을 꿈꾸는 말레이시아는 2024년 기준 반도체 수출액 800억 달러(115조 원)를 기록하며 10년 전보다 4배 성장했다. 인텔, ST마이크로, 인피니언 등은 반도체 조립과 검사를 담당하는 후공정(OSAT)’ 공장을 말레이시아에 집중시키고 있다. 베트남 역시 삼성전자가 닦아놓은 제조 기반을 바탕으로 애플 공급망을 흡수하며 시스템 반도체 인력 1만 명 양성에 나섰다.

메모리 가격 폭등에 중저가 칩 수요 급감… 관제 불황우려


공급망 이동과 더불어 시장 내부의 불균형도 심화하고 있다. 중국 SMIC 자오 하이쥔 공동 CEO는 지난 12일 실적 발표에서 “D램과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 가격이 급등하면서 중저가 스마트폰용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주문이 급감했다고 밝혔다. AI 특수로 인한 메모리 공급 부족이 보급형 가전 제조사들의 비용 부담으로 이어져 생산 감소를 불러왔다는 분석이다.

반면 세계 최대 파운드리 업체인 대만 TSMC는 상대적으로 견조한 모습이다. C.C. 웨이 TSMC 최고경영자는 고급 스마트폰은 메모리 가격 변동에 덜 민감해 수요가 여전히 강력하다고 설명했다. 프리미엄 시장과 중저가 시장의 양극화가 뚜렷해지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각국 정부가 앞다툈 보조금을 살포하며 자국 내 공장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점이다. 국제 반도체 단체인 SEMI에 따르면, 오는 2030년까지 전 세계에 100동 이상의 반도체 공장이 새로 지어질 계획이다. 업계 안팎에서는 실제 수요를 넘어서는 과잉 투자가 결국 누구도 이익을 내지 못하는 관제 불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내놓고 있다.

전통적인 중국 중심 공급망이 무너지고 인도·동남아 체제로 재편되는 흐름 속에서, 국내 장비 업계도 한국 거점의 지정학적 리스크를 관리하며 동남아시아 시장 진출 등 선제적인 전략 수정이 필요한 때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