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산 반도체 원년 선언… 애플·TSMC, 사막에 반도체 도시 세운다
4·5나노 머무는 애리조나, 대만 최첨단 2나노와 기술 격차 4년 이상
삼성·SK하이닉스, 중국 공장 수출허가 개별 승인 전환으로 이중 압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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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확대보기30기 크레인이 솟아오른 사막, 반도체 도시의 탄생
피닉스 북쪽으로 차로 30분. 선인장만 드문드문 서 있던 황량한 땅 2,000에이커(약 809만㎡)—뉴욕 센트럴파크의 2.5배 면적—위로 30기가 넘는 크레인이 하늘을 찌른다. 세계 최대 반도체 위탁 생산업체 TSMC(대만 반도체 제조회사)가 총 1,650억 달러(약 238조 원)를 투입해 짓고 있는 반도체 공장 단지다.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건설 프로젝트 중 하나다. 1호 공장은 이미 가동 중이고, 2호 공장은 내년 완공 예정이다. 현재 철골 뼈대만 세워진 3호 공장은 2030년 가동 목표다. 이후 3곳이 더 들어서면 아파트와 대형 쇼핑몰까지 갖춘 '기업 도시'가 완성된다.
이 공장의 최대 고객이 애플이다. 애플 글로벌 조달 책임자 데이비드 톰은 WSJ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이 공장에서 생산되는 물량을 살 수 있는 만큼 최대한 구매하겠다"며 "올해만 1억 개가 넘는 칩을 이곳에서 구매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애플은 지난해 향후 4년간 미국에 6,000억 달러(약 866조 원)를 투자하겠다고 선언했으며, TSMC 애리조나 공장 물량 확대가 이 약속의 핵심축이다.
웨이퍼(반도체 원판) 공급망도 미국 안에서 해결하는 흐름이 빨라지고 있다. 대만 기업 글로벌웨이퍼스(GlobalWafers)는 지난해 텍사스주 셔먼에 길이 400m에 이르는 실리콘 웨이퍼 공장을 열었다. 글로벌웨이퍼스 미국 지사장 마크 잉글랜드는 "애플이 TSMC 등 반도체 제조업체들에 자사 웨이퍼를 사용하도록 권고함으로써 미국 내 공급망 구축에 힘을 보태고 있다"고 밝혔다.
전공정에서 후공정까지… 조립 라인도 텍사스로
애플의 공급망 재편 구상은 TSMC 한 곳에서 끝나지 않는다. TSMC 공장 바로 옆에는 반도체 후공정 업체 앰코어 테크놀로지(Amkor Technology)가 애플 투자를 받아 패키징 시설 2곳을 짓고 있다. 축구장 50여 개 규모(100에이커 이상) 부지에 앰코어가 투입하는 금액만 70억 달러(약 10조 1,000억 원)다. 2027년 완공 목표인 1호 시설은 TSMC에서 넘어온 웨이퍼를 개별 칩으로 잘라 기기에 꽂을 수 있는 연결 단자를 붙이는 공정을 맡는다. 현재 아시아에서만 이뤄지는 패키징 공정을 미국으로 가져오겠다는 것이다.
켄터키 기기용 유리 생산, 캘리포니아 희토류 자석 재활용, 텍사스 실리콘 부품 제조 등 협력업체 투자도 잇따른다. 텍사스주 휴스턴에서는 폭스콘(Foxconn)과 손잡고 인공지능(AI) 서버 조립 라인을 이미 가동 중이다. 애플 최고운영책임자(COO) 사비 칸은 이 시설을 20만 평방피트(약 1만 8,580㎡) 이상의 제조 공간으로 확장해 올해 안에 맥 미니(Mac mini) 조립도 시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칸 COO는 "맥 미니는 수요가 안정적이어서 2013년 오스틴에서 시도했으나 규모가 쪼그라든 맥 프로 때와는 다른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톰 조달 책임자는 이러한 구조적 역할에 대해 "애플이 TSMC와 함께 새로운 공정을 빠르게 고수율·대량 생산 체제로 끌어올리면, 산업 전반이 그 뒤를 따라온다"고 설명했다. 애플이 최첨단 공정을 먼저 채택함으로써 TSMC가 천문학적 신규 투자를 감행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주는 구조다.
냉정한 현실, 최첨단 칩은 여전히 대만에서만
그러나 수치를 들여다보면 미국의 '반도체 자립'은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현재 TSMC 애리조나에서 생산하는 칩은 트랜지스터 크기 4나노미터(nm)·5나노미터 공정이다. 최신 아이폰과 맥의 핵심 두뇌에 해당하는 2나노미터 공정은 지금 대만에서만 가동 중이며, 애리조나에서의 2나노 양산은 2030년 이후 전망이다. TSMC는 대만에 월 10만 장 이상 웨이퍼를 생산하는 공장 4곳과 소규모 공장 7곳을 두고 있다. 애리조나 6개 공장이 모두 완공돼도 대만과 같은 생산 능력을 갖추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고 TSMC 측은 밝혔다.
아이폰 조립의 미국 이전은 계획에도 없다. 시장조사기관 컨슈머 인텔리전스 리서치 파트너스에 따르면 애플은 맥 미니보다 아이폰을 수백 배 더 많이 판다. 칸 COO는 "부품, 하위 조립품, 첨단 실리콘 등 미래 혁신에 필수적인 분야에 집중하고 있다"며 선을 그었다.
미국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이 갖는 구조적 한계도 이번 취재에서 드러났다. 반도체 제조에는 수십 년 축적된 기술 노하우, 숙련 인력, 정밀 소재 공급망이 유기적으로 맞물려야 한다. TSMC 애리조나 공장은 초기 가동 과정에서 미국 현지 인력의 기술 적응에 예상보다 긴 시간이 걸리며 생산 수율 문제를 겪은 것으로 업계에서는 알려져 있다. 반도체 업계 안팎에서는 미국이 실질적인 반도체 자급 체제를 갖추는 데 최소 10년 이상이 걸릴 것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최근 블룸버그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는 대만과의 관세 협정 막바지 조율에 들어갔으며, 협정에 TSMC의 애리조나 공장 5곳 추가 건설이 포함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 경우 미국 내 총 공장 수는 11곳으로 불어난다. 애플과 TSMC가 사막 위에 쌓아 올리는 이 반도체 도시가 실제로 대만을 대체하는 날이 올지, 아니면 지정학적 위험을 분산하는 '보험 포트폴리오'에 그칠지는 여전히 열려 있는 질문이다.
삼성·SK하이닉스, 불똥 어디까지 튀나
TSMC의 미국 집중 전략은 한국 반도체 산업에도 직접적인 압박으로 이어지고 있다. 미국 정부는 올해 1월부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국 공장에 대한 신속 수출허가(VEU) 지위를 철회, 미국산 장비 반입을 건별 승인 방식으로 전환했다. 두 회사의 중국 생산 비중이 전체의 30%에 달하는 점을 감안하면 중장기 공급망 재편이 불가피하다. 미국 상무장관은 최근 "메모리 생산 기업은 100% 관세를 내거나 미국에서 생산하라"며 한국 기업을 향해 현지 투자 압박을 노골화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TSMC와 대만이 먼저 미국 투자로 관세를 낮추는 '투자-관세 연계 모델'을 만들었고, 이제 그 틀이 한국 협상의 기준선이 됐다"고 말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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