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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봉쇄가 부른 '에너지 흑기사'… 인도는 왜 러시아산 원유 3000만 배럴을 쓸어담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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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봉쇄가 부른 '에너지 흑기사'… 인도는 왜 러시아산 원유 3000만 배럴을 쓸어담았나

미 재무부 '30일 한시적 제재 완화' 직후 인도 기업들 해상 정체 물량 전량 선점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중동산 공급 끊기자 러시아산이 유일한 ‘에너지 안전판’ 부상
한국 등 중동 의존국 수급 비상 속 실리주의 기반의 글로벌 에너지 재편 가속
인도는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석유·천연가스 수급에 큰 어려움을 겪자 미국의 허락 아래 러시아산 원유를 긴급히 구매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이미지 확대보기
인도는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석유·천연가스 수급에 큰 어려움을 겪자 미국의 허락 아래 러시아산 원유를 긴급히 구매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중동 분쟁으로 인한 호르무즈 해협 봉쇄라는 전례 없는 위기 상황에서 인도가 미국의 전략적 묵인 아래 러시아산 원유를 대량 확보하며 글로벌 에너지 시장의 ‘실리주의’ 끝판왕으로 등극했다.

12일(현지시각) 가디언(The Guardian)과 블룸버그(Bloomberg), 모스크바타임스(The Moscow Times) 등 외신에 따르면 인도 정유사들은 미 재무부가 한시적 제재 완화 조치를 발표한 지 불과 일주일 만에 시장에 나온 러시아산 원유 3000만 배럴을 사실상 전량 매입하며 에너지 안보의 틈새를 메웠다.

막힌 호르무즈와 뚫린 제재… 인도 '3000만 배럴' 긴급 수혈의 막전막후


이번 인도의 ‘원유 싹쓸이’는 단순히 저렴한 기름을 찾는 차원을 넘어선 생존 전략이다.

지난달 28일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 이후 호르무즈 해협이 사실상 폐쇄되면서, 인도의 주력 공급원이던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라크산 원유 수급이 완전히 끊겼기 때문이다.

인도 전체 원유 수입의 약 40%가 통과하는 이 해협이 막히자 인도 내에서는 LPG 부족 사태 등 에너지 대란 조짐이 나타났다.

이 시점에 미 재무부 해외자산통제국(OFAC)은 지난 5일(현지시각) 이전에 선적된 러시아산 원유에 한해 4월 4일까지 30일간 인도행 판매와 인도를 허용하는 ‘일반 면허 133호’를 전격 발급했다.

국제 유가 급등을 막으려는 미국의 전략적 판단이 인도의 숨통을 틔워준 셈이다. 이에 인도 국영 인디언오일(IOC)과 민간 대기업 릴라이언스 인더스트리(Reliance Industries)는 각각 1000만 배럴 이상을 확보하며 발 빠르게 움직였다.

'중동 의존 70%' 한국의 그림자… 인도의 독식이 던지는 수급 경고장


인도의 이번 공격적인 선점은 중동 의존도가 절대적인 한국 경제에 ‘공급망 고립’이라는 뼈아픈 시사점을 던진다.
한국은 원유 도입량의 95%가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구조적 취약점을 안고 있는데, 인도가 아시아 인근 해상의 러시아산 급매물을 전량 흡수하면서 우리 정유사들이 기댈 수 있는 ‘대체 급매물’은 사실상 소멸했다.

실제로 국내 정유·석화업계는 중동발 원유 공급 중단에 따라 나프타 등 원료 수급에 차질을 빚으며 일부 제품에 대해 ‘불가항력(Force Majeure)’을 검토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금융권 안팎에서는 유가 폭등과 환율 상승이 맞물린 ‘이중고’ 속에서 서울 휘발유 가격이 2000원 선을 돌파할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인도가 러시아와의 특수 관계를 이용해 에너지 안전판을 마련한 것과 달리, 수입선 다변화가 더딘 한국은 국제 유가 변동성에 고스란히 노출된 실정이다.

'디스카운트' 사라진 러시아산 원유… 배럴당 8달러 웃돈에도 사들이는 이유


흥미로운 대목은 원유의 가격 변동이다. 전쟁 전까지만 해도 러시아산 원유는 서방의 제재 탓에 브렌트유(Brent) 대비 배럴당 10달러 이상 저렴하게 거래됐다. 그러나 공급망이 무너진 현재, 인도 기업들은 오히려 브렌트유 대비 배럴당 2~8달러의 프리미엄(웃돈)을 얹어주고 러시아산을 사들이고 있다.

실제로 지난 12일 브렌트유 가격은 이란의 새 지도자 모즈타바 하메네이(Mojtaba Khamenei)가 호르무즈 해협 봉쇄 지속을 천명하면서 배럴당 101달러를 돌파했다.

블룸버그 이코노믹스는 해협 봉쇄가 3개월 이상 이어질 경우 유가가 164달러까지 치솟을 수 있다는 암울한 전망을 내놨다.

이런 상황에서 인도는 당장 배 위에서 갈 곳을 잃고 떠돌던 러시아산 원유(Urals, ESPO 등)를 확보함으로써 최악의 에너지 마비 사태를 피한 것으로 풀이된다.

미국의 '전략적 방임'과 에너지 패권의 재편


금융권 안팎에서는 이번 조치를 두고 미국의 대러 제재 원칙이 ‘인플레이션 억제’라는 현실적 과제 앞에 한걸음 물러선 것으로 해석한다.

스콧 베선트 미 재무장관은 "이번 조치는 해상에 묶인 원유만 대상으로 하는 단기적 조치이며 러시아에 큰 재정적 이득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지만, 시장 참여자들은 이를 "유가 폭등을 막기 위한 미국의 고육지책"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이번 사태는 지정학적 리스크가 공급망을 뒤흔들 때, 국가 간의 이념보다는 자국의 에너지 생존권이 최우선시되는 냉혹한 국제 관계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인도는 미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피하면서도 실질적인 에너지 자원을 확보하는 정교한 외교력을 발휘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향후 중동의 전운이 짙어질수록, 전통적인 서방의 제재망을 우회하는 이른바 ‘그레이 마켓(Gray Market)’ 원유의 가치는 더욱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진형근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inwook@g-enews.com