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무역 블록·EU 탄소국경세… 경제 주권 논쟁, 개도국엔 새 장벽
"자급자족도, 무조건 개방도 답 없다"… 다극화 시대 생존 전략은
"자급자족도, 무조건 개방도 답 없다"… 다극화 시대 생존 전략은
이미지 확대보기세계화의 주도권이 바뀌었다
아레즈키 연구원은 오늘날의 세계화 반발을 단순히 서구의 대중국 견제로 읽는 시각은 과도한 단순화라고 강조했다. 2001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이후 전 세계 생산과 소비 구조가 근본적으로 재편됐다는 것이다. 제조업은 중국과 아시아로 이동했고, 미국과 유럽은 소비 중심지로 굳어졌으며, 나머지 국가들은 원자재 수출에 머무는 구조가 고착됐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상호의존의 정도가 아니라 권력의 배분 방식이다. 세계화는 더 이상 서구가 이끌지 않는다. 중국의 산업 지배력과 국가 주도형 자본주의가 그 중심축을 차지하면서 공급망이 경쟁하는 블록들로 갈라지고 있고, 개발도상국들은 에너지·광물·중간재를 공급하면서도 가치 사슬 위로 올라서지 못하는 구조에 갇혀 있다.
석유 시대에서 핵심광물 시대로의 전환이 이 구조적 비대칭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리튬·코발트·구리·희토류는 청정에너지 시스템, 디지털 인프라, 국방 기술의 핵심 자원으로 올라섰다. 산업연구원이 지난달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중국은 전 세계 희토류 채굴의 58%, 제련의 90%를 점유하고 있으며, 흑연은 채굴 70%에 제련 99% 이상을 독식하고 있다. 광물을 보유하더라도 국내에서 가공하지 못하고 원자재만 내보내는 나라는 공급망 가장 낮은 곳에 묶인 채 가격 변동성과 지정학적 압력을 고스란히 떠안는다는 게 아레즈키 연구원의 진단이다.
'탈중국' 외치는 미·유럽, 개도국엔 또 다른 울타리
서구 강대국들의 정책 변화가 개발도상국에게 또 다른 압박이 되고 있다. 미국은 2022년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반도체·과학법을 통해 보조금을 국내 생산 및 동맹국 투자와 연계하는 산업 정책을 추진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핵심 광물 산업에 직접 지분을 취득하는 방식으로 자원 확보에 나서고 있다. JD 밴스 미국 부통령은 이달 4일 워싱턴DC 국무부 청사에서 열린 핵심광물 장관급 회의에서 "핵심광물 가격을 예측 가능하게 만들고 변동성을 줄이겠다"며 동맹국 중심의 핵심광물 무역 블록 출범을 선언했다. 이 회의에는 한국을 비롯해 56개국이 초청받아 참석했다.
유럽의 접근법은 다르지만, 결과는 비슷하다. 유럽연합(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가 올해 1월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기후 대응을 명분으로 철강·시멘트·알루미늄 등의 수입품에 탄소 비용을 부과하는 이 제도는, 탈탄소화 역량이 부족한 개발도상국 수출업체에 사실상의 무역 장벽으로 작용한다. 아레즈키 연구원은 기술 이전과 자금 지원이 함께 이뤄지지 않는다면 CBAM은 선진국들이 글로벌 가치 사슬의 주도권을 되찾는 또 다른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중국도 결코 만만한 파트너가 아니다. 베이징은 세계화를 거부하는 대신 전략적으로 통제하려 한다. 산업연구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중국은 핵심광물 수출통제를 통상협상과 외교분쟁의 전략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주권과 개방, 양자택일이 아니다"
아레즈키 연구원은 자급자족 경제가 여러 차례 실패했다는 역사를 근거로 든다. 기술과 인재로부터 나라를 고립시키고 인재 유출을 가속화해, 결국 지키려는 주권 자체를 무너뜨린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전략 없는 급진적 개방은 외부 충격과 외국 지배에 취약한 구조를 남겼다.
그가 제시하는 대안은 냉전 시대의 '비동맹'이 아니다. 한 진영과 교역하고, 다른 진영에서 기술을 끌어오고, 또 다른 진영에서 투자를 받으면서도 모든 영역에서 전략적 자율성을 유지하는 '다차원 관여' 전략이다. 광물 자원을 보유하는 것만으로는 주권이 서지 않는다는 게 그의 핵심 논거다. 인적 역량과 산업 기반, 믿을 수 있는 제도가 받쳐주지 않으면 광물은 의존성을 더 깊게 할 뿐이라는 것이다.
아레즈키 연구원은 "자율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개방성을 유지하고, 기술·시장·아이디어로부터 스스로를 가두지 않으면서 주권을 행사하는 것이 21세기의 핵심 과제"라고 밝혔다. 이 균형을 잡는 나라가 세계화의 다음 단계를 이끌 것이며, 주권을 폐쇄와 혼동하는 나라는 뒤처진다는 경고다.
한국은 이 딜레마의 한가운데 서 있다. 희토류 정·제련을 중국에 100% 의존하면서도 반도체·배터리 수출로 먹고사는 구조다. 미국의 핵심 광물 무역 블록에 참여하면 대중 관계가 흔들리고, 빠지면 동맹 공급망에서 밀릴 수 있다. 아레즈키 연구원이 말한 '다차원 관여'는 한국에 이론이 아니라 현실 과제다. 어느 한 진영에 기대는 손쉬운 선택보다, 광물 가공 역량을 키우고 복수의 공급망을 스스로 설계하는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하는 것이 결국 더 안전한 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